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6)화 (6/95)

05화.

엑젤리스의 ‘대장’. 녹스 엑젤리스는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아르모단의 개국공신, '로드게릭스 공작가'의 마지막 남은 후계였지만 작위를 버린 그를 공작이라고 칭할 순 없어 자연스레 생긴 호칭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황무지에 건설된 이 황량한 도시에 어울리는 호칭이라며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그는 아르모단과 바다 건너 땅, 노스어의 전쟁에 큰 공을 세웠으나 자신을 둘러싼 많은 소문을 뒤로하고 이곳으로 왔다. 처음엔 어릴 적부터 함께 지낸 집사인 셰이단과 단둘뿐이었지만 전쟁 포로로 끌려가는 이들을 구해 주거나, 영주에게 수탈된 주변 마을을 도와주면서 서서히 인구가 늘어나 이젠 남부럽지 않은 도시가 완성되었다. 녹스는 본인에 대해 떠도는 소문과 아버지를 닮은 특출난 머리를 활용해 정말 이 땅의 ‘대장’이 되었다.

“셰이단 님, 며칠 전부터 대장님을 뵙겠다고 성문 앞에서 온종일 기다리는 애 말이에요. 그냥 계속 둡니까?”

성문을 지키는 경비병이 교대가 끝나고 이 성의 집사, 셰이단에게 조언을 구했다.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이 생긴 애가 땡볕에 서서 종일 죽치고 있으니 경비병 이전에 사람 된 마음으로 걱정이 된 이유에서였다.

“주인님께는 제가 전달하겠습니다. 소년에게 어떤 말도 붙이지 말고, 지금처럼 안된다고만 하세요.”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사무적인 어투로 경비병을 되돌려 보낸 셰이단은 매일 같이 들려오는 경비병들의 걱정어린 소리에 한숨이 나왔다. 비예단은 벌써 일주일이 넘도록 성 앞에 눌러앉았고, 제 주인은 알면서도 별말이 없으니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셰이단은 착잡한 심정으로 주인의 외출을 돕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주인님. 루이스와 해일러 경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을 준비하라 할까요?”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녹스는 햇볕이 잘 드는 집무실 의자에 앉아 창가를 바라보고 있다가 셰이단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업무 시간 내에는 꼭 검은색 늑대 가면을 쓰고 있는 녹스는 어둡고 권위적인 이 집무실과 무척 잘 어울렸다.

셰이단도 시선을 바꿔 녹스가 바라보고 있던 곳을 응시했다. 그 위치에선 성문이 훤히 보이는 것을 셰이단은 알고 있었고, 결국 비예단을 내려다보고 있었음이 분명했기에 구태여 경비병의 말을 전하지 않았다.

“말은 됐어. 오늘은 걸어가지.”

“알겠습니다.”

녹스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사실 그는 비예단을 엑젤리스로 부른 모종의 계략에 큰 관심을 두고 있진 않았다. 이미 영웅 놀이에 환멸이 난 탓이기도 했으며, 엑젤리스의 대장이라 추앙받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책임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큰 이유도 있었다. 그는 모든 걸 책임지고 불명예스럽게 죽어간 남자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필수적인 식량만큼은 그의 뜻과는 별개로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황무지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 생존에 꼭 필요한 식량을 외부 세력에게 사들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많아 최근 들어 자급자족할 수 있는 계획 세우고 있었다.

처음 든 생각은 당연히 비옥한 땅을 가진 영주를 압박해 매달 수확량의 일부를 받는 것이었다. 그는 해결책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어 결국 주변 마을을 수색했다. 그렇게 눈에 띈 게 ‘베르티아’. 마침 베르티아의 영주, 가올테 백작을 모질게 쫓아낸 적이 있으니 명분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얼마 전 부하를 보내 토질과 수확량을 확인해오라고 했더니, 그보다 더 반가운 소식을 가져왔다.

‘지금은 그저 사제이지만, 머지않아 추기경이 될 사람입니다. 가까이하셔서 나쁠 게 없습니다.’

녹스의 충실한 기사인 루이스는 베르티아에 있는 신전에서 놀라운 능력을 갖춘 사제를 발견했다. 뒷조사를 해보니 영 이상한 부분이 있어 약점이라도 잡을까 했는데, 신전에 매수해둔 사제가 마침 엑젤리스로 가는 마차가 필요하다는 게 아닌가. 분명 녹스의 힘이 필요해 도움을 구하러 가는 것이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루이스는 엑젤리스로 가는 마차를 구한다는 소식에 냉큼 도와주었다.

