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화.
“더크 님은 여행을 많이 다녀보셨죠?”
“갑자기 무슨 개소리야?”
앞장서서 가던 더크가 휙 고개를 돌려 비예단을 바라봤다. 말투는 거칠었지만, 화가 난 얼굴은 아니었다. 그저 그런 말투가 교양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보였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줄곧 여기, 베르티아에서 자라와서요. 더크 님처럼 바깥세상을 구경하고 싶기도 해요. 나중에 대사제가 되면 순례도 하고, 봉사도 하러 많이 돌아다닌다고 하더라고요.”
“샌님이 나가 봤자 좋은 꼴 못 보는 게 지금 세상이다. 밖에 전쟁 중인 거 몰라? 곧 마무리된다고는 하지만 사방에서 피 냄새 풍겨오는 걸 너네 같은 놈들이 견딜 수나 있겠냐?”
좋아하는 주제였는지, 목소리가 무척 커진 더크는 일부러 허풍을 떨며 몸을 떠는 시늉을 보였다. 비예단은 착실하게 놀란 연기를 하며 본론에 들어갈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전쟁…. 그, 신입 사제들이 그러던데요. 녹스 엑젤리스 님이 저희 마을 근처에 터를 잡으셨다고요. 이야기 들었어요. 그분은 전쟁영웅이시지 않나요?”
“녹스 엑젤리스? 전쟁영웅?”
더크는 그 이름을 짓이겨 씹듯이 뱉더니 비웃음을 흘렸다. 그 또한 직접 만나본 적은 없어도, 그 이름과 함께 떠도는 소문만큼은 이야기꾼만큼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닌가요?”
잠깐의 침묵을 깬 건 비예단이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더크를 바라보자, 그는 마치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소문을 사실처럼 지껄이기 시작했다.
“걘 그냥 미친놈이야. 피 맛에 돌아 버린 놈. 제 아비에 형제까지 잡아먹었으니 할 말 다 했지. 사생아 새끼가 운이 트였어, 아주.”
“잡아먹었다니요?”
“전쟁터에서 저 아비랑 형제를 싹 다 죽여 버렸잖아. 안 들킬 줄 알았겠지. 근데 어째? 이미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 버렸는데. 그러니까 꽁지 빠지게 이딴 촌구석으로 도망 온 거 아냐.”
비예단은 녹스 엑젤리스가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 잔인한 성정이라는 이야기에 사색이 되었지만, 그 자연스러운 모습 덕분에 더크는 소년을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 그래도, 사실 그분께서 저희 마을 근처로 오셔서 안심되긴 해요. 그분께선 공작님이시니 백작님의 영지도 그분의 규범 권역이 되는 거 아닌가요?”
“공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놈 추방될 때 작위고 땅이고 다 뺏긴 거 몰라? 걔는 그냥 사람 죽이는 거나 관심 있는 놈이야. 너처럼 작고 힘없는 애들 죽이는 게 좋은 거지. 그래서 우리 백작님이 빨리 도망치시려는 거 아니냐. 얼마 전에 보석을 한 보따리 들고 갔는데 눈길도 안 주고 꺼지라 했단다.”
“뭐…. 저는 그런 정치 같은 건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마을이 안전해지면 좋은 거니까요.”
“엑젤리스가 우리 마을을 보호할지, 포위할지는 모르지. 걱정하지 마. 넌 백작님께서 저년이랑 같이 데려가기로 하셨으니. 감사한 줄 알아라.”
“그런가요….”
“어째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인다? 맨날 질질 짜기만 하더니, 형제가 쌍으로 백작님한테 엉겨 붙기로 결심이라도 한 거냐?”
더크는 음흉한 눈으로 소년을 흘깃 바라보더니,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잠금쇠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이윽고 방 안에 시체처럼 늘어져 있는 제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들이 들어와도 여전히 아무런 미동도 없이 누워있던 제인은 더크가 발로 머리를 후려 차자 그제야 움찔거리며 조금씩 움직임을 보였다. 소년은 바로 가서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고 치유를 준비했다.
“시작한다.”
더크의 웃음기 섞인 말과 함께 또다시 기이한 악행이 시작되었다. 제인의 눈물과 피를 착취하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고 손목을 그었다. 예전엔 피를 뽑아내는 가장 빠른 방법으로 목의 동맥을 긋기도 하였으나, 제인이 죽을 뻔한 뒤로는 최소한 생명에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 해결했다. 그래, ‘죽지 않을 만큼’만.
비예단은 이전처럼 구석에 박혀 울고만 있지 않았다. 제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가 겪는 고통을 모두 눈에 담아내려 노력했다. 공포에 질려 회색빛이 된 안색과 경직된 어깨, 바닥에 내팽개쳐지는 손가락 마디, 피와 눈물이 그릇에 맑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까지 똑똑히 기억했다.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서, 더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외면하지 않기 위해서.
더크는 비예단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드디어 저놈이 정신을 차렸다며 흡족해했다. 피비린내가 후각을 마비시킬 만큼 진동하자 비예단은 바닥에 손을 올려 공간을 정화했다. 적어도 제인이 이 공간에서 불쾌함 때문에 불편하지 않도록, 더크의 눈을 피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이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제인이 이렇게 고통받는 건.
