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10)화 (10/95)

09화.

“대장님, 잠시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창문 아래로 보이는 엉망이 된 정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루이스의 말에 고개를 돌린 녹스는 느릿한 몸짓으로 부서진 문을 향해 다가왔다.

“시체 처음 보나?”

녹스가 방안을 확인하더니 툭 내뱉었다. 음산한 저택에서 발견된 시체. 상황과는 맞지 않는 가벼운 어투에 루이스는 힘이 쭉 빠져 과장되게 어깨를 늘어트렸다.

“부패한 흔적은 없어 보입니다.”

“시체 썩는 냄새도 아니군.”

녹스는 누워있는 지저분한 여인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갔다. 맥박을 확인하기 위해 손목에 손을 가져다 대자 미약하게 살아있음이 느껴졌다. 식어가는 온기마저도.

“루이스. 경이 보기엔 이 여자가 무엇으로 보이나?”

“글쎄요. 가올테 백작의 첩은 아니겠군요.”

“나도 경의 의견에 동의해.”

황당하리만치 의미 없는 루이스의 대답에 덤덤하게 대답한 녹스는 이 여자가 백작의 중요한 무언가를 알고 있어서, 혹은 엄청난 원수를 져서 이곳에 갇혀 고문당했다고 자연스럽게 추측했다. 그리고 가올테 백작이 재판에 서면 증인으로 꽤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제인의 상태를 확인한 그는 손을 떼고 일어나 이 방을 다시 한번 둘러보기 시작했다. 검은색 마룻바닥이라고 생각했지만, 눌어붙은 오래된 피가 이 여자를 중심으로 온 방 안에 흩뿌려져 있었다. 반항하지 못하도록 설계된 족쇄들의 구조와 바닥을 굴러다니며 썩어가고 있는 알 수 없는 작은 덩어리들.

그리고, 구속구에 걸려있는 마법. 녹스는 마법 따윈 쓸 줄 몰랐으나 마법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지낸 경력 덕에 그 기운이 뿜어내는 불쾌함을 일찍이 감지했다.

“성으로 데려간다. 정신을 차리면 백작에 대해 추궁해.”

“알겠습니다.”

“목에 걸려있는 건 제거해서 성의 마법사에게 보여라.”

녹스가 검집으로 사슬을 몇 번 내리치자 제인의 팔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목줄에 돋아난 가시 사이사이로 진 고름에서 악취가 풍겨났다. 그는 인상을 쓰면서도 망토를 풀어 제인에게 감싸준 다음, 루이스에게 들고 나가도록 명했다.

짐마차에 실려 성으로 향하는 제인은 가는 내내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도 계속 잠을 잤다. 정확하게 잠을 자고 있는 건지, 정신을 잃은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간혹가다 들리는 숨소리가 그녀가 아직 살아있음을 확인해주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햇빛인데도 그녀는 행복감을 느낄 새도 없이 점차 그렇게나 갈구했던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 감시를 위해 짐마차에 함께 탑승한 기사가 종종 그녀의 안색을 살피었으나, 몹시 창백하여 엑젤리스의 공동묘지에 이름 모를 묘비 하나가 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 * *

녹스는 방금 자신이 구해준 여자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남의 죽음에 염세적인 경향이 있었던 탓이다. 그는 제인의 존재를 금세 잊어버리고, 먼저 보낸 몇몇 기사들을 제외하고 오늘의 메인인 가올테 백작에게 찾아가기 위해 준비했다.

엑젤리스의 문장이 그려진 마차는 베르티아 마을의 중심부로 들어섰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점차 커지다가 곧이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선두에 흑마를 타고 있는 검은 가면을 쓴 남자의 정체를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대장님을 궁금해하더라고요.”

이미 베르티아에 몇 번 와본 적 있는 루이스가 농담하듯 말을 전했지만 녹스는 이런 상황이 익숙했기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머지않아 상아색 담장이 둘린 저택이 보였다. 과한 장식으로 인해 천박해 보이기까지 하는 대문 앞에는 녹슨 갑옷을 입은 경비병과 더크가 담배를 피우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베르티아의 영주를 만나러 왔다.”

제 주인을 대신해 명령을 내리려는 루이스를 저지시키고 말에서 내려 문 앞에 다가간 녹스는 차분히 이곳에 온 용건을 전했다. 큰 키 덕에 마주 본 사내들의 머리맡에 그림자가 졌다.

“약속은?”

거친 목소리가 한 마을 영주의 기사라고는 생각되지 않자, 엑젤리스의 기사들이 저마다 웃었다. 대답한 사내, 더크는 그 웃음에 담긴 조롱을 느끼곤 얼굴이 붉어져 담배를 집어 던졌지만, 오히려 더 천해 보여 기사들의 웃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녹스가 뒤를 돌아 눈치를 주자 웃음이 잦아들었다.

“주군을 지키려는 기사를 비웃으면 못쓰지.”

몹시 나긋한 목소리였다. 감미롭고 따뜻해 마치 상대를 위해주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대의 주군이 목숨을 바쳐 지킬 만큼 명예로운 사람이라면 그대로 있게.”

