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13)화 (13/95)

12화.

셰이단은 친절한 미소와 늘 남을 배려하는 모습과는 다르게 의외로 남에게 쓸데없는 관심은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매사에 공과 사가 철두철미하다 보니 자연스레 비롯된 성정이겠지만, 그것이 인간미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녹스 또한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 비예단에게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하라 그에게 일렀고, 셰이단은 주인의 말이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할 만큼 충성심이 강했기에 어린 사제와 친해지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비예단이 하는 말은 모두 셰이단의 귀를 통해 녹스에게로 전해졌다. 참다 참다 물어본 제인에 대한 질문도 곧 녹스에게 전해질 것이었다.

“차가 식었을 테니 곧 다시 준비하겠습니다.”

셰이단이 비예단을 다시 응접실로 안내한 후 차를 새로 준비한다는 핑계로 자리를 떴다. 문 앞에서 잠깐 망설이던 비예단은 결국 살짝 노크하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녹스는 아까 봤던 그 모습 그대로 자리에 앉아 비예단에게 앉으라 손짓했다.

“바쁘실 텐데 제가 시간을 너무 뺏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대의 일이니, 신경 쓰지 말게.”

앉기 전 고개 숙여 사과하는 비예단의 모습은, 누가 봐도 작고 어린 소년이어서 녹스와 대면할만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녹스는 혹시라도 그가 겁에 질려 도망가지 않게끔 본인이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따뜻하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서 그대의 형은 잘 지내고 있던가? 이름이 델단…. 이라 했었지.”

녹스는 비예단의 붉어진 눈매와 침울한 표정을 보고 어떤 상황이 오갔는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형과 다시 베르티아로 돌아갈 생각인가?”

“…아뇨, 돌아가면 안 될 것 같아요….”

눈을 질끈 감은 비예단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짐승처럼 낑낑대며 대답했다.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형이 여기서 지낼 수 있게 해주세요.”

녹스는 이 능력있고 심약한 사제가 제 뜻대로 굴러가고 있음이 즐거워 웃음이 지어졌다.

“그대의 뜻대로.”

“그, 혹시 백작님을 재판할 수 있는 증거는…. 찾으셨나요?”

비예단은 이종을 납치 혹은 감금한 사실이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녹스가 백작에게 어떻게 죄를 묻겠다는 건지 궁금했다. 물어봐도 될지 내내 고민했었지만, 몇 번 녹스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가 소문처럼 극악무도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조심스레 물었다.

“사실을 고하자면 가올테는 죄가 없어.”

“네?”

“하지만 난 죄 없는 사람도 죄를 짓게 만들어 줄 수 있으니 걱정 말게.”

아무리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리숙한 비예단일지라도 그가 뜻하는 바는 대충 눈치를 챘다. 자신이 모시는 신의 가르침대로라면 절대 안 될 일이었지만, 당장으로선 로테보단 녹스를 더 믿고 싶었다.

혹시 자신이 죄에 가담한 건 아닐지 걱정하며 애꿎은 손만 만지고 있는 비예단에게 녹스가 짐을 덜어주고자 한마디를 더했다.

“그대는 그저 나와의 약속만 기억해. 나를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던 그 약속.”

얼마 전, 두 번째로 녹스와 대면했던 날. 목숨을 내놓아도 좋으니 가올테 백작이 죗값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했던, 그 날이 비예단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녹스는 얼마든지 도와주겠노라 약속했고, 그 대가로 나중에 자신이 부탁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노라 약속해 달라 했다. 그리고, 아무런 힘도 없는 비예단은 그 불공정한 거래를 수락했다.

“늘 명심하고 있습니다. 필요하실 때 불러 주시면 최선을 다해….”

바짝 군기가 들어 웅얼대는 비예단의 모습에 녹스가 소리내어 웃었다. 바람이 빠지는 소리 같은, 가벼운 웃음이었다.

“가올테 백작을 만나고 가겠나?”

“아닙니다.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럼 내게 따로 부탁하고 싶은 건?”

“괜찮습니다.”

“그래. 듣기로는 신전에 휴가를 냈다지.”

비예단은 내가 그걸 언제 이야기했지?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너무 긴장한 나머지 아무 소리나 뱉다가 실수로 말했나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따로 숙소가 없다면 성에서 머물도록 해. 엑젤리스 사람들은 외부인에게 친밀하게 굴지 않으니까.”

“감…감사합니다.”

“셰이단이 늦는군. 시종에게 방을 안내하라 이르겠네. 저녁은 함께하는 게 좋겠지.”

비예단은 응접실을 나와 걸으면서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는 말을 되뇌었다. 처음엔 불편한 공간에 공기마저 어색했었는데, 지금은 그나마 말 붙일 수 있는 셰이단도 있고, 제인도 여기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니 녹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그에 대한 감상은 무서웠다. 어차피 거절할 수 없는 저녁 약속임을 알기에 비예단은 두려움보단 감사함을 느끼려 노력했다. 하루 동안 많은 일이 있어 심신이 지친 비예단은 느린 발걸음으로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의 뒤를 따랐다.