손을 들어 올리기 전, 비예단은 먼지가 꾸덕하게 자리 잡은 바닥에 '기다려요'라고 짧은 글을 적었다. 제인은 그것을 보았으나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고, 바닥에 흩어지는 머리카락에 쓸려 글자는 금세 없어졌다. 오늘도 제인은 숨이 끊기기 직전, 소년에 의해 살아났다.
비예단은 더크가 가올테 백작 저로 가기 전, 오늘의 선물이라고 준 제인의 눈물 보석을 손바닥에 굴리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더크가 내리는 녹스 엑젤리스의 평은 그렇게 좋지 않았으나, 그는 백작이 바친 이 보석에 그렇게 큰 흥미를 보이지 않고 백작을 쫓아냈다 했었다.
그렇다면 그는 재산에 그렇게 큰 욕심이 없는 사람인 걸까, 그가 정말 자신의 가족들을 해친 살인귀일까, 자신이 터무니없는 곳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일까. 그가 제인을 고향으로 돌려 보내줄 수 있을까.
탐욕이란 본디 배고픈 자가 아닌 배부른 자에게 나타나는 욕망이었다. 녹스 엑젤리스는 어느 쪽일까? 답이 나오지 않는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 그렇게 한참을 져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고민하던 비예단은 앉아있던 그루터기에서 일어나 옷을 털었다. 대답은 녹스 엑젤리스만이 해줄 수 있었다.
* * *
다음날, 비예단은 망설이지 않고 곧장 행동에 나섰다. 한 번도 꾀병을 부려본 적 없는 성실한 그가 아프다는 핑계로 휴가를 내고 사원을 나섰다는 점부터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는 결심이었다.
“저….”
“어머, 아프시다고 휴가 내셨잖아요?”
“네. 그래도 언제까지 누워있을 수는 없으니까 치료를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요.”
“비예단 님을 누가 치유해주나요? 의사라도 찾아가시게요?”
기록관 케일이 핼쑥한 비예단의 안색을 살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 작은 마을에서 넘치는 신성력을 가진 이 사제를 치유해줄 수 있는 사람은 대사제뿐이겠지만, 다 늙은 노인의 기력을 빼앗아갈 수 없으니 비예단이 외부에서 치료를 받고 오는 것에 대해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엑젤리스에 유명한 의사가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요. 찾아가 보게요.”
“엑젤리스요?”
순간 케일의 눈이 호기심에 반짝였지만, 비예단은 파리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 뿐 호기심을 해결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저희 신전 마차는 엑젤리스까지 가지 않아요. 거긴 신전이 없잖아요.”
“아….”
옆 마을이라는 이야기에 그리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을 거라 예상한 비예단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에 말문이 막혔다. 작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케일과 비예단의 낭패로운 침묵이 잠깐 이어졌다.
“어…. 비예단 님. 그럼 신전 소속은 아니어도 엑젤리스로 가는 마차를 구해 볼까요?”
“그래 주시겠어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시무룩하게 닫혀있던 입이 활짝 웃었다. 머지않아 케일이 얻어준 마차, 마차라고 하기에도 뭐한 달구지를 본 순간 울상이 되긴 했지만.
“탈 거요, 말 거요?”
입안에 뭔가를 질겅 씹으면서 거뭇하게 탄 얼굴을 한 중년의 남자는 말 두 마리가 끄는 지붕도 없는 수레를 타고 있었다. 어린 시절 외에는 쭉 신전에서 지내와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던 비예단은 그 수레에 올라타기조차 버거웠지만, 그래도 주인의 면전에 대고 당황스러운 속내를 표 내는 건 그의 성정이 아니었기에 애써 차분한 척을 했다.
수레는 낡은 동네를 지나쳐 외성 밖으로 나갔다. 비예단은 고향인 베르티아를 떠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여행을 가는 것처럼 마음이 들떴다.
마을을 벗어날수록 나무는 점점 줄어들고,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삭막한 땅이 펼쳐졌다. 공기에 섞여 있는 모래 먼지는 비예단의 옷에도, 얼굴에도 뿌옇게 가라앉았다. 울퉁불퉁한 바닥 때문에 몸이 이리저리 부딪혀 안 아픈 곳이 없었지만, 수레의 주인인 남자는 덜컥대는 수레에서도 흥얼거리며 콧노래를 불렀다.
“다왔수.”
“아, 감사합니다.”
점점 심해지는 멀미에 기절이라도 한 것인지, 남자가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난 비예단은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남자는 손을 흔들어 보이며 거절을 표했다.
“돈은 됐수, 이미 높은 분께 받았으니.”
비예단은 그 말을 당연히 신전에서 미리 값을 치렀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 * *
“셰이단. 그 사제는?”
늑대 형상의 검은색 가면을 쓴 사내가 넓은 고동색 책상에 팔을 괴고 앞에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낮은 저음에 듣기 좋은 목소리였지만, 어딘지 위협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마부가 도착했다는 소식입니다. 금발 머리에 녹색 눈, 여기선 보기 힘든 사제복에 10대 후반으로 보인다고 하니 루이스 경이 말한 그 소년이 맞을 겁니다. 불러올까요?”
“제 발로 찾아올 텐데, 뭐하러 그런 수고를.”
검은 늑대 가면을 쓴 남자가 즐거운 이야기를 듣는 듯 나른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의 손에는 엑젤리스를 상징하는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