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화.
“제가 실언을 하였습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무슨 뜻이었건 상관없어. 그대가 나의 목숨을 입에 올렸음이 중요한 거지.”
“벌을…. 내리신다면 받겠습니다. 하오나 제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에… 주제넘게 뱉은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셰이단. 나가서 기다려.”
녹스는 비예단이 쩔쩔매는 모습을 보며 매우 만족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 그는 집사에게 나가 있으라 가볍게 손짓했다. 비예단은 집무실로 오는 사이에 친해진 셰이단이 자리를 떠난다는 사실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아 셰이단을 애절하게 바라보았지만, 그는 제 주인에게 짧게 목례를 한 뒤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둘만 있는 공간에 적막이 찾아왔다.
“로테의 사제라….”
짧은 말 한마디와 함께 검은 가면의 뒤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이어진다. 악명 높았던 전쟁광의 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하얗고 긴 손가락이 매끄러운 가면의 표면을 쓸어내린다. 비예단은 여전히 잔뜩 주눅 든 상태로 자신이 뭔가 말실수를 한 건 아닌지 곱씹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리 엑젤리스엔 구원이 필요해. 땅은 척박하고, 먹여 살릴 사람은 많지.”
비예단은 모호한 말을 들으며 이 이야기의 핵심을 집어내기 위해 애썼다. 나더러 농사를 도우라는 걸까? 라는 멍청한 생각까지 다다랐을 때, 녹스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머지않아 추기경이 된다 들었네. 그 자리를 포기할 수 있겠나?”
그제야 작고 어린 사제는 그의 말뜻이 조금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원래 제겐 너무나 무거운 자리였습니다. 욕심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래. 좋은 마음가짐이야.”
“엑젤리스엔 사원이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없지. 그대가 있을 곳 또한 사원이 아니고. 자네는 로테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불우한 자들을 위해 희생하는 ‘고결함’은 신에게 배웠을 거라 믿어.”
“저를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목숨과 바꿔 가면서까지 가올테 백작을 나락으로 내쫓고 싶다면 다시 찾아와. 그때 다시 이야기하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녹스는 비예단에게 이만 나가보라 손짓했다. 마치 조종이라도 당한 듯 벌떡 일어나 녹스에게서 몇 걸음 떨어졌을 때, 비예단은 불현듯 갑자기 몸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의 겁먹은 모습과는 달리 그의 녹색 눈은 녹스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녹스가 앉아있는 소파 뒤로 나 있는 창가에서 때아닌 햇빛이 가득 차올랐다. 마치 녹스의 후광처럼, 신처럼 빛나는 그의 모습에 비예단은 홀린 것처럼 물었다.
“가올테 백작을 죽이실 건가요?”
자신의 목숨이 아닌 가올테의 생사를 질문함에 있어서 녹스는 이 거래가 성공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하게, 위로를 담아 대답했다.
“최대한 그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처리해 주겠다 약속하지.”
* * *
비예단은 엑젤리스에서 제공해 준 마차에 대해 연거푸 감사 인사를 한 뒤에야 떠났다. 소년이 떠나는 모습을 창가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녹스는 뒤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에 시선을 거두었다.
“들어와.”
“대장님을 뵙습니다.”
방문자는 엑젤리스의 대마법사, 빅토르였다. 척박한 땅에 영양을 공급하거나, 강수량을 조절하는 목적으로 고용되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해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아직 예순밖에 되지 않은 그는 여든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어떤가?”
“따로 감지 마법을 쓰지 않아도 느껴지는 강렬한 힘이었습니다. 제가 만났던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그 소년이라면 문제없을 거라 확신합니다.”
“저 소년이 엑젤리스 땅에 묻히면, 더는 걱정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하지만 아직은 연구가 더 필요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어디서,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구체적인 대안이 필요하니까요.”
“중요한 문제이니 신중하게 접근해. 두 번 다신 없을 기회일지도 모르니.”
그들은 비예단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애초부터 녹스는 비예단이라는 사제를 루이스에게 전해 들었을 때부터 도저히 진전 없는 녹지화 사업에 써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었다.
