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4)화 (4/95)

03화.

그들은 저들끼리 깔깔대며 횃불을 들고 점차 멀어져갔다. 비예단 또한 아르모단의 개국공신 가문인 로드게릭스의 사생아, 녹스 엑젤리스에 대한 소문을 들어본 적이 있다. 전쟁터에서 아버지와 형제를 잃고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로 지목되었지만, 영지를 황제에게 반납한 뒤 홀연히 떠나 황무지에 엑젤리스를 세웠다 했던가. 소년은 짤막하게 주워들은 소문을 떠올리며 희망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아버지와 형제가 사망하면서 사생아였던 그가 얼떨결에 물려받은 공작 작위를 포기했다는 건, 의외로 욕심 없고 정의로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제인은 고위 귀족의 알량한 동정심이면 충분히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 사람이 지금은 아무런 작위가 없더라도,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고 알려진 그라면, 엑젤리스의 주인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비예단은 순진한 머리를 굴리며 희망에 비롯된 행복에 젖었다. 그에 대해 조금 더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사제로서 비예단의 일과는 단순했다. 신전에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다해 기도해 주고, 로테의 가르침을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으며 설파하는 일.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평범한 그의 일상이었지만, 친한 사람이라면 금세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소년은 최근 무척 예민해져 있었다.

갑작스러운 기척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하고, 종종 주변을 둘러보며 살피는 횟수도 많아져 동료 사제들은 걱정을 표했다. 마을에 왕처럼 군림하는 가올테 백작에게 반기를 드는 일을 계획하고 있으니 제 발 저리는 것은 당연했다. 주변의 걱정들에도 비예단은 그저 괜찮다며 요즘 좀 피곤할 뿐이라고 넘어갔다.

그리고 머지않아 비예단은 다시 가올테 백작의 부름을 받았다. 그가 보내는 편지는 매우 투박한 질감이라, 만져만 봐도 그가 보냈음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엔 몇 주에 한 번씩 편지가 왔을 뿐이지만 요즘 들어 부쩍 기간이 짧아졌다. 백작이 수도로 이사하기 위해 빠르게 자금을 만들려는 게 뻔했다. 그 탐욕에 진절머리가 났지만, 비예단은 백작의 조급함이 달가웠다. 백작의 심부름꾼인 더크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다시 제인을 해하는 데에 자신의 능력이 소모되는 점에 대해 죄악감이 들어 편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이내 종이를 구겨 촛불에 태운 후 외출 허가를 위해 기록관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케일 님.”

“비예단 님! 또 백작님 치료 나가시는 거예요? 많이 편찮으신가 보네.”

“네….”

“요즘 왜 그렇게 기운이 없으세요? 이 시골 촌구석에서 출세하는 길이라곤 영주님 눈에 띄는 건데, 좋은 일이잖아요.”

기록관, 케일은 축 늘어트린 어깨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비예단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지만, 그 질문에 더욱 울상이 되어버린 소년의 모습에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물론 로테를 모시는 사제로서 출세는 의미가 없지만요.”

“…다녀올게요. 해가 지기 전엔 돌아올 거예요.”

“알겠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신전의 후문으로 나와 쓰레기 소각장을 지나, 샛길에 다다르자 낡은 마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가올테 가문의 문장도 그려지지 않은 마차에서 마부가 눈짓을 보냈다. 비예단은 익숙하게 마차에 올라탔고, 마차는 얼마 전 걸어왔던 오솔길과는 다른 널찍한 산길을 내달렸다.

비예단은 정면을 응시한 채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그저 머릿속으로 제인과 자신에 대해 생각 중이었다. 소년은 여태 살면서 제인과 같은 이종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모습을 많이 봐왔다. 마을에 들리는 이종 사냥꾼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어 어렸을 적 그들을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었고, 사제 임명식 때는 대사제님 방에 있는 아가미를 가진 이종의 박제 장식품도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째서 자신이 이렇게까지 제인을 구하고자 하는지, 돕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직접 참여해서? 아니면, 그녀의 눈을 본 순간 그녀도 우리와 똑같은 생명임을 깨달아서? 마음 한구석을 후벼 파는 이질적이고도 애매한 느낌을 쉽사리 떨칠 수 없었다.

“더크 님.”

마차에서 내린 비예단은 저택의 문 앞에서 담배를 비벼끄고 있는 더크에게 다가갔다. 그의 몸에선 비린내와 함께 불결한 악취가 났고, 이는 누렇게 변색되어 그를 마주 보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지만, 그 ‘공작’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선 더크가 필요했다.

“편지 보낸 지가 언젠데 이제 와?”

“죄송합니다. 외출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해서요….”