제 주인에게 꼭 필요한 인재가 제 발로 손아귀에 들어가고 있었다. 비예단은 엑젤리스의 식량 문제를 깔끔히 없애줄 중요한 해결책이었다. 이 문제 때문에 골치가 아팠던 녹스에게도, 엑젤리스의 사람들에게도 비예단의 결정은 천운이었다.

* * *

녹스는 오늘 땅의 토질을 관리하는 마법사들과 여태까지의 수확을 확인하는 일정이 있었다. 말을 타고 가면 금방이지만, 가는 길에 성문 앞에서 만날 사람이 있기에 굳이 걸어가는 것을 택했다.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기대하며 느긋이 걸어가고 있을 때, 가느다란 미성의 목소리가 다급히 외쳤다.

“잠시만요!”

녹스의 곁을 늘 따라다니며 호위하는 기사, 루이스와 해일러 사이를 비집고 비예단이 그들의 앞길을 막아섰다. 녹스는 반가운 얼굴에 들떠있었다.

‘이 애가 유망한 사제란 말이지….’

가면 속, 흉흉한 눈이 어린 사제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비예단의 간절한 마음을 증폭시키기 위해 며칠이나 ‘네가 만나 뵐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하면서 번번이 거절하라 경비병들에게 명했는데, 생각보다 과감한 소년의 행동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났다.

“길에서 물러나십시오.”

사정을 알고 있는 루이스와 해일러는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소년의 목에 검을 들이밀며 위협했다. 그러나 비예단은 검 끝이 눈앞에 다가왔는데도, 그저 처연한 눈빛으로 녹스를 바라보며 드릴 말씀이 있다고 간곡히 부탁했다. 생각보다 담대한 모습에 더욱 흥미로워진 녹스는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위해 발걸음을 멈췄다.

“잠깐이면 됩니다. 녹스 엑젤리스 각하님이 맞으시죠?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시간을…. 잠깐이라도…! 저는 베르티아에서 온 사제입니다!”

녹스는 간절한 비예단의 부탁에도 그저 가만히 내려다볼 뿐, 아직은 소년이 말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대가 경비병들을 괴롭힌다는 그 소년인가? 또다시 이곳에 발걸음 한다면 다음번엔 잿더미가 된 베르티아에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가면 사이로 무심한 눈빛을 보내며, 게으른 목소리로 대답한 녹스는 기사들에게 손짓해 검을 거두게 했다. 기사들은 녹스가 일부러 비예단을 무시하는 연기를 하고 있음을 알기에 더는 경계하지 않았다. 위협적인 느낌이 다분한 말에도, 비예단은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기사들이 제 뒤로 오자 다시금 길을 따라 걸어가던 녹스는 그 말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쯤이면 완전히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르티아…. 별 볼 일 없는 작은 마을에서 치정극이라도 일어났나?”

비웃음이 담긴 어조로 내뱉은 녹스의 말에도 소년은 결연히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실제로 대면한 ‘녹스 엑젤리스’의 무서운 가면 때문일지, 아니면 더크에게 들었던 그에 대한 잔인한 소문 때문일지, 벌벌 떨며 대답하는 것이 전부였다.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아버린 그 공포심에 비예단의 시선은 아래로 처박혀 오로지 자신의 발끝만을 향했다.

“저희 마을 영주인 가올테 백작이 부당한 방법으로 큰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래. 그건 알고 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 상관은 없습니다. 그저 제 청을 들어주신다면, 저도 각하께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보답이라, 그대가 내게 없는 무언가를 줄 것으로 보이진 않는데.”

소년은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옆에 자란 작은 들꽃을 꺾었다. 이내 흰 빛이 꺾여진 줄기에 퍼지더니 곧장 자라나기 시작했다. 세상에 다시 없을, 축복 받은 능력이자 천부적 재능. 부모 없는 고아에서 단숨에 촉망 받는 사제까지 올라간 소년의 자랑거리였다.

루이스와 해일러는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시선은 작은 들꽃에 멈춰있었다. 특히나 루이스는 자신이 발견한 이 사제의 능력이 실로 대단해 내심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다시 자라난 꽃은 언제 자신이 꺾였었냐는 듯 다시 바람을 타고 살랑대고 있었다.

“저는 생명의 시간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숨만 붙어 있다면 떨어진 팔도 되돌릴 수 있고, 순간이라면 잘린 목도 붙일 수 있어요. 각하께서 제 요청을 들어주신다면, 저도 제 능력으로 각하의 목숨을 구해드리겠습니다.”

녹스는 언제 무서운 표정을 지었냐는 듯 눈에 웃음이 가득했다.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능력이었다. 흔한 사제들의 치유 따위보다도 훨씬 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