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14)화 (14/95)

13화.

“그들의 능력이겠죠, 개체 수만 더 많았다면, 인간이 노예처럼 살았을지도 모르겠어요.”

녹스는 그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 주다가, 뭐라 중얼거렸다. 흐릿해 자세히 들리진 않았지만, 분명 그 이종의 행방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었다.

“예?”

“아니다. 이 여자, 다른 문제는 없나?”

“봉인이 걸려 있습니다. 전 주술엔 까막눈이라 정확히 알 수 없어서, 자세한 건 깨어나 봐야 알 것 같아요. 마법사를 불러 제거해 주시면 감쪽같이 없어질 겁니다.”

“이종에게 봉인은 당연한 건데, 굳이. 우선 정신 차리게 해놔.”

몸져누운 환자를 내쫓을 수는 없으니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생각했다. 이후에 제 고향에 갈 수 있다면 보내 주던가…. 비행 능력이라면 엑젤리스에 필요할 수도 있고, 그러지 않더라도 곁에 두면……. 제인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녹스는 그녀의 쓸모를 떠올렸다.

방을 나온 녹스는 집사에게 파수대에 연락하여 인원 보충이 필요한지 알아보라 명했지만, 제인에게 걸려있는 봉인에 대해선 따로 전달하지 않았다. 잊은 것일 수도, 부러 말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녹스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된 비예단은 식사 시간이 다가오기 한참 전부터 안절부절못하며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최대한 깨끗한 옷을 꺼내입고, 몇 번이나 흠은 없는지 살피며 거울을 들여다봤다. 거울 속에 앳된 얼굴이 비치자 양손으로 볼을 부여잡았다.

각하께서는 키도 무척 크고, 몸도 탄탄하고, 목소리도 어른스러웠는데….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얼굴을 괜스레 잡아당기다가 한숨을 쉬며 그만뒀다. 엑젤리스에 도움을 청하러 오길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한편으론 마음이 무거웠다.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남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자신이 덧없이 미웠다.

지켜주지도 못할 거면서, 왜 괜히 나서서는.

녹스와 자신의 차이가 너무나 확연하고, 제 부족함이 눈에 띄어서 질투가 났다. 자신보단 녹스가 제인에게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망상이 들었다. 그런 쓸데없는 잡념에 사로잡혀 있다가, 문득 스스로 놀라 얼굴을 붉혔다.

왜 제인을 두고 이런 추잡한 생각을……. 엄연히 인간과 이종인데, 잘 어울리고 말고 할 게 있나.

잡념들은 ‘제인이 인간이었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바람으로 귀결되었다. 오랜만에 혼자 있는 시간이다 보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나 그 생각들은 좀 더 깊이 들어가기엔, 사제에겐 너무도 낯부끄러운 것들이다 보니 당장 고개를 가로저어 떨쳐내 버렸다.

“하아….”

괜히 성을 돌아다니다가 뭐하냐고 질문 받을까 두려워 제인을 찾으러 다니지도 못하고 방에만 박혀 있는 모습이 한심했다. 어떻게든 합리화를 하고 싶었지만, 딱히 적절한 변명도 떠오르지 않았다. 푹신한 침대가 주는 안락감에 제인을 찾고자 하는 조급함이 조금 덜어진 걸 수도 있었다.

고작 질문을 받을까 두려워 직접 움직이지 않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어떻게든 변명을 하자면, 무기력한 기분 탓이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비예단은 제인의 비밀을 숨기면서도, 남의 눈을 피해 제인을 찾을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비예단 님.”

침대에 앉아 의미 없이 이불을 쓸고 있는데,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셰이단, 이 성에서 그나마 말 붙일 수 있는 사람이 왔다는 사실에 종종걸음으로 문으로 뛰어가자 살짝 문이 열렸다.

“녹스님께서 이미 식당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준비가 다 되셨다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네!”

비예단은 마지막으로 옷차림을 점검한 뒤 집사를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하녀와 하인들이 저마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비예단은 그것이 부담스러우면서도 자신이 대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나쁘지만은 않았다.

식당 천장엔 거대한 샹들리에가 빛을 내고 있었다. 아래로 펼쳐진 긴 식탁엔 녹스가 기다리고 있었고, 마주 앉는 자리엔 정갈하게 식기들이 정돈되어 있었다.

“늦지 않게 도착했군.”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셰이단은 긴장했는지 안색이 안 좋은 비예단이 의자에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빼준 뒤 음식을 준비하라 전하겠다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딱히 장식품이 없어 광활한 식당에 오로지 녹스와 비예단만이 침묵을 지키며 앉아있었다.

“엑젤리스의 음식이 맞을지 모르겠어.”

“저는 아무거나 다 잘 먹습니다. 냄새도 무척 좋아요.”

껄끄러운 침묵을 깬 건 녹스였다. 비예단은 그를 마주 보며 가면을 쓰고 어떻게 식사를 하시는 거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하녀가 음식을 내온 후 천천히, 우아한 손짓으로 가면을 벗어내는 몸짓에 궁금증이 해결된 것도 모자라 마을에서 들었던 소문마저 기억이 났다.

‘자기 얼굴을 본 사람들은 모두 죽였대!’ 전쟁터에서 시작된 소문이니 얼굴을 마주한 적군을 죽이는 건 당연한 순서였지만, 비예단은 그런 당연한 이치를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들지.”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스테이크와 신선한 샐러드, 내륙에선 보기 힘든 생선 요리까지, 군침이 도는 식단이었지만 비예단은 선뜻 음식을 입에 넣기 힘들었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까 긴장한 나머지 입에 모래알이 굴러다니는 것처럼 껄끄러웠기 때문이었다.

