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12)화 (12/95)

11화.

화려한 응접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비예단은 그 차림에 저도 신경이 쓰였는지 괜히 옷매무새를 몇 번이고 매만졌다. 오래되어 아무리 세탁해도 누런 기가 없어지지 않는 이 사제복이 부끄럽게 느껴진 건 오늘이 처음일 것이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가, 갑작스레 열린 문에 시선을 집중한 비예단은 깔끔한 정복 차림의 검은 가면을 쓴, 은발의 사내. 녹스 엑젤리스를 보고 다시금 눈을 내리깔았다.

“엑젤리스 각하를 뵙습니다.”

“늦었군.”

“죄송합니다…. 신전에 있다 보니 바깥 소식에는 조금 느려서…….”

“지금쯤 올 것이라 예상은 했어.”

해일러를 보내 신전에 정보를 넣어준 녹스는 비예단이 언제 올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사비로 마차를 구한다기에 벙어리 마부를 보내준 것도,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도착할 수 있도록 마부에게 천천히 오라 명한 것도. 모두 녹스였지만 비예단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가올테 백작이라면 수도로 보내지 않고, 엑젤리스의 감옥에 가둬 두었다. 그대의 형제는 손님방으로 모셨으니 방문해도 좋아.”

묻고 싶은 것은 제인의 행방이었지만, 형의 소식을 들은 비예단은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몰려왔다. 또 혼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을지, 제 혈육의 심약함을 알기에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걱정이었다.

“가올테 백작 때문에 저희 형이 피해를 받는 일은 없겠죠…?”

“그대를 돕고자 한 일인데, 그대의 가족에 피해를 줄 수 있나. 안전한 방에서 극진히 대접하고 있으니 걱정 말게.”

“혹시 저희 형 말고 백작의 저택에서 발견한 다른 것은… 없나요?”

녹스는 비예단이 뭘 묻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잠시 인상을 찡그리다가 빼먹을 뻔했다는 듯 손가락을 튕기며 소식을 전했다.

“도적 같은 잡배가 하나 있길래 끌고 오지 않고 죽였다. 중요한 사람이었나?”

더크. 머릿속에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지만, 굳이 말하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 지저분한 잡배는 지금 제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제인에 관해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그가 제인의 가치를 깨닫게 될까 봐 두려워 섣불리 꺼내지 못하는 답답함에 속이 꽉 막혀 들어갔다.

그순간 비예단은 그 답답함을 비롯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제인 때문에 더크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형에 대한 걱정이 이전보다 줄었음을 깨달았다.

“형을 만날 수 있을까요?”

“셰이단이 데려다줄 거야. 그대는 가올테의 재판만 이루어지면 그 뒤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나?”

“재판을 받으면 합당한 벌을 받게 되는 거 아닌가요?”

녹스는 그 순진한 물음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대는…. 정말이지, 사제로군. 칭찬은 아닐세.”

애초에 귀족에겐 법이 유독 관대하다는 점을 알지 못하는 얼굴이 훤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녹스를 바라보는 비예단은 뭐가 잘못됐다는 건지 알 수 없었고, 녹스는 굳이 그의 의견을 정정해 주지 않았다.

“증거를 모으면 가올테를 수도로 보내 재판을 할 수 있도록, 거기까진 내가 책임져 주겠다.”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계속 주눅 들어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당차게 은혜를 갚겠다는 모습에 녹스는 하찮다 느껴질 만큼 비예단이 가여웠다. 결국, 그는 자기 바람대로 녹스에게 은혜를 갚게 될 것이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녹스는 집사를 불러 비예단을 형에게 안내하라 말했고, 셰이단은 저를 따라오면서 점점 낯빛이 어두워지는 그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볼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친해지는 데엔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었는지 그저 입을 다물고 시키는 대로 안내를 마쳤다.

“이곳입니다.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아,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형과 얘기가 끝나면….”

“앞에 있겠습니다. 대화가 끝나시면 다시 응접실로 안내해 드려야 하니까요.”

“네…. 그럼….”

정교하고 깔끔한 문양이 새겨져있는 문고리를 잡으면서, 비예단은 속상한 얼굴을 하고 있을 형의 모습이 상상되어 마음이 무거워졌다.

“형….”

정돈된 방 안에 곱슬한 금발의 남자가 침대에 앉아있었다. 옷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끌려 나온 것인지 수수한 차림의 남자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선한 인상과 함께 비예단과 꼭 닮은 여린 모습이었지만, 부른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자마자 얼굴이 일그러졌다. 벌떡 일어난 그는 비예단과는 달리 꽤 큰 편인지, 네 살 터울인 동생보단 머리 하나가 차이나는 눈높이였다. 비예단은 형의 일그러진 얼굴을 마주한 순간, 형과 자신이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예감했다.

