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11)화 (11/95)

10화.

베르티아에서 나온 일행들은 길지 않은 시간을 달려, 서서히 초원에서 멀어졌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삭막한 땅에서 방향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같은 풍경이 이어졌다. 일행들은 황량한 황무지를 지나 높게 솟은 두 절벽의 사이로 들어갔다. 절벽 사이의 견고한 요새. 그곳은 녹스가 전쟁에서 돌아와 황제 폐하에게 가문의 영지를 포기하는 각서를 쓴 뒤 자리 잡은, 그의 새로운 고향이었다.

가파른 협곡은 그곳을 지나야만 갈 수 있는 공터에 마을을 꾸린 주민들에게 완벽한 안전을 제공해 주었다. 투박한 성문을 통과하여 지나가자 마을의 주민들이 일행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뒤로 몇 분을 더 달렸을까, 절벽을 깎아 만든 성에 다다르자 마차들이 멈춰섰다.

“오셨습니까.”

성에 도착하자 희끗희끗한 머리를 가진 집사가 일행을 반겨 주었다. 몇몇 하녀들은 젖은 수건을 들고 기사들에게 다가갔고, 황무지의 먼지를 뚫고 지나온 그들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회포를 나누었다. 집사 또한 제 주인, 녹스에게 다가가 수건을 건넸다.

“가올테 백작은 수감시켜 두겠습니다. 먼저 온 환자는 치료 중입니다.”

“환자와 방금 도착한 손님에게는 손님방을 내어주고, 사제에게는 아직 전달하지 마.”

“네. 명하실 때 따로 사람을 보내어 알리겠습니다.”

“상태는?”

“아직 정신이 들진 않았습니다.”

“죽으면 공동묘지에 묻어주거라. 최대한 살려보고.”

“정신이 들면 주인님께로 보낼까요?”

“내가 찾아갈테니 그럴 필요 없네.”

“알겠습니다.”

짧은 대화를 끝마치고, 저녁 만찬 때 보자는 이야기를 남긴 녹스는 따뜻한 목욕물을 준비하라는 명과 함께 곧장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황무지에서 마을, 마을에서 소도시라는 명칭이 붙기까지 엑젤리스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필요로 했다. 주변 백작령들이 위협하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하고, 농작물이 잘 자라지 않는 땅을 위해 여러 마법사와 전문가를 데려와 비옥하게 만드는 데에 많은 예산을 소모했다.

그 손실을 메꾸기 위해, 자원이라곤 인재밖에 없는 땅에서 기술자들을 육성하는 학교를 세워 지원하고, 그들이 만드는 물품을 판매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무역 경로를 텄다. 그 덕에 엑젤리스는 전쟁 중인 세계와는 동떨어진, 작은 천국이 되었다.

그 천국을 만든 녹스는 지독한 염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는지, 의미 없는 노동과 기약 없는 시간들이 아깝게만 느껴졌다.

차라리 망해 버렸으면.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자주 있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가면을 내던진 녹스는 아까의 위엄있는 모습은 어디 가고, 자조적으로 웃으며 한탄했다.

“내가 워낙 유능하니, 망하기도 쉽지 않군.”

언제부턴가 이곳에 얽매이게 되었다. 녹스는 엑젤리스가 마치 족쇄처럼 느껴졌다.

해가 막 떠오르고 있지만, 녹스와 셰이단은 한참 전부터 이미 문서 더미에 갇혀 책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 해가 한참을 떠올랐음에도, 주인의 식사를 챙겨야 할 집사는 오매불망 책상에 매달려 녹스가 읽기 편하도록 서류를 분류하고 있었다.

“꽤나 결백하게 살아온 모양이야.”

늑대 가면을 벗어던진 후 미간을 문지르며 인상을 쓰는 녹스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가올테 백작의 죄를 추궁하기 위해 그의 집에서 몰수해온 문서들을 살펴보고 있지만, 딱히 죄가 될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벌금형을 받을 정도로 깨끗한 가올테의 사정을 살피니 짜증이 치밀었다.

“시골 귀족이 죄를 지어봤자 얼마나 크겠습니까?”

셰이단이 식어가는 찻잔을 다시 채우며 물었다.

“루이스는?”

“감옥에 내려가 있습니다. 불러올까요?”

“아니, 직접 내려가지.”

녹스는 못마땅한 느낌이 다분한 몸짓으로 지하에 위치한 감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횃불이 곳곳에 걸려있음에도 축축한 느낌이 심해 녹스가 방문을 꺼리는 곳이었다. 입구에 겨우 왔을 뿐인데도 멀리서 악을 쓰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셨습니까, 대장님.”

“각하…! 각하! 제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십니까! 해도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그래. 어떻게 됐나?”

녹스는 가올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루이스의 인사를 가볍게 받곤, 시선을 돌려 철장 안의 가올테를 바라보았다. 시뻘게진 얼굴과 눈물인지 땀인지 알 수 없는 물기가 역겨움을 자아냈다.

“식사 배급하러 들린 거라, 심문은 아직입니다.”

루이스는 손에 수프가 가득 담긴 작은 나무 그릇을 들고 있었다. 가올테는 쉰내가 가득 풍겨 가까이에서 냄새를 맡으면 구역질이라도 나올 것 같은 수프를 먹지 않겠다 버티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엑젤리스의 방문을 환영하는 의미에서 주방장에게 특별히 주문한 메뉴인데, 그대의 입맛엔 썩 맞지 않았나?”

