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화.
나무판자로 막혀 있는 창문의 틈새 사이로 비스듬히 먼지 낀 햇빛이 들어왔다. 낡고 조잡한 방엔 부식된 가구들이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미 색이 바래고 해져 기괴한 액자와 다리가 하나 부러진 채 벽에 기댄 의자, 검은 자국들이 여러 곳에 흔적을 남기며 조금씩 부패하고 있는 바닥까지. 어찌 보면 완벽한 조화였다.
그 방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여러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나는지 모를 삐그덕 소리, 뿌옇게 앉은 먼지 위로 벽 뒤편에서 쥐가 나다니는 소리, 그리고 금방이라도 끊길 것 같은 위태로운 숨소리.
음산한 삼중주가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버려진 이 저택에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을 만드는 데에 크게 한몫을 했다.
그 문제의 저택에 제인은 아무런 위화감 없이 어우러져 있었다. 길고 검은 머리칼이 흩어질 때마다 바닥에 들러붙은 묵은 때를 쓸었다. 제인은 뒤로 묶인 팔이 불편한지 누워 있는 몸을 벌레처럼 꿈틀대며 이리저리 비틀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손과 목을 감싼 사슬들이 거친 소리를 내며 따라붙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금세 지쳤는지 포기한 듯 움직임을 멈췄다. 영양 상태가 심각해 차마 눈을 둘 수 없을 정도로 말라붙은 손목이 마치 해골처럼 기이했다. 두 눈은 이미 죽어 전혀 빛나지 않았고, 그저 어둠에 잠식된 듯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이 암울한 공간 속에 갇히게 되면 누구라도 그러하겠다만, 제인에겐 숨이 붙어 있는 생명이라면 당연히 보일 만한 생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오래 씻지 않은 몸이 가려웠지만 긁을 수 없었고, 이 답답한 공기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떠날 수 없었다.
‘나가고 싶어.’
이루어질 수 없는 갈망에 마른 목이 잠겼다. 메마른 입안에 간신히 침을 삼키자 목을 옥죄어오는 구속구의 날카로운 가시가 목젖을 찔렀다. 아찔한 감각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으나, 고통은 사그라지지 않고 제인을 괴롭게 했다.
이미 오래되어 고름 잡힌 상처 사이로 피가 맺혔다. 바닥 군데군데 검붉은 자국이 짙게 묻어나 있다. 제인의 흔적인지, 아니면 그녀 이전의 다른 누군가가 남긴 자국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곳에서 끔찍한 행위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제인의 일과는 몹시 단순했다. 늘 태엽 풀린 인형처럼 누워 있다가 목이 마르면 오래된 저택의 결로 현상에 감사하며 축축이 젖은 목재 바닥을 핥고, 배가 고프면 바닥을 기어 다니는 하얀 구더기를 구역질 해 가며 주워 먹었다. 그러고 나면, 자신의 신세가 끔찍해 죽음을 떠올리다가도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 죽지도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곤 했다.
그녀가 어린 시절, 노예 사냥꾼에게 잡힌 이후로는 늘 이런 삶이었다. 이종(異種)들이 겪는 가장 비참한 인생의 말로가 자신에게도 시작됐을 땐 끊임없이 저항했으나, 언제부턴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고요한 저택에 소란스러운 인기척이 들렸다. 음식을 담기엔 조금 큰 그릇들을 들고 있는 거친 말씨의 사내와 겁먹은 목소리의 소년이 앞에 도착해있었다.
“제발… 제발 이러지 마세요, 더크 님….”
훌쩍이는 울음과 함께 애원과도 같은 부탁을 뱉는 소년은 곱슬거리는 금발에 청량한 녹색 눈을 가진 앳된 외모였다. 흰 사제복을 주름 하나 없이 차려입은 그 소년은 쳐진 눈매와 우느라 생긴 홍조 덕분에 안쓰럽게 보이기 충분했다.
그 아이는 우악스레 끌려가면서도 한 손에는 신, 로테의 가르침이 쓰여 있는 낡은 책을 소중히 안고 있었다. 책의 모서리에는 작고 단정한 글씨체로 ‘비예단’이라 적혀있었다. 흔치 않은 이름이었다.
소년, 비예단의 애원은 그 더크라는 사내에게 와닿지 않았던 것인지, 거친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무력으로 쥐고 있던 목덜미를 닫힌 방문 앞에 도착해서야 놓아주었다. 남루한 옷차림에 비해 금가락지가 가득한 손은 굳은살이 박혀 있었고, 손톱엔 때가 가득했다.
