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7)화 (7/95)

06화.

이런 귀중한 인재가 있나.

보고도 믿기지 않는 풍경 앞에서 그는 비예단의 쓸모를 떠올렸다.

“잘린 목도 다시 붙일 수 있다?”

“네….”

“루이스, 해일러.”

“예, 대장.”

“방금 본 것과 들은 것, 모두 잊어라.”

“예.”

“내일, 이 시간. 나의 집무실로 오게. 그대가 원하는 게 뭔지 들어줄 테니.”

소년은 그 말을 듣자 안도한 듯 ‘감사합니다.’를 연달아 외친 후 기사들에게도 꾸벅 인사를 하고 떠났다. 루이스는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보다 꽤 당차다고 이야기했지만 녹스는 “당차긴, 무슨.” 하고 중얼거리며 이젠 가로막는 사람이 없는 길을 다시 걸었다.

“루이스…. 아니, 해일러. 이번엔 네가 베르티아로 가서 저 사제에 대해 알아 와. 뭐든.”

“저녁 식사 전에 찾아뵙겠습니다.”

해일러가 그 말을 끝으로 소년이 간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뒤에서 녹스가 하는 말을 듣고는 발걸음을 내딛으려다 멈추어버렸다.

“처음 봤을 땐 얼빠진 얼굴로 서 있더니, 제법 믿음직해졌구나.”

그녀의 마음속에서 작은 불씨가 일어났기에.

* * *

해일러는 녹스가 구한 수많은 생명 중 하나였다. 그에게 목숨을 빚진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그녀 또한 엑젤리스로 이주한지도, 그의 곁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에 기사단에 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지도 꽤 오래 되었다. 드디어 엑젤리스의 갑옷을 입게 되었지만, 기사단의 인원 중 가장 늦은 기수인 데다, 여자이기에 처음 입단했을 때부터 그의 눈에 띄지 못할 것이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애석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는 녹스 엑젤리스의 밑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작년 겨울, 아침에 훈련장을 쓸고 있을 때 녹스가 나타났다. 그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그가 자신을 구해 주었을 때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늘 보아왔던 검은 가면의 모습이 아닌 처음 보는 민낯의 얼굴이었지만, 꿈에서 마주하는 게 아닐까 싶은 비현실적인 은빛 머리칼과 연한 보라색 눈이 그가 소위 말하는 엑젤리스의 ‘대장’임을 알게 해주었다. 살포시 내리는 진눈깨비가 그의 머리에 내려앉았다.

연민이 가득 담긴 얼굴을 하는 그의 시선 끝에는 두 개의 무덤이 있었다. 훈련장 안쪽, 그가 눈물로 파내고 절망으로 덮은 가족의 무덤. 앙상하게 시든 나무 아래에서 그의 혈육들은 겨우 눈을 피하고 있었다.

그는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아름다웠고 안타까웠다. 전쟁터에서는 악명을 날린 ‘전쟁귀’ 였으나, 가면을 쓰지 않은 그는 그저 차가운 땅 밑, 잠들어 있는 가족을 애도하는 유족이었다. 녹스의 입가엔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음에도 눈은 여전히 고요했다. 피붙이들을 잃었던 그의 추운 겨울은 시간이 지남에도 여전했다.

해일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녹스 엑젤리스의 내면에 대해 생각했다. 세간에서 말하는 소문은 모두 헛소리였다. 친족을 죽인 살인자가 저토록 아픈 얼굴을 하진 않을 테니까.

그녀는 잠시 넋을 잃고 그를 감상했다. 그의 아름다운 외모로 인해 잠깐이라도 이성적인 흔들림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충성심을 새겼다. 해일러에게 녹스라는 사람은 ‘경외’ 그 자체였다.

해일러의 끈덕진 시선이 녹스의 심기를 거스른 걸까, 녹스의 시선이 무덤이 아닌 그녀를 향했다.

“그대는 얼마 전 입단한….”

“해일러입니다, 대장.”

“그래. 이름은 알고 있었지. 여자인 줄은 몰랐는데.”

해일러의 머리카락은 강렬한 붉은색이었다. 그녀가 붉은 머리칼을 가진 건 어찌 보면 행운이었다. 그녀의 고향인 노스어에선 행운을 상징하는 붉은 머리카락이 비싼 값에 팔렸기 때문이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자라는 족족 잘라 시장에 내다 팔았다. 불행한 유년기였지만, 그 덕에 굶어 죽는 사람이 흔했던 고향에서 밥이라도 굶지 않았으니 다행이었다.

그 습관은 해일러를 떠나지 않았고, 20년도 더 지난 지금 여전히 짧은 머리를 유지하게 했다. 물론 짧은 머리만으로 남자라고 오해를 받은 건 아니었다. 노스어 인의 특징인 구릿빛 피부와 다부진 체격도 오해에 크게 한몫을 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다면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정말로 놀랍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녹스의 모습을 보자 해일러는 ‘한참 멀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더욱 정진해서 대장의 눈에 띄도록 하겠습니다.”

