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화.
그녀가 이전보다 더 빨리 포기했음에 더크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소년이 구석에서 공포에 질린 얼굴로 덜덜 떨며 몇 번을 봐도 적응되지 않는 그 광경을 지켜보는 동안, 열 손가락이 모두 한 마디씩 잘려 나갔다.
바닥을 나뒹굴던 잘린 마디 중 하나가 허리를 일으킨 더크의 발에 밟혔다. 그는 발밑에 밟힌 덩어리를 짓이겨 바닥에 문지른 후, 다시금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목에 깊숙이 상처가 났다.
날붙이가 잘 들지 않는 것인지, 칼날이 몇 번이고 같은 자리를 왕복했다. 제인은 다시금 비명을 질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야, 이러다 죽는다?”
더크가 점점 반응하지 않는 제인의 손목을 흔들며 짜증스럽게 이야기했다. 비예단은 겨우 곁으로 다가와 부들거리는 손을 뻗어 제인의 머리 위에 올렸다.
따스한 빛이 소년의 손끝에서 뻗어 나와 제인을 감쌌다.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이 이내 점점 편안해졌다. 벌어진 피부가 다시 붙고, 잘린 손가락이 언제 그랬냐는 듯 돋아났다. 더크가 그 광경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다가 손에 묻은 피를 낡은 바지에 닦아 내며 투덜거렸다.
“배를 갈라 버리는 게 더 빠를 텐데.”
“무슨…! 그러다 진짜 죽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사색이 되어 소리를 지르는 모양에 더크는 새삼 이런 잔인한 일을 벌인 사람답지 않게 호탕한 웃음을 보였다.
“대충 마무리하고 가자.”
그렇게 말하며 그릇들을 챙긴 더크는 내용물을 확인했다. 제인의 눈물과 피가 고스란히 담겨있어야 할 그릇에는 다이아몬드를 닮은, 그보다 더 아름다운 보석들이 가득 빛을 내고 있었다.
더크는 만족스러움에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후, 제인의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잡아 쥐어 의식이 있음을 확인했다. 겨우 들려오는 가느다란 숨소리가 위태롭게 이어졌다. 제인은 더이상 움직임이 없었다.
비예단은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제인을 바라보다가, 더크가 빨리 나오라 독촉하는 목소리에 황급히 자리를 떴고, 다시금 이 낡은 방에 적막이 찾아왔다.
그들이 떠난 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숨을 헐떡이며 누워있는 제인은 그들이 아직 자신을 죽이지 않았음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안도감과 함께 찾아온 깊은 절망감이 제인을 가라앉혔다.
작은 달빛 한 조각이 방의 한구석을 비추었다. 그녀는 지금, 고통에 몸부림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살아있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눈물 자국에 먼지가 엉겨 붙어 얼룩덜룩해진 얼굴과 피가 눌어붙어 한 덩어리가 된 머리카락, 낡고 오래되어 원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는 헤진 원피스. 마치 무덤에서 기어 나온 듯한 몰골이었다.
제인이 주먹을 쥐었다 펼치며 손을 움직였다. 그새 자라난 손가락이 언제 잘렸냐는 듯 붙어있었다. 그녀는 그저 누워서 ‘그래도 이 정도면 다른 동족들보다는 나은 처지겠지.’라는 한심한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기 위로의 끝은 결국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던 이들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 중 몇 명은 돌아왔지만, 인간들에게 당한 고문으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장애를 가지거나 정신을 완전히 놓아 버린 이들도 있었다. 절대 몸 성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뜻이었으며, 어떤 이들은 박제되어 종족에서 암시장에 판매되는 동족의 시체를 구매해 고향에 매장해 주기도 했다.
제인은 그들처럼 죽어서도 인간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상상을 하자 몸서리가 쳐졌다. 죽게 된다면 몸이 가루가 되어 죽길 바랐다가도, 그렇게라도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 아이러니한 고민을 했다.
그때, 창문에서 톡. 톡. 하고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인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유일한 낙이 창가로 들어오는 햇빛이나 달빛을 구경하는 것이었기에 그 신호를 알아보았다
“제인!”
창가에서 흰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윽고 창가 앞에 자란 큰 나무의 가지로 낮에 보았던 소년, 비예단이 올라왔다. 나뭇잎이며 흙에 엉망이 된 머리칼을 대충 털어낸 그는 손을 옷에 몇 번 닦더니, 품속에서 주먹만 한 빵을 꺼냈다.
비예단은 이 마을의 영주인 가올테 백작의 ‘부름’을 받고 이곳에 처음 와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된 후부터 여유가 나는 대로 들러 그녀에게 가끔 먹을 것을 챙겨 주곤 했다. 그것이 신의 가르침을 받은 사제의 동정심일지, 인간으로서 가지는 죄책감에 대한 최후의 위선일지는 자신도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비예단은 그저 그녀가 신경 쓰일 뿐이었다.
제인은 그 빵을 보자 자주 있었던 일인지 반사적으로 마른 입에 군침이 맴돌았고, 비예단은 지체 없이 창문의 깨진 틈으로 빵을 조각내어 던지기 시작했다. 마치 새에게 모이를 주는 모양새였다.