굳은 것처럼 앉아있는 소년의 모습을 보다 못한 녹스가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고개를 들게.”

녹스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던 비예단은 고장 난 목각 인형처럼 몇 번의 시간을 두며 고개를 들었다. 차마 눈을 마주칠 용기는 나지 않아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그런데도 녹스의 얼굴은 선명히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외모였다.

은발의 머리칼이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청아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비예단이 알고 있었던, 혹은 짐작했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연보라색 눈빛은 순수하기 그지없었고,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무서운 늑대 가면과는 극심히 대조될 만큼 따뜻했다. 그는 퍽 다정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차가운 목소리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얼굴과 무척 잘 어울렸다. 얼굴을 보고 나니 차가운 목소리로는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로테가 아름다움을 형체로 빚었다면 그건 필시, 녹스 엑젤리스. 이 사람이 분명했다. 과찬이 아니었다. 비예단은 이토록 귀하게 생긴 사람을 평생에 본 적이 없었다.

놀라움에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못한 채 그저 감탄사를 뱉었다. “와….” 외마디에 비예단이 느끼는 모든 감정이 들어가 있었다.

“감탄은 그만하고…. 식사를 하는 건 어떤가?”

“아아…! 네!”

이런 감탄들이 익숙한지, 대수롭지 않은 듯한 녹스는 식탁을 몇 번 두드리며 비예단을 집중시켰다.

“그…. 무서우신 분인 줄 알았는데,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요…….”

녹스는 뜬금없는 말을 하는 비예단에게 미소를 화답했다. 경박한 모습을 보여 부끄러움에 귀까지 붉게 물든 비예단은 말을 내뱉고는 허겁지겁 앞에 준비된 진수성찬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 말이 나오길 기다렸어.

미소에 담긴 속뜻은 오로지 녹스만이 알고 있었다. 그의 수려한 외모마저도 그가 쓸 수 있는 수단 중 하나였을 뿐이니까.

“소문과는 달라 놀랐겠군.”

“소문은….”

“내가 피에 미친 악귀라는 소문이 돈다는 건 나도 알고 있네.”

“그럼 왜 아니라고 하지 않으세요?”

“내 외모가 남들 보기에 유약한지라, 그런 게 필요할 때도 있으니.”

사생아, 전쟁터, 살인자…. 부정적인 단어들로 점철된 그의 인생에서라면 무서운 인상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납득되는 해명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친 비예단은 혹시나 자신이 언짢은 질문을 한 건 아닐지 염려되었다. 비예단이 제 기분을 살피고 있음을 눈치챈 녹스는 최대한 소년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작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미소에 담긴 거짓은 눈부신 아름다움에 가려졌다.

“그대의 형제가 백작 저로 잡혀간 이유로 가올테를 미워하게 된 건가?”

녹스는 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었다.

비예단이 자신을 완전히 믿도록 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고, 셰이단이 언급해 주었던 소년과 그 여인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아내고 싶었다. 약점은 최대한 많이 잡는 게 좋으니까.

약점 중에서도 으뜸은 당연히 인질이었다. 가올테 백작이 한 것처럼. 그 이종 여자가 형과 더불어 비예단의 아킬레스건이라면 더없이 완벽한 상황이었다.

“처음엔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백작님은 저희 신전에 후원도 하시고, 사제들에게 늘 친절하시거든요.”

“가올테는 영지에서 평판이 꽤나 안 좋던데.”

“네…. 형이 저택에서 몹쓸 짓을 당하고 있었어요. 전 그것도 모르고 그냥 좋으신 분인줄만….”

“델단이라 했던가.”

“네, 맞아요.”

“그럼 형 때문에 영주를 배신했다…? 우애가 깊군.”

“형 때문만은 아니에요. 물론 형도 제겐 무척 소중한 사람이지만….”

비예단이 한참 말을 골랐다. 이미 녹스와 처음 대화를 나누었을 때부터 그를 믿기 시작했지만, 제인의 안위를 자신이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말을 꺼냄으로써 제인에겐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갈지도 몰랐다. 엑젤리스의 주인이 제인을 이용하기 시작한다면 자신은 더 도움을 요청할 곳도 없었다.

하지만 아직 사회 경험이 부족한 비예단이 녹스의 눈을 피해갈 순 없었다. 붉게 물든 귀를 어쩔 수 없는 건 모든 사람이 똑같았다. 녹스는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회피하는 비예단이 가올테 백작 저에서 주워온 이종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예상했다.

당연한 결론이었다. 그 여자는 초췌한 몰골에서도 신비함이 가득했으니, 여자 경험이 없는 순진한 사제가 한 눈에 반하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말하기 곤란하다면 굳이 대답은 하지 않아도 괜찮네. 그저 개인적인 호기심일세.”

“죄송합니다…. 언젠가는 꼭 말씀드릴게요. 지금은….”

“그래. 모든 일이 끝나고 들어도 늦지 않지.”

“감사합니다.”

비예단은 다시 한번 녹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권력 있는 자 중에 이토록 배려심 깊은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각하에 대한 소문은 모두 헛소문이구나, 비예단은 홀린 것처럼 녹스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키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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