녹스는 집무실 창가를 내려다보며 여전히 비예단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의 배려는 소년의 편의를 돌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소년을 구슬릴 방법을 모색하고자 하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비예단이 혹여나 자신의 곁을 떠나도, 도움이 필요하다면 자신을 떠올리길 바라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 * *

“얼마 전 베르티아에 가서 데려온 여인을 기억하십니까?”

차를 준비하러 간다고 했던 셰이단은 빈손으로 응접실에 돌아왔다. 비예단이 앉아있었던 자리를 툭툭 털어내며 정리하다가 문득 녹스에게 말을 전했다.

“아아…. 죽지 않았나?”

“아직 숨은 붙어 있습니다.”

“그 여자는 왜?”

“사제가 그 여자에 관해 물었습니다.”

“음…….”

간신히 실루엣만 기억하고 있던 녹스는 천천히 제인을 떠올렸다. 어두컴컴하고 역겨운 방에서 홀로 누워있던 여자. 그녀가 정신을 차려 가올테 백작에게 당한 일을 증언해 주면 굳이 일을 꾸미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도 같았다.

“그 여자는 어디 있지? 보러 가야겠어.”

녹스는 여자가 아직 눈을 뜨지 않았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얼굴이나 익혀둘까, 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그녀가 누워있는 손님 방에 찾아갔다. 비예단이 그토록 궁금해했던 제인의 행방은 3층의 손님방 중 하나였다.

베르티아에 들린 지 벌써 7일이 되었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걸 보면 꽤 크게 다쳤겠거니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은 걱정이 아니었다. 그녀가 일어나지 않으면 가올테 백작의 재판에서 증언을 서줄 사람이 없고, 결국은 번거롭게 일을 진행해야 하니까, 단지 그런 의미였다.

“아, 대장님. 오셨어요?”

마침 진찰을 보고 있던 의사가 녹스를 반겼다.

“아직도 정신이 들지 않은 것 치고는 멀쩡하네.”

“네. 아마 신성 치료를 받은 건지, 목에 걸린 구속구 때문에 난 외상말고는 따로 치료할 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침대에 엎드려 누워있는 제인의 옷가지를 잡았다. 어깨선에 걸쳐져 있는 옷을 슬쩍 내리자 양 날개뼈에 흉측한 화상 자국과 함께 숫자가 나열된 노예 인장이 선명히 보였다.

“아무래도 이종(異種) 노예 같습니다. 화상 자국을 보니 날개를 뜯은 뒤 지혈한 것 같아요.”

“이종? 인간인 줄 알았는데.”

“그저 화상 자국일 수도 있습니다만, 인간 노예는 불법이니까요. 한 번 알아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비행 능력이 있는 종족은 흔치 않다고 들었는데…. 운 좋게 이런 걸 다 주우셨네요.”

“쓸모없게 됐어.”

녹스는 제인이 인간이 아니라는 말에 혀를 찼다. 인간이 아니라면 재판에 설 수 없다는 게 이 국가의 법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잡혀 있었나.

다시금 악취가 나는 방에 붙잡혀 있었던 그녀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그 실루엣과 누워 있는 그녀의 얼굴이 겹쳤다. 지독히도 당하면서 살았나 보군, 감상은 그게 전부였다.

“제가 봤던 이종과는 전혀 달라서, 인간인 줄 착각했었습니다.”

어색한 분위기에 변명 아닌 변명을 뱉은 의사가 괜한 청진기를 만지작대면서 말했다.

“…이종을…. 본적이 있나?”

그의 말에 대단히 관심이 생겼다는 듯, 녹스가 물었다. 기대하는 어투의, 의미를 짐작하기 힘든 질문이었다.

“예? 아, 옛날에 왕진 갔던 용병 길드에 새로운 이종 노예가 들어와서 치료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 보라색 눈이 빤히 자기를 쳐다보자 지레 겁먹은 의사가 심문을 받는 것처럼 털어놨다.

“무슨 종족이었나, 지금은 어디 있지?”

전보다 좀 더 다급한 목소리였다. 의사는 결코, 그 질문들이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거라 느꼈다.

“음, 붉은 눈에 귀가 아주 길었으니, 아마 토끼 이종이었던 걸로 추측만 했었습니다. 도통 자기 얘길 안 꺼내잖아요, 이종들은.”

의사가 자신의 귀를 잡아당기며 과장된 몸짓을 보였다. 나름의 농담이었으나, 분위기는 한층 더 싸해졌다.

“어디 있냐 물었어.”

“어…. 글쎄요, 한참 뒤에 가보니까…….”

오래된 옛날 기억을 헤집는 눈이 위를 향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의사가 손바닥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대답했다.

“아무도 그 이종을 기억하지 못하더라고요. 물어봐도 다들 딴소리만 하고.”

의사는 인간들에겐 없는, 이종들에게만 부여되는 특별한 능력이 그들의 기억을 잊게 했을 거라 짐작했지만 자세히는 모르는 분야라 대충 얼버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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