“됐고, 빨리 들어가.”

“ …. 그전에, 저희 형은 잘 있는 건가요?”

비예단의 형은 보기 드문 미남으로, 성격이 자상하고 유순해 마을 내에선 인기가 많았다. 다들 일등 신랑감이라며 추켜세웠지만, 인망 없는 가올테 백작과 관련된 이후로는 동네에 그에 대한 흉만 가득했다. 남에게 미움받는 걸 싫어하는 형의 유약한 성격에 사람들이 제 흉을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상처를 받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너희 형?”

더크는 그 ‘형’의 안부에 무척 흥미가 깊은 듯 눈을 반짝이며 소년을 돌아봤다. 백태가 낀 혀가 두드러기 난 입가를 핥았다. 비예단은 비위가 상해 당장이라도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더크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곤 그대로 굳어 어쩌지도 못한 채 멍청히 서 있을 뿐이었다.

“너희 형 잘살고 있지. 어? 아주 잘살고 있어서 네 인생은 이제 망했어. 알아들어?”

“그게 무슨…?”

“너희 형이 가올테 백작 침실을 아주 꿰찼던데 아직 소문 못 들었나 봐? 백작님한테 남색 취미가 있는 줄은 나도 몰랐지.”

“얼마 전까진 그런 말씀 없으셨잖아요…?”

“그놈이 뭘 알아 버린 거지.”

더크는 그렇게 말하며 손으로 돈을 세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리고 비예단은 그 말과 행동을 이해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말….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신 말씀이….”

더크의 대답은 듣지 않아도 됐다. 마음이 여려서 늘 저를 걱정하던 형이 결국 자신을 위해 희생했구나. 머리가 아찔해 잠시 현기증이 일었다.

바보, 멍청이. 날 지켜 줄 필요 없다고 분명 말했는데…!

마음속에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분노가 끓었다. 나이를 허투루 먹은 게 분명해.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무슨 생각을 하면 그런….

화는 쉽게 잠재워지지 않았고, 결국엔 눈물이 고였다. 앞장서서 가던 더크는 뒤를 슬쩍 돌아보곤 소매로 눈물을 훔치는 비예단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야! 나도 백작님이 그런 취향이 있으신 줄 알았으면 좀 더 잘 보일 걸 그랬지 않냐? 그 푹신한 침대를 차지하는 게 네 형이 아니라 내가 될 수도 있었는데.”

조롱 섞인 말은 비예단에겐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소년의 흰 손이 주먹을 꽉 쥐었다. 더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즐거운 듯 입꼬리 한쪽을 올리고 싱겁게 웃고 있었다. 비예단의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져 갔다. 어떻게든 다시 돌아오게 해주겠다고, 형에게 꼭 조심하라고 그렇게 당부했는데! 점점 울상이 되어가는 얼굴을 하고는 더크의 뒤를 따랐다.

“너는 그냥 백작님을 위해 그 신성한 능력으로 봉사하면 돼. 알아들어?”

“…네.”

제인을 돕는 데에 껄끄러웠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사제의 직위를 잃게 될까 봐, 영주인 백작에게 미움을 살까 봐, 그리고…. 형이 위험해질까 봐.

그중에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형에게 피해가 가는 것이 두려웠다. 형은 바보처럼 착한 사람이라, 누군가에게 휘둘리기도 쉬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주의하라고 늘 당부했음에도 마음 한편이 걸렸는데, 결국 형은 자신을 믿지 않았다.

형이 백작 저로 잡혀간 것도, 형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자신의 이 망할 능력 때문이었다. 차라리 남을 해치는 능력이었더라면 더 좋았을까. 이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었다.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망설임이 사라졌다. 제인을 위해서도, 형을 위해서도 가올테 백작에게 반기를 들어야만 했다. 제겐 남을 해하는 데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능력이 있지만, ‘녹스 엑젤리스’라면 충분히 그럴 힘이 있을 것이다.

비예단은 머리를 지배한 자기혐오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열등감에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자신은 늘 형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죄스러워 힘들었는데, 형 또한 그런 죄책감에 시달렸을 거라는 사실에 마음에 있는 둑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강둑이 무너지는 느낌은 얼마 가지 않았다. 새로운 물길이 허한 가슴을 다시 채웠다. 비예단은 결심한 듯 몰아 쉰 숨을 내뱉었다. 제인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며, 비예단은 더크에게 무어라 질문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오는 내내 자연스러워 보이기 위해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막상 말을 꺼내려니 어색할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백작이 수도로 떠나냐 묻는다면 의심받을 게 분명하다. 조심스럽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처럼 자연스레 접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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