“이걸… 이걸 어떻게…!”

짐승도 안 먹을 거라 소리치고 싶었지만, 가올테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루이스는 자신이 모시는 주군의 집요함을 알고 있었다. 그는 늘 그랬었다. 늘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아주 기초적인 것을, 인권의 일종인 것들을 엉망으로 만드는 벌을 내리곤 했다.

그렇게 며칠을 취급하고 나면, 이상하게도 그 죄수는 귀족이, 혹은 인간이 가지는 고결함과 존엄성을 잊고 천민으로 다시 태어나거나, 미쳐 버린다. 불합리한 상황에 압도되어 이성적 사고가 마비되기 때문이었다.

녹스는 가만히 서서 가올테를 바라보았다. 어떤 말도 하지 않았고,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은 채 그의 두 눈을 응시했다. 가올테는 녹스를 올려다보다가 결국 떨리는 손으로 나무 그릇을 건네받았다. 얼마나 떨리는지, 수프가 사방으로 튀어 녹스의 신발 언저리에도 묻을 정도였다. 가올테는 결국 숟가락도 없이 수프를 들이마셨다. 세 번도 채 삼키지 못하고 헛구역질하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녹스가 따뜻하게 말했다.

“나의 환대를 사양하지 않아 고맙네. 심문에 협조한다면, 내일 식사는 조금 더 신경 쓰지.”

가올테는 일이 쉬이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 거짓으로라도 자신의 죄를 고할 준비가 되었다.

* * *

비예단은 이른 아침부터 외출을 위해 기록관을 찾았지만, 아직 담당 사제인 케일이 출근하지 않아 빈 종이만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 상급 사제 비예단 / 장기 휴가 사유:치료 / 목적지:엑젤리스 」

얼마 전, 녹스가 가올테 백작의 재산을 모두 몰수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터라 마음이 조급했다. 신전에만 있다 보니 바깥소식은 잘 알 수가 없어서 이제서야 알게 된 것에도 무척 짜증이 나 있는 상태였다.

신전의 마차는 엑젤리스 성까지 갈 수 없기에, 직접 사비를 들여 급하게 구한 마차는 낡아 빠진 바퀴 덕에 몹시 덜컹거렸고, 말들은 늙어서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뚫린 창문에서는 뿌연 모래바람이 쏟아졌다. 비예단은 더크가 예전에 주었던, 제인의 보석을 손에 쥐고 멀리서나마 보이는 절벽을 가만히 바라보며 급한 마음을 다스렸다.

아침 일찍 출발했건만, 도착한 시간은 점심이 다 지나서였다. 말처럼 늙어버린 마부는 핼쑥한 얼굴로 비예단에게 손을 내밀었고, 비예단은 은화 하나를 건네주며 친절하게도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했다. 마부는 인사를 들은 채 만 채하며 은화를 소매에 벅벅 닦아 주머니에 넣고 마부석에 다시 올라탔다.

황폐한 땅에 건설된 작은 도시라기엔 엑젤리스는 활기가 넘쳤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광장에는 저마다 가판대를 펼쳐 놓고 물건을 팔고 있었고, 아이들은 바람개비며 공이며 들고 뛰어다니며 한낮의 햇빛을 즐기고 있었다.

베르티아의 고요함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마치 수도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으나, 비예단은 잠깐의 구경을 끝마치고 가장 높이 위치한 엑젤리스 성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가는 길에는 큰 도시가 아니라면 보기 힘든 보라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와 잘 손질 된 갑옷을 입은 기사들도 드물지 않게 보였다.

“저…. 녹스 엑젤리스 각하를 알현하러 왔습니다.”

비예단은 군기가 바짝 들어있는 성문 앞의 경비병에게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용건을 꺼냈다. 이전처럼 거절당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경비병은 흔쾌히 문 앞을 비켜주었다. 이전에도 한 번 와본 적이 있기에 기억을 더듬으며 성의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입구로 들어가자 셰이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안녕하세요.”

셰이단이 저의 부모님과 고향이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알 수 없게도 묘한 동질감이 들었던지라 비예단은 그를 따라가면서 긴장이 풀려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이곳은 사람들이 참 활기가 넘치는 것 같아요. 이런 아무것도 없는 곳에 사람들이 모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각하께선 참 대단하시네요…….”

집사는 비예단이 하는 이야기에 종종 대답만 해주다가도, 어린애처럼 천진한 그의 모습에 친절한 미소를 보내왔다.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가 조금 염려가 되었지만, 응접실에 도착한 비예단이 이리저리 둘러보며 뭔가를 살피는 모습을 그대로 눈에 담아 주인에게 고했다.

“……살피더군요. 마치 뭔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 쪼끄마한 병아리 같은 게 설마 우리 성에 침입한 도적일지도 모른다는 소리인가.”

집사의 보고에도 심드렁하게 농담이나 하는 녹스는 응접실로 가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나 가면을 집어 들었다.

“저를 언제까지 첩자로 써먹으실 작정입니까?”

“고향 사람을 보면 마음이 좀 놓이지 않나, 난 그저 손님을 편하게 해주기 위한 성의를 베푼 거야.”

셰이단은 또 다른 질문으로 주인을 귀찮게 하지 않기 위해 말을 아꼈다. 그가 로드게릭스 공작부터 엑젤리스 성의 주인까지, 대를 이어 모실 수 있었던 것은 다 때를 아는 눈치 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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