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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101)화 (101/101)

101화 

“커플 반지네요?”

“제가 만든 거예요. 자식이 생기면 결혼할 때 주려고요.”

“네? 그런데 왜 이게 여기에…….”

“전 미혼이었거든요. 지금의 황족은 신의 혈통이고요.”

일리아는 깜짝 놀란 나머지 그만 반지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 그런 걸 제게 말해 주셔도……. 아니, 이런 귀한 보물을 제가 받아도 되는 겁니까?”

“그럼요. 오히려 에스테반 공작이 저와 한 가족인 셈이니까 일리아와 카일루스가 나눠 가지는 게 맞죠.”

“전하…….”

“아마 꼭 맞을 거예요. 행복하게 잘 살아 줘요, 일리아. 보답은 그걸로 받을게요.”

이사벨라가 일리아를 꼭 끌어안았다. 소녀의 체구는 작았지만 전해지는 온기는 무엇보다도 따뜻했다.

* * *

드디어 그날이 왔다. 아침 일찍 일어나 목욕을 마친 일리아는 비장한 얼굴로 화장대에 앉았다.

“에나, 오늘은 정말 중요한 날이야.”

“청혼하시려고요?”

“응. 그러니까 최대한 예쁘게 해 줘!”

“맡겨 주세요.”

두 시간을 들여 화장을 마친 일리아는 루네르가 보내온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연한 하늘색의 드레스였다. 스커트에 하얀 레이스를 여러 겹 덧대어 움직일 때마다 물보라가 치는 것처럼 나풀거렸다.

귀걸이와 목걸이는 진주로 골랐다. 클리드가 준 목걸이는 미안하지만 심미적인 이유로 잠시 보석함에 넣어 두었다.

마지막으로, 머리카락은 가지런히 빗어 내려 서클릿을 착용했다. 자잘한 진주가 달린 서클릿이었다. 진주의 오묘한 빛깔이 일리아의 은빛 머리카락과 아주 잘 어울렸다.

“어때, 에나? 어때, 세실라?”

일리아의 물음에 에나는 만족스러워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고, 세실라는 볼을 발그레 물들이며 박수를 쳤다. 그에 자신감을 얻은 일리아는 당당하게 방을 나섰다. 슬슬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 아가씨, 잠시만요.”

저택 밖으로 나가려는데 로레인이 일리아를 붙잡았다.

“왜 그래, 로레인?”

“응접실로 가 보세요. 공작 각하께서는 거기 계세요.”

“벌써 오셨어?”

“사실 한 시간 전부터 기다리고 계셨는걸요.”

일리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뭐? 그걸 왜 지금 말해!”

“아가씨께 알리지 말아 달라고 하셔서요.”

“으으, 정말!”

일리아는 로레인을 뒤로한 채 서둘러 응접실로 향했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카일루스의 모습이 보였다. ‘왜 왔다고 말 안 했어요!’ 하고 카일루스를 타박하려던 일리아는 눈부신 그의 모습에 그만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삐딱하게 꼰 다리도, 셔츠 위에 단단히 맨 크라바트도,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도, 그 덕분에 환하게 드러난 얼굴도. 무엇 하나 매혹적이지 않은 게 없었다. 카일루스가 잘생겼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파괴력이 더욱 강했다.

“일리아?”

일리아가 문 앞에 가만히 멈춰 서 있기만 하자 결국 카일루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왜 그래?”

“저랑 결…….”

일리아는 혀를 으득 깨물었다. 순간 카일루스의 얼굴에 홀려 거지 같은 청혼을 할 뻔했다.

‘안 되지. 절대 안 돼.’

마음을 다잡은 일리아는 얼얼해진 혀를 치유하곤 카일루스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가요, 카일루스!”

“오늘따라 힘이 넘치는 것 같은데.”

“예쁜 걸 봐서 그래요. 얼른 가요.”

일리아는 카일루스와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한 마차는 전쟁의 여파로 울퉁불퉁해진 대로를 부지런히 달렸고, 사십여 분 만에 황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럼 가실까요, 레이디.”

“하하, 전에도 이러셨었죠?”

“기억해?”

“그럼요. 다 기억하죠. 이번에도 잘 부탁해요, 각하.”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전에 승전 기념 파티에 참석했을 때처럼 근처에 있던 귀족들이 그들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그때처럼 호기심 어린 시선은 아니었다. 그저 ‘정말 아름다운 커플이네요.’ 하고 부러워할 뿐이었다.

이전과 같은 장소에서 이전과 다른 시선을 받는다는 것은 나름대로 새로운 경험이었다. 일리아는 어깨를 쫙 펴며 더욱 당당하게 걸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거대한 문이 열리자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손을 잡고 파티장 안으로 들어섰다.

느긋하게 파티장을 둘러보며 걷는데 문득 넓은 무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일리아는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이번에는 또 왜?”

“혹시 오늘도 춤춰야 해요?”

카일루스가 잔뜩 경직되어 있는 일리아의 볼을 가볍게 두드렸다.

“오늘은 안 춰도 돼. 그냥 편하게 즐겨.”

“네! 그럼 됐어요!”

파티장 안에는 수많은 귀족이 있었다. 오스카와 크리스틴, 그리고 에렉 로베르트까지. 에렉은 그동안 고생깨나 한 모양인지 얼굴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뭘 그렇게 봐?”

그때, 카일루스가 일리아의 앞을 막아서며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넓게 트여 있던 시야가 좁아지고, 눈부신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일리아는 생긋 웃으며 카일루스의 볼을 어루만졌다.

“아니에요. 혹시 질투하는 거예요?”

“조금.”

“걱정도 많으시네요.”

“어쩔 수 없잖아. 그대는 항상 무방비하니까.”

“오늘은 다를걸요?”

