14화.
“식사는 입맛에 맞으셨습니까?”
셰이단이 집무실로 돌아온 녹스에게 차를 건네며 가볍게 말을 걸었다. 셰이단은 꼭 할 말을 하기 전 짧게 안부를 묻는 습관이 있었다. 그리고 녹스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그 여인이 깨어났다고 합니다.”
식사 시간인걸 배려라도 해줬는지, 제인이 그세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이었다.
“벌써? 우리 엑젤리스에 유능한 의사가 있었군.”
녹스의 유머라곤 느껴지지 않는 농담에 셰이단은 떨떠름하게 웃었다.
“가보시겠습니까?”
“루이스는…. 아니, 내가 직접 가야겠어.”
“마법사를 불러올까요?”
제인의 봉인에 대해 얼추 들어 알고 있었던 셰이단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녹스는 그 질문에 인상을 썼지만, 딱히 다른 대꾸 없이 가면을 챙겨 들었다. 피곤한 기색으로 다시 방을 나섰다. 할 일이 많은데 계속 시간을 뺏기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비예단만 계속 잡아두고 있다면 가장 큰 고민거리가 사라진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집무실과 녹스의 방이 있는 4층에서 한 계단을 내려온 녹스는 가장 안쪽에 위치한 문 앞에 섰다. 안쪽에서 뭐라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 대장님. 일어난 지 얼마 안 돼 기력이 없을 것 같아 식사를….”
녹스가 방문을 열었을 땐 이상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의사는 수프가 담긴 나무 그릇을 들고 있었고, 제인은 겁먹은 짐승처럼 벽 모서리에 박혀 덜덜 떨고 있으니, 마치 의사가 애완동물을 학대하다가 들킨 범죄자처럼 변명하는 모양새였다.
멀끔하게 씻겨진 제인은 녹스의 예상대로 보기 드문 신비로운 분위기의 미인이었다. 굽실거리는 검은 머리카락과 흰 피부는 흑과 백처럼 대조되며 어울렸다. 연한 쌍꺼풀이 있는 커다란 눈망울과 동그란 코끝,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붉은빛을 띠고 있는 입술은 인간이었다면 유명세를 날릴 법했다. 하지만 외모는 녹스가 그녀를 잘 대해줄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어주지 않았다.
“참 손이 많이 가게 만들어.”
녹스는 제인의 벌벌 떠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의사가 들고 있던 나무 그릇을 뺏어 바닥에 던졌다. 쏟아진 수프 위에서 빙글빙글 돌던 그릇은 녹스가 발로 차는 바람에 그녀의 앞으로 굴러갔다. 내용물이 다 흩어져 그릇 안에는 더 남아 있는 게 없었지만, 제인은 제 앞에 도착한 그릇을 손으로 들고 핥았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짐승의 모습이었다.
“노예 체질인가 보군. 앞으로 식사는 이렇게 전하면 되겠어.”
얼빠진 얼굴로 녹스를 바라보던 의사는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 흩어진 수프를 닦기 위해 무릎을 굽혔다. 그러나 먹게 두라는 녹스의 손짓에 그저 식은땀만 흘리며 자신의 환자를 바라보았다.
검은 가면 속 흉흉히 빛나는 눈에는 비예단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 어떤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 제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 경멸의 눈초리를 확실히 기억했다.
“저, 대장님. 아직 저주가 풀리지 않아 제대로 된 대화는 어렵습니다. 오시기 전에 살펴본 바로는 말도 못 하고 듣지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저주의 영향 같아요. 아직 심신이 안정된 상태도 아닐뿐더러….”
“귀와 입만 먼 거라면, 손은 멀쩡하니 필담 정도는 가능하겠지.”
“오시기 전에 시도는 해봤습니다만, 구체적인 대화는 어렵습니다.”
의사가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펼치며 녹스에게 어렵게 말을 전했다. 그 종이엔 의사의 필체로, 답변 없는 질문이 가득했다.
“곧 마법사가 오니 기다려. 숙녀의 식사 시간을 방해하다니, 내가 급한 마음에 무례를 저질렀군.”
뻔뻔히 불쾌한 말을 뱉는 녹스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었다. 제인이 허겁지겁 쏟은 수프를 먹는 걸 대단히 즐거운 걸 보는 듯 구경하는 그는 비예단에게 비췄던 친절한 모습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제인이 이종이어서 무례하게 구는 것도 있지만, 애초에 녹스는 쓸모없는 사람에게까지 친절한 선인은 아니었다.
“대장님,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들어온 노인은 비예단의 인신 공양을 추천했던 마법사, 빅토르였다.
“바쁠 텐데 왜 그대가 직접 왔지?”