녹스는 그렇게 말하며 더크가 차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녹슨 갑옷처럼 검 또한 날이 무뎌지고 이가 빠진 상태였지만, 사람을 죽이는 용도에는 손색이 없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이 남자가 누구인지 채 깨닫기도 전에 더크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피가 솟구쳐 상아색 담장을 붉게 물들였다. 찰나의 순간이 지나자 머리를 잃은 몸이 속절없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엑젤리스의 기사들은 태연히 광경을 바라보았지만, 옆에 있던 다른 가올테의 경비병은 사색이 되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가면에 묻은 피가 매끈한 표면을 따라 흘러내렸다. 녹스가 아직은 살아있는 경비병에게 칼끝을 들이밀며 물었다.

“그대는 어떤가?”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대문을 붙든 경비병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잘 썼네. 내 검은 싸구려 피를 묻히기엔 값비싼 것이라.”

녹스는 허리를 숙여 목 없는 시체의 손에 검을 쥐여준 뒤 감사 인사를 건넸다.

아무런 작위도 없는 그가 백작 저를 함부로 침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저, 오래전 황제의 총애를 얻었던 가문이기에 아직도 친분이 있을 거라 생각한 자들이 지레 겁먹는 것뿐이었다. 녹스는 딱히 황제의 총애니, 뭐니 하는 것들에 대한 소문을 정정하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늘 유용하게 써먹는 편이었다.

들어선 저택의 정원에는 갖가지 구하기 힘든 꽃들이 즐비했지만, 풍경은 영 조화롭지 못했고, 관리가 안 된 분수엔 이끼가 가득했다.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의 현관 앞까지 다다라서야 다시금 녹스와 엑젤리스 기사들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나타났다.

“누구십니까?”

밖에서 일어난 소동을 전혀 몰랐기에 낯선 방문자에게 당연한 질문을 한 가올테의 집사는 순간 늑대 가면을 쓴 남자, 피가 묻은 가면을 머릿속에서 조합했다. 대답을 듣기도 전에 최악의 결론이 나왔는지 뒷걸음질을 치며 도망치듯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이 동네 사람들은 예의가 없네요.”

루이스가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웃는 이는 없었다.

“가올테 백작과 범죄 근황을 살필 수 있는 증거를 찾아라.”

녹스가 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저택을 수색하는 기사들 덕에 저택의 하녀들은 저들끼리 웅성거렸다. 녹스는 근처에 자리한 소파의 상석에 앉아 소란스러운 저택 안을 바라보았다. 머지않아 2층 층계에서 경박한 호통이 들려왔고, 큰 소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뚱뚱한 갈색 수염의 남자와 꿀 같은 머리카락 색을 가진 남자가 기사들의 손에 의해 끌려 나왔다.

“이놈들! 내가 누군지 알고…!”

“백작님!”

가올테 백작은 역정을 내고 있었고, 비예단의 형으로 보이는 남자는 그저 백작을 부르며 창백해진 안색으로 벌벌 떨고 있었다. 녹스는 지루한 듯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몇 번 두드렸다.

계단을 중간쯤 내려왔을 때, 그들의 눈에 소파에 심드렁하게 앉아있는 그가 보였다. 가올테는 이미 한 번 엑젤리스에서 녹스를 봤던 기억이 있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을 붙였다.

“각하! 제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십니까…! 그때 드리려 했던 건 뇌물이 아니라 작은 성의 표시였습니다!”

“아아…. 걱정 마시게. 그저 그대들을 엑젤리스로 초대하기 위함이니.”

녹스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말투로 평온히 답변했다. 가올테 백작은 가면에 가려진 얼굴을, 녹스의 속내를 읽을 수 없어 답답했는지 깊게 한숨을 쉬며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여기서 무슨 반항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자신은 엑젤리스로 끌려갈 게 분명했다. 이왕이면 순종적으로 따라가는 게 옳다고 판단했지만, 한참 어린 사람에게 이런 하대를 받으니 몹시 분했는지 몰아쉬는 숨은 거칠었다.

“백작님! 이…이게 어떻게 된건가요?”

“델단! 조용히 해.”

“저희를 어디로 데려가는….”

“조용히 하란 말 안 들려!”

가올테 백작이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비예단의 형, 델단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지만, 어디에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아 살며시 눈을 떴다. 백작의 뒤에 있던 기사가 가올테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그 신사는 귀한 손님의 하나뿐인 혈육이라, 상하면 안 되네.”

비예단. 그 순진한 사제가 내 뒤통수를 쳤구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 눈치챈 백작은 화를 식히듯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 사제라면 제 형이 인질로 있는 상황에 당연히 자신의 편을 들 것이다. 심약한 사제 따위 다시 속여 먹는 건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다시 구색뿐인 교양을 되찾아갔다.

“각하, 미리 말씀해주셨더라면 직접 방문했을 텐데요. 이 누추한 곳까지 직접 찾아와 주시니 영광입니다.”

“그래.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라.”

가올테는 영광스럽게도, 밧줄에 포박되어 마차에 짐짝처럼 수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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