일리아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카일루스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꺼내려고 할 때였다. 테오도르와 이사벨라가 파티장 안으로 들어왔다. 하얀 예복을 차려입은 테오도르는 장황한 축사 대신 ‘마음껏 즐기시오.’ 하는 짧은 말만을 남긴 채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와 동시에 화려한 선율이 넓은 파티장을 울리기 시작했고, 고요하던 분위기가 금세 떠들썩해졌다.

일리아는 활기찬 파티장을 둘러보며 왼손을 만지작거렸다. 얇은 장갑 너머로 반지의 감촉이 느껴졌다.

사실 반지를 어떻게 가지고 와야 카일루스에게 들키지 않을까 고민하던 일리아는 결국 그에게 줄 반지를 왼손장갑 안에 꼭 쥐고 왔다. 반지를 건네줄 때 조금 없어 보이긴 하겠지만 카일루스의 눈치를 보니 확실히 들키지는 않은 듯했다.

‘어떡하지. 이제 슬슬 청혼해야 하는데.’

막상 카일루스에게 청혼하려니 자꾸만 심장이 쿵쿵거리고 식은땀이 배어났다. 일리아는 주먹을 꾹 그러쥐었다. 이럴 때는 강한 도수의 용기가 필요했다.

“카일루스.”

“왜?”

“저 술 한 잔만 마시면 안 될까요?”

카일루스는 일리아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여린 어깨가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괜찮은 척하더니 사실은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발코니에 가 있어. 가져다줄 테니까.”

“고마워요.”

일리아는 심호흡을 하며 발코니로 향했다. 포근한 봄바람을 맞으니 긴장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할 수 있어, 일리아. 괜찮아. 넌 할 수 있어.”

몇 번이나 ‘할 수 있어.’를 되뇌던 일리아는 장갑을 슬그머니 벗어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잠시 후, 와인 잔을 든 카일루스가 발코니 안으로 들어왔다.

“마셔. 대신 한 잔만이야.”

“알겠어요.”

일리아는 와인을 쭉 들이켰다. 향긋한 과일 향이 입 안을 가득 맴돌았다.

그렇게 도수가 높은 술이 아니었음에도 금세 얼굴이 달아올랐다. 전쟁 기간 동안 금주를 한 탓인 듯했다.

일리아는 술기운을 느끼며 후우, 하고 깊은 숨을 토해 냈다. 됐다. 이제 용기가 생겼다.

와인 잔을 대충 난간에 내려놓은 일리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카일루스의 앞에 섰다.

“카일루스, 제가 모든 게 다 끝나면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잖아요.”

“이제야 해 줄 마음이 든 건가?”

“네. 지금 할게요.”

일리아는 다급한 마음에 왼손에 쥐고 있던 반지를 대뜸 카일루스의 약지에 끼워 주며 외쳤다.

“저랑 결혼해 주세요!”

일리아의 자색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났다. 카일루스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반지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을 붙잡고 있는 가느다란 손가락에도 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

카일루스가 가만히 반지만 내려다보고 있자 다급해진 일리아가 재차 입을 열었다.

“행복하게 해 줄게요. 저랑 결혼해 주세요!”

“결혼…….”

“술도 덜 먹고, 말도 잘 듣고, 또……!”

일리아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카일루스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기 때문이었다.

빈틈없이 맞물린 입술 사이로 이따금씩 야릇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옷깃을 꼭 붙잡으며 입맞춤에 응했다.

입 속을 맴돌던 과일 향이 거의 사라졌을 무렵, 마침내 두 사람 사이에 작은 틈이 생겼다.

카일루스는 일리아를 끌어안은 채로 생긋 웃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술을 덜 먹겠다니. 전에는 확실하게 끊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흘러나오는 말은 얄밉기 그지없었다. 일리아는 뾰로통한 얼굴로 슬쩍 몸을 물렸다.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대에 관한 거라면 뭐든지 기억하고 있어. 내 옷에 구토를 했던 때도…….”

“그, 그만! 그건 좀 잊어 달라고요!”

카일루스가 하하, 하고 소리 내어 웃으며 일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반지에 짧게 입을 맞췄다.

“행복하게 해 줄게, 일리아. 나와 결혼해 줘.”

“…선물은 제가 준비했는데요.”

“나로는 안 되는 거야?”

“안 될 리가 없잖아요. 카일루스는 제가 제일 가지고 싶은 건데요!”

일리아가 카일루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앞으로는 이렇게 꼭 붙어 있을 거예요.”

“나도 놓지 않을게, 일리아.”

“아니. 당장 놓아야 할걸?”

두 사람이 한창 서로를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발코니 안으로 들어오더니 대뜸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일리아와 꼭 닮은 미남, 클리드였다.

일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클리드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일리아, 드디어 약속을 지킬 때가 됐어.”

“약속? 무슨 약속?”

“다음에 파티가 열리면 함께 춤춰 주겠다고 약속했잖아.”

“아!”

카일루스와의 춤 내기에서 진 일리아는 당장 에스테반 저택을 뒤엎을 것처럼 날뛰는 클리드를 진정시키기 위해 다음에 파티가 열리면 함께 춤을 춰 주겠다고 클리드와 약속했었다. 그런데 설마 지금, 이런 때에 그 약속을 들먹일 줄이야.

일리아가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카일루스를 올려다보자 클리드가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를 파티장 안으로 이끌었다.

“어차피 앞으로는 저놈이랑 쭉 살 거 아니야. 그러니까 오늘만큼은 양보해.”

“자, 잠깐만! 오라버니!”

일리아는 울먹거리며 카일루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카일루스는 클리드를 말리기는커녕 유쾌하게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카일루스! 오라버니! 다들 미워!”

일리아의 새된 외침이 발코니를 가득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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