더크는 녹슬어 버린 잠금쇠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고, 비예단은 여전히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이윽고 문이 낡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방안을 가득 채운 역겨운 악취가 진동하자 더크는 코를 움켜쥐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기랄, 이놈의 냄새는 적응이 안 돼. 야, 빨리 들어와!”
뒤에 숨어있던 소년이 도망도 가지 못한 채 더크의 손에 이끌려 힘없이 앞으로 쏟아져 나와 쓰러졌다.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진동에 놀라 뒤를 돌아본 제인의 눈에 더크와 비예단이 들어왔다.
그저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신세와 마치 짐승을 보듯 내려다보는 더크의 시선 사이에 제인은 먼저 풀죽은 듯 눈을 내리깔았다.
제인의 심장이 전보다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서서히 익숙한 공포감이 밀려왔고, 몸이 떨려왔다. 이들의 잔인한 심성을 그녀는 여태까지의 행태로 인해 잘 알고 있었다.
하나는 자신을 찢고 자르며 즐거움을 얻었고, 하나는 그 고통이 계속될 수 있도록 자신을 치유했다.
그렇게 놀라울 것도 없었다. 제인이 만난 모든 인간은 늘 자신의 피와 눈물을 갈취하고, 그 피로 번 돈을 탕진하며 살을 찌우고, 만족을 모른 채 다시 제게로 찾아오곤 했다.
비예단은 고꾸라진 몸을 일으켜 더크에게 기어가 다리를 붙들었다. 기어간 자국이 바닥에 선명히 남아 먼지가 일어났다. 제인은 간신히 고개를 살짝 들어 그들의 행동을 바라보았지만, 처음 잡혀 왔을 때 이들이 남긴 봉인의 저주로 인해 듣지도 못할뿐더러,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더크 님, 제발…. 이러지 마세요. 이건 말도 안 돼요!”
“그만? 너 이년이 가져다 주는 돈이 얼마인지나 알고 그만하라는 거야? 너도 매번 지긋지긋하게….”
더크는 자신을 붙잡은 소년의 몸을 발로 찼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악!’하는 짧은 비명이 들렸고, 한눈에 보아도 가녀린 소년의 몸뚱이는 구석에 처박혔다. 먼지 묻은 흰 사제복은 밑단이 그 새 더러워졌다.
“이거 안 죽게 조심해라.”
더크는 발로 제인의 머리를 몇 번 차더니, 비예단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그러곤 아주 익숙한 행동으로 그녀의 얼굴 아래 신성력이 가득 담긴, 고급스러운 그릇 하나를 내려놓았다. 제인의 피와 눈물은 신성력과 만나면 아름다운 보석이 되었기에, 제인과 이 그릇은 떼려야 뗄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는 비예단은 분노와 동정심이 한데 뭉쳐 얼굴이 붉게 물들었지만, 폭력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와 더는 쉽게 나서지 못했다.
더크는 긴장으로 인해 뻣뻣해진 제인의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내리찍었다. 쿵, 하고 큰 소리가 들려왔지만, 더크는 전혀 개의치 않고 뒤로 묶인 제인의 손목을 붙들었다.
낡아서 몇 군데는 기워져 있는 멜빵 바지의 주머니에서 더크가 작은 절단기를 꺼냈다. 그것은 가위처럼 생겼으나 날이 더 짧고 날카롭게 제작된 고문용 도구였다. 더크는 그 절단기를 황홀한 눈빛으로 쓱 훑더니, 제인의 손가락에 가져다 댔다.
우두둑. 듣기조차 고통스러운 잔인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런 준비 없이 찾아온, 익숙해지지 않는 끔찍한 아픔에 제인은 몸을 바르작거리며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남은 손가락들이 곧 다가올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지 꿈틀거렸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이 역겹고 반인륜적인 모습에 구토감이 밀려왔겠으나, 더크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피를 공들여 장식된 그릇에 받아 냈다. 마치 신성한 의식이라도 된다는 듯, 그에게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신사적인 몸짓으로.
제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비명을 지르는 입 모양새였지만 애석하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참을 수 있어. 참을 수 있을 거야.’
그들에게 착취는 당할지언정, 조롱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속으로 계속해서 다짐했지만, 도저히 견디기 힘든 아픔에 그녀는 몸을 뒤틀며 저항했다. 그러나 그보다 무의미한 것은 없었다.
제인은 화끈거리는 고통이 늘어갈 때마다 점점 정신이 희미해졌고, 움직임 또한 잦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