어린 시절 들었던, 산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
그는 제물로 써먹을 사람을 거리낌 없이 비예단으로 정했다. 제물의 힘이 강할수록 좋다고 하여 꽤나 기대했었는데, 빅토르에게 확신을 받았으니 앞으로 소년에게 친절하게 대하며 신뢰를 쌓을 계획이었다. 소년이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계획이 완성될 때까지 언제든 써먹을 수 있는 장기 말이 되어 제 손바닥 위에 있을 수 있도록.
* * *
제인은 얼마 전 소년이 바닥에 써준 글자들을 머리에 각인시키기라도 할 것처럼 몇 날 며칠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기다려요.’ 뭘 기다리라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어쩌면 그 애가 자신을 도와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얼마나 많은 인간이 자신을 포함한 이종들에게 순수한 호의를 가장하여 속여 먹었는지를 떠올리면 그 소년 또한 믿어선 안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피어오르는 희망은 제인, 그 자신 또한 어찌할 수 없었다. 물론, 지옥의 끝까지 와봐서야 희망이 얼마나 절망과 가까운지 알게 되었지만.
제인은 요 며칠 사이에 그 실날같은 희망 덕분인지, 기분이 평소보다 나았다. 그러나 소년은 해가 몇 번이나 뜨고 지는 동안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제 손가락이 온전히 몸에 붙어있고, 날카로운 칼에 찔리는 일이 없다면 지금 사정에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겠으나 제인의 불안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다. 그녀를 구해줄 사람은 오로지 그 소년이기에.
‘설마 이대로 굶어 죽지는 않겠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비참한 망상들은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혔다. 정신은 계속해서 피폐해져갔고, 그 소년의 치유가 없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어지러운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자세로 누워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고요한 세계에서 홀로 세상이 멈춘 것처럼 며칠을 보냈다.
문득 느껴지는 바닥의 진동에 감은 눈을 떴다. 가올테 백작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왔던 낡은 저택이기에 조금만 큰소리가 나도 바닥에선 작은 떨림이 발생했다. 청각이 봉인된 제인에게는 더욱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 애가 왔나?’
억습하는 공포심과 함께 기대감이 불쑥 올라왔다. 의심하던 마음은 사라지고, 심장이 요동쳤다.
‘그 애가 왔나 봐. 나를 도와주려고, 나를 벗어나게 해 주려고!’
제인은 몸을 돌려 문을 보고 싶었지만, 그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탓인지 고개를 드는 순간 몰려오는 현기증에 다시금 쓰러졌다. 그렇게 방문자가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못한 채 무방비하게 의식을 잃어갔다.
“대장님! 이쪽 문은 잠겨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분주히 돌아다니는 기사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반질반질한 갑옷을 입은 채였고, 군기가 바짝 들었는지 모든 행동에 절도가 묻어났다. 그들은 저택을 샅샅이 살펴 돈이 될만한 건 모두 자루에 넣고, 문서라고 부를만한 것들은 한자리에 차곡차곡 쌓아두며 가올테 백작의 재산을 몰수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가올테의 폐저택을 쳐들어온 녹스는 벽난로 맞은편에 나 있는 의자에 걸터앉아 그 광경을 등지고 있었다. 앉은 의자가 초라해 보일만큼 기품이 넘치는 그는 다 쓰러져 가는 테이블에 다리를 올릴 뿐인데도 우아한 몸짓이었다.
그는 편안하게 앉아 오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 길게 고민하지도 않았는지, 대뜸 찾아온 비예단은 뭐든 시키는대로 하겠다고 애절하게도 말하며 그에게 부탁했다. 부디 가올테를 벌해달라고.
즐거운 일을 추억하듯 감미로운 미소가 감긴 입술은 늑대의 형상을 본뜬 검은색 가면에 가려져 있었다. 그저 가면 사이로 보이는 연보랏빛 눈동자만이 희게 빛날 뿐이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가, 난처해하는 루이스의 모습에 허공에 손짓했다. 오랜 세월을 그와 함께한 루이스는 바로 대장의 손짓과 의도를 바로 알아들었다.
몇 번 큰 소음이 나더니 결국 문이 박살 나며 나가떨어졌다. 애초에 그렇게 단단한 재질도 아니었을뿐더러 이미 낡아 부식되고 있던지라 잠금쇠의 의미가 없을 정도로 무척 쉽게 부서졌다. 문이 열리자 루이스가 허공에 뿌려진 먼지에 팔을 휘저었다. 먼지 너머엔 미동 없이 누워있는 여자, 제인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