“비예단…! 대체 왜 그랬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비예단을 다그쳤다.

“형, 잠깐 울지 말고…!”

비예단이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델단의 울음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눈물로 엉망이 된 그의 초록색 눈에 당황스러운 기색의 비예단이 비췄다.

“우리…우리, 이러면 안 돼…. 우리 그냥 수도로 가서 살자. 너도 그냥 백작님 말 들어. 비예단, 응?”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형!”

“우리, 우리 출세할 수 있어…! 비예단, 백작님 따라서 수도로 가면 아무런 걱정 없이 살 수 있다고…. 응? 제발 형 말 들어, 응?”

“형은 그 더러운 놈한테 그런 짓까지 당해 놓고 지금 그런 말이 나와? 제정신이야?”

비예단의 말에 델단이 손으로 입을 막으며 경악했다. 알고 있었구나. 백작님과 내 관계를…. 수치스러운 기분에 머리가 멍해졌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모를 리가 있어? 형은 내 가족인데?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듣고, 얼마나…….”

비예단이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델단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몸을 떨면서도 동생에게 팔을 뻗었다. 턱을 따라 흐르는 눈물을 대신 훔쳐 주면서, “미안해, 미안해.” 하고 중얼댔다.

“형이 그런…. 그런 짓을 당하는데 내가 어떻게….”

“그래도 백작님은 생각보다 따뜻한 분이셔, 우릴 꼭 보호해 주실 거야. 어쩌면 너도 이제 신전 안 다녀도 될지도 몰라!”

끔찍한 현실과 기억에서 도망치고자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에 빠진 델단은 무슨 말도 통할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둘은 각자의 말을 하면서도 서로의 의미는 전혀 이해하지 않고 있었다. 델단은 촉촉하게 젖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비예단을 설득했다.

“백작님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닐 거야, 내가 하고 싶은 건 뭐든 하게 해주신댔어.”

“형이 하고 싶은 게 뭔데? 여태 아무것도 안 하고 살다가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답답한 심정에 결국, 언성을 높인 비예단이 잘못을 인지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이미 뱉은 말까지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나는….”

어쩌면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동생이자 훌륭한 사제, 비예단. 늘 그런 동생을 자랑스러워했고, 사랑했지만 형에게도 나름의 불만이 있었다. 델단은 다양한 분야에 재능이 있음이 확실한데도, 제 동생의 발치에도 못 따라간다는 점에서 스스로의 총명함과 맑은 정신을 좀먹어 들어갔다.

하지만 한 번도 속내를 말해 준 적 없기에 비예단은 형의 복잡한 심경을 알 리가 없었다. 방금 뱉은 말이 형에게 큰 상처가 되리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제발 그만 좀 해! 사람들이 다들 욕한다고, 형이 제정신이 아니래!”

비예단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에 델단은 여러 생각이 스쳤다. 내가 또 동생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구나, 역시 나는 늘 쓸모가 없구나, 하는 자기 비하였다.

“나는…. 너는 그렇게 생각 안 하지? 그렇지?”

“하……. 형이 이런 식으로 굴면 나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 나도 지긋지긋해. 짜증 난다고!”

“네가 나한테 그러면 안 되잖아, 비예단…. 나는…….”

“그만해, 형. 지금 제정신 아닌 거 누가 봐도 알겠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제 분을 못 이긴 비예단이 형을 뒤로 한 채 방을 나왔다. 닫힌 방문 뒤에서 델단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고 문 앞에서 그저 기다리고 있는 셰이단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화는 잘 끝내셨습니까?”

이미 밖에서 얼추 무슨 내용이 오갔는지 들었던 셰이단은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네. 마음도 정했고요.”

“따라오세요. 응접실로 다시 모시겠습니다.”

셰이단은 그가 무슨 마음을 정했다는 것인지 더 묻지 않은 채, 어깨를 잡고 몇 번 토닥여주었다. 제겐 일찍 세상을 떠난 부모와 어리광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형밖에 없었는데, 가족들에게 받을 위로를 낯선 사람에게 받으니 그 느낌은 배가 되었을까, 비예단은 셰이단이 생각한 이상으로 그에게 의지가 되었다.

“저, 셰이단 님.”

“네?”

“혹, 혹시…. 각하께서 베르티아에 방문하셨을 때, 별다른 이야기는 없으셨나요?”

“어떤 이야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사람…이라거나.”

“사람? 글쎄요. 딱히 들은 내용은 없습니다.”

문득 짐마차에 실려 온 여자에 대해 떠올렸지만,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저 제 주인에게 전해 줄 말이 하나 늘었음을 기억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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