빵 조각이 떨어지자 제인은 홀린 듯 기어 다니며 부스러기를 주워 먹었다. 먹어도, 먹어도 작은 조각들로는 배가 차지 않아 마룻바닥을 핥으며 아쉬움을, 그리고 허기를 달랬다.
숲을 닮은 녹색 눈이 제인을 바라보았다. 굽이치는 검은 머리칼에 뒤덮인 작은 몸짓이 마치 까마귀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다음엔 더 많이 가져올게요.” 하곤 작별 인사를 전했다. 그녀가 듣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습관처럼 늘 그러곤 했다.
대답 없는 인사를 뒤로한 비예단은 능숙하게 나무에서 뛰어 내렸다.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지만, 제인은 소년이 떠난 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바닥을 살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바닥을 훑어보다가 문득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모멸감을 비롯한 복잡한 감정에 낮에도 한참 흘린 눈물이 또다시 차올랐다.
* * *
비예단은 나무에서 내려와 마을로 향하는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익숙한 길이라 산길에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사제복이 가끔 풀에 닿아 스산한 소리를 냈다.
소년은 뒤돌아 이제는 아무도 발길 하지 않는 허름해진 저택을 잠시 바라보았다. 원래는 가올테 백작이 살던 저택이었지만, 백작은 제인을 이용해 큰돈을 벌어 산 아래 대궐 같은 저택을 새로 짓고 이사한 지 오래였다. 뇌물이라도 들인 것처럼 갑작스러운 재산 증가에도 수도에선 별다른 개입을 하지 않았다.
비예단은 내려가는 길 내내 제인의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근래에 들어서 시시때때로 그녀를 생각하곤 했지만, 본인은 깨닫지 못했다. 착잡한 생각이 이어지다가 결국, 날이 추웠던 한겨울 날, 가올테 백작의 첫 부름…. 제인과의 첫 만남에까지 이르렀다. 그녀를 처음 마주했을 때, 눈물 젖은 그 새카만 눈에 담긴 증오와 원망을 읽었을 때, 자신이 믿어왔던 인간의 선함이 부정당했을 때가 악몽처럼 되살아났다.
그러나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비예단은 제인을 도울 수 없었다. 소년이 속한 로테의 신전은 인간만을 위한 종교였으며, 본디 중립을 지키는 위치 때문임이 첫 번째 변명이었고, 이종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의 법이 두 번째 변명이었으며, 자신의 친형 또한 가올테 백작에게 인질로 잡혀 있기에 함부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이 세 번째 변명이었다.
고작 이렇게 먹을거리를 종종 챙겨주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녀를 돕기 위해선 가올테 백작보다 권력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고, 이 마을에 백작을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문득 더크의 말에 몇 마디 거절의 의사를 밝히면서도 결국 악행에 참여하게 되는 자신에게 혐오스러운 감정이 밀려와 구토감이 들었다.
“로테여, 부디 가엾게 여기소서….”
비예단은 헛구역질을 몇 번 하다가 언덕 아래에서 보이는 신전의 거대한 조각상에 눈을 맞추고 중얼거리며 두 손을 모았다.
‘부디 힘없는 그대의 종을 도와주세요. 로테께서 곤경에 처한 자를 도우라 하셨지 않습니까.’
마음속 무거운 짐을 자신의 신께 털어놓은 소년은 자신의 거처, 로테의 신전으로 향했다.
“…무튼, 그래서 백작님이 수도로 가신다는 거야? 우리 마을은 어쩌고?”
외출한 걸 들키지 않기 위해 몰래 들어가려던 비예단이 보초를 서는 신입 사제들의 소곤거리는 말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그럼 제인은 어떻게 되는 거지?’ 초조한 마음에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그들의 말을 엿듣기 위해 집중했다. 불안함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최근에 돈이 어디서 났는지 오늘도 귀해 보이는 보석을 싸 들고 신전에 들렸었다니까? 대사제님 시중들면서 둘이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백작님이 수도로 이사할 수 있도록 대사제님께 추천서를 써달라고 하더라고.”
“엿들은 건데, 나한테 말해주면 어떡해?”
“뭐 어때! 백작님이 떠나면 엑젤리스 공작님께서 오시겠지? 그럼 우리 마을도 부자가 되는 건 순식간이야.”
“엑젤리스 공작님? 녹스 로드게릭스 말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그 사람 가문도 버리고, 수도에서 내려온 게 아니라 추방됐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런 사람을 뭘 믿고?”
“그래도 엑젤리스에 자리 잡았잖아. 이제 공작은 아닐지 몰라도, 수도 사람이었는데 시골 출신인 백작보단 낫겠지.”
“너 그렇게 함부로 말하다간 감옥 간다.”
“감옥이 아니라, 지옥이라도 좋아. 공작님 엄청나게 잘생겼다던데…. 얼굴 한 번만 보고 싶다….”
“대사제님이 들으시면 너 진짜 신전에서 쫓겨나겠어, 입 조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