녹스는 해일러가 시선의 갈피를 못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성에 흥미가 없던 그는 당연히 제 주군이 슬퍼하고 있는 모습에 어찌할 줄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쪽은… 내 부친이신….”

녹스가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아픈 표정을 지었다. 해일러는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가려 했지만, 결국 제자리에 섰다. 저 위태로운 얼굴을 가까이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예…. 알고 있습니다.”

해일러는 빈민촌 출신이라 귀족의 예의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다. 그저 난처한 심정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칠 뿐이었다. 그 심정이 전해진 것인지, 녹스가 작게 웃었다.

“너무 그러지 않아도 돼. 이미…. 전부…….”

녹스의 표정이 다시 수심에 잠겼다. 천천히 말이 늘어지다가, 결국 마지막 한마디를 뱉었다. 너무 처연해 더욱 시렸다.

“잊었으니까.”

해일러 또한 힘든 유년기를 보냈고, 엑젤리스의 기사가 되기까지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아왔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의 커다란 슬픔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마음이 쓰라렸다. 아팠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동정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또한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 같은 주군께 감히 동정도, 애정도 품을 수 없었으니까.

* * *

녹스가 볼일을 마치고 다시 성에 돌아왔을 때, 집무실에 해일러가 도착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베르티아가 아무리 옆 마을이라도 반나절 만에 정보를 수집하여 돌아오기엔 힘들겠지. 루이스가 아닌 해일러를 보낼 때부터 이미 늦어질 거라 예상했던 그는 해일러를 아직 수족으로 부리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해일러를 몹시 과소평가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식당에서 녹스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조금 지친 기색이 있었지만, 어느새 갑옷을 벗고 옷까지 정돈한 상태였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

“예. 식사 전 집무실에서 보고 드릴 생각이었는데, 조금 늦어 식당으로 바로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대도 한술 뜨겠나? 아직 식사 전일 텐데.”

“괜찮습니다.”

녹스는 그녀가 거절할 줄 알았다는 듯이 손짓으로 2인분의 음식을 내오라는 신호를 한 뒤 자리에 앉았다. 해일러는 뒤에 서 있었지만, 녹스가 자리에 앉으라 턱짓하자 마지못해 그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보고해.”

“예, 소년의 이름은 비예단. 베르티아의 로테 신전 소속입니다. 부모는 둘 다 15년 전 돌았던 전염병으로 사망했습니다. 형제가 하나 있지만, 영주…. 가올테 백작이 데려갔다고 합니다.

혹시 형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지 알아봤습니다. 주민들 말로는 오히려 호의호식하고 있다더군요. 비예단의 능력은 그때 밝힌 대로 시간 역행이 맞습니다. 이는 극소수만 알고 있고 대외적으로는 치유 능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람의 신체, 공간, 물건을 가리지 않고 물체의 시간을 역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공간이나 물건에 대해선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고 알려졌습니다.

외상이나 갑작스럽게 얻은 지병은 치료할 수 있지만, 유전병은 언제도 재발할 수 있어 치유를 해주지 않는 바람에 유전병 환자들에겐 평판이 안 좋은 편입니다. 그래도 인성이 아주 바르고 착해 동네에 칭찬이 자자합니다. 주말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봉사도 한다고 하니 알 만하죠.

비예단과 오랜 시간 지내온 동료 사제들로는 요즘 들어 가올테 백작의 부름을 받고 자주 외출한다고 하며, 최근 안색이 나빠졌고, 식사를 자주 거른다고 합니다. 종종 밤에 몰래 외출도 했다고 하네요.”

“가족에 대한 복수도 아니고…. 가올테 백작에게 약점이라도 잡힌 건가.”

“최근 더크라는 잡배와 함께 있는 것도 종종 목격되었다고 합니다. 몇 마디를 나눴을 뿐이라지만, 그렇게 심성이 바른 사제가 동네 양아치와 얘기할 일은 없으니까요.”

“회개하라는 걸 수도 있지.”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아 오기 위해 숨 고를 틈도 없이 뛰어다녔건만,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녹스의 모습에 해일러는 할 말을 잃었다. 우아한 동작으로 물컵의 표면을 쓰다듬던 녹스도 그걸 알아챘는지 ‘더 없나?’ 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아본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루이스에게 전해 듣기로는 곧 추기경 자리에 오를 거라던데.”

해일러는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대장이 원하는 정보는 이런 시시콜콜한 내용보단, 비예단이 그에게 도움이 되느냐, 안되느냐를 판가름할 정도면 되었다.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해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직감한 그녀는 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

“다음부턴 루이스를 함께 보내야겠어.”

“죄송합니다.”

“들지.”

식탁에 음식을 올려놓던 주방장이 가라앉은 분위기 탓에 허겁지겁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녹스는 가면도 벗지 않은 채 나이프를 들고 테이블에 툭툭 쳤다. 먹으라는 신호였다. 해일러는 서투른 솜씨로 나이프와 포크를 들며 여태 궁금해 왔던 질문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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