“대장님께서 요청하시는데 어떻게 감히 어린 제자들을 보내겠습니까? 이 아가씨의 목에 걸려있던 구속구도 제가 살펴봤으니 드릴 말씀도 있고요.”
빅토르는 어두운 보라색 로브 속에서 손을 꺼내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구석에 앉아있는 제인에게 가까이 붙어 유심히 살폈다.
“제2의 봉인 저주가 걸려있군요. 구속구엔 신성력을 봉인하는 마법이 걸려있던데, 이 아가씨를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신성력은 사제들이 사용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이종 따위가 쓸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빅토르는 학문적 호기심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뜨고 물었지만, 녹스는 시큰둥해 보였다.
“이종들은 늘 신기한 재주를 부리곤 하니까요. 저희 상식으로 접근하기엔 부족한 게 많죠.”
이 대화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녹스를 대신해 의사가 대답했다. 이종이 신의 힘을 빌려 능력을 쓴다는 건 어쩌면 학회에 큰 관심을 끌 수 있을 만한 사안이라 빅토르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신성력을 사용하는 이종이 맞다면 여태 한 번도 기록된 적 없는 대단한 발견입니다. 혹시 필요 없으시다면 제가 데려가 연구해봐도….”
“논문 따위보다 더 가치 있으니 전 주인이 그딴 개목걸이나 걸어둔 게 아니겠나.”
여태 큰 반응이 없었던 녹스가 불쾌한 기분을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빅토르가 그의 행동에 의문을 가지며 인상을 찡그렸다.
“관심 없는 거 아니셨습니까?”
빅토르의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녹스는 앞에 있던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대답하기 귀찮다는 의미임을 알아챈 빅토르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시금 눈을 감아 저주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가늠했다.
“꽤 오래 지속됐어요. 저주 자체는 별 것 아니지만, 오랜 세월 속박된 저주는 풀기 꽤 까다롭습니다. 제가 오길 잘했네요.”
“지금 당장 풀 수 있는 정도인가?”
“그건 무리입니다. 아무리 하찮은 봉인이라도, 본디 저주를 건 자가 누군지 모른다면 해제가 어렵지요.”
“빅토르.”
이름을 불린 빅토르는 자신의 답이 녹스가 바라던 것이 아님을 알아채고 재빨리 정정했다.
“조금의 말미를 주신다면 가능합니다. 최대한 서두르겠습니다.”
“종은 알아볼 수 있겠나?”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신성력을 사용하는 종은 기록조차도 없습니다. 그래도 제2의 봉인은 보통 도망이 수월한 비행 이종에게 많이들 거니, 그쪽으로 알아보심이 좋을 듯합니다.”
“서두른다 했으니 2주면 넉넉하겠군.”
“자애로우십니다.”
빅토르가 과장되게 웃으며 대답했다. 녹스는 그런 빅토르의 행동에 인상을 쓰며 가보라 손짓했다. 의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색한 공기가 도는 방에서 제 주인의 눈치를 보고 있었고, 저 문을 열고 악마가 들어와도 좋으니 누구라도 와달라 속으로 빌고 있었다. 의사의 간절한 바람 덕분은 아닐 테지만, 때마침 셰이단이 노크 소리와 함께 찾아왔다.
“빅토르 님께 또 무리한 요구를 하셨나 보더군요.”
“요구가 아니라 명령이야.”
“네, 무리한 명령이요.”
“저 여자, 비행 종이라는군. 파수대로 보내서 써먹을 수 있으면 써먹어.”
“하지만 이미 날개가 없는데….”
“그 사제라면 돌려놓을 수 있으니 내일 그렇게 하라 전해.”
“둘을 만나게 해도 괜찮겠습니까?”
셰이단이 의문스럽게 물었다. 괜히 만나게 했다가 노예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짝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면 더 활력이 돌지 않겠나.”
“짝사랑이라 하셨습니까?”
“셰이단, 오늘치 비예단 업무는 끝이야.”
녹스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얼굴로 셰이단을 물렀다. 굳이 친절한 척을 하려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게 굴었더니 생각보다 피로했다. 시달리고 있다, 그렇게 느낄 만큼 피곤했다.
* * *
사제의 하루는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일어나는 걸로 시작됐다. 비예단은 몸에 밴 습관 때문인지 낯선 곳에서도 평소 일어나는 시간에 맞춰 눈을 떴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부드럽고 푹신한 침구에 한참을 더 웅크리고 있다가 이른 아침이면 으레 들리는 새소리에 결국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 하녀가 준비해준 고급스러운 실크 잠옷이 몸에 들러붙지 않고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다. 군침 도는 음식과 욕실이 딸린 좋은 방, 평생 입어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값비싼 잠옷까지. 모든 게 꿈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