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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100)화 (100/101)

100화 

“저택에 찾아오셨었다고요?”

“그래. 그런데 클리드가 가로막더군. 그대의 상심이 너무 커서 지금은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클리드가 그새 카일루스를 놀려 먹은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웃음을 참으며 카일루스의 손등을 토닥거렸다.

“사실 그런 적이 있긴 했는데…….”

카일루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지금은 괜찮아요. 즉위식 준비 때문에 많이 바빴잖아요.”

“…미안해.”

“미안한 줄 알면 됐어요. 하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마요. 다신 안 봐줄 거예요.”

“명심하지.”

카일루스가 일리아의 손을 들어 올리더니 그녀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일리아는 눈을 깜박거리며 카일루스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울적하던 눈동자가 지금은 불을 붙인 벽난로처럼 화르륵 타오르고 있었다. 그에 일리아는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카일루스, 할 말이 있어요.”

“그때 그거?”

“아, 아니요. 다른 할 말이에요. 그때 말했던 건 다음에 할게요. 그러니까…….”

일리아가 비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즉위 기념 파티에서 제 파트너가 되어 주세요.”

일리아의 말에 카일루스의 얼굴에 장난기가 돌았다. 그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일리아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야 저는 카일루스의 하나뿐인 귀염둥이니까요!”

문득 지난 승전 기념 파티 때가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일리아는 카일루스와 자신이 이런 사이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말실수 하나가 정말 멀리도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 주실 거죠, 파트너?”

“물론이지. 내가 어떻게 거절하겠어. 하나뿐인 귀염둥이의 부탁인데.”

“고마워요. 전에 하고 싶다던 말은 파티 날에 할게요.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요.”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달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야겠군.”

일리아와 카일루스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맞닿은 입술에서 향긋한 봄 내음이 났다.

* * *

즉위식이 끝나고 며칠이 지났다. 세실라가 무려 이 주 만에 저택에 돌아왔다. 엄청난 선물을 손에 들고서.

“세실라, 이걸 어디서…….”

“그냥 바닥에 떨어져 있던데요.”

“거짓말!”

세실라가 가지고 온 것은 바로 테오도르가 그렇게나 찾고 싶어 했던 그란디아의 눈물이었다.

일리아는 커다란 블루 다이아몬드를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아자카산맥을 샅샅이 뒤졌음에도 찾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이게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이걸로는 부족할까요?”

“부족이고 뭐고 이걸로는 청혼할 수 없어, 세실라. 이건 황실의 보물이거든.”

“그래요? 그럼 한 번 더 다녀올…….”

세실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일리아는 사색이 되어 그녀를 뜯어말렸다. 또 뭘 가져오려고 이러는 것인지 벌써부터 겁이 났다.

“괜찮아, 세실라! 일단은 내가 더 생각해 보고 도움이 필요하면 그때 말할게.”

“알겠어요.”

일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그란디아의 눈물을 내려다보았다.

“하아, 일단 이것부터 가져다드려야겠네.”

일리아는 당장 황성에 서신을 보냈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테오도르로부터 방문해도 좋다는 답신이 왔다. 일리아는 보석함에 그란디아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담곤 저택을 나섰다.

“솔로, 오늘은 아로스를 돌아서 가자. 얼마나 복구되었는지 둘러보고 싶어.”

“알겠습니다.”

일리아를 태운 마차는 그라니체 저택을 벗어나 어느덧 아로스의 거리에 접어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거리는 이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는 수백 년 전에 지어진 그림 같은 건물도, 사람이 가득하던 중앙 광장도 없었다. 그저 공사가 끝났거나 공사 중인 가게만이 휑한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일리아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가게들이 들쭉날쭉 늘어서 있는 모습도 나름대로 볼만했기 때문이다. 마치 아로스가 아니라 빌른에 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빌른도 축체를 열지 못하겠구나.’

일리아는 카일루스와 함께 즐겼던 빌른의 축제를 아직까지도 잊지 못했다. 낡은 간이 가판대와 거리에서 자유롭게 춤추던 사람들, 그리고 오색의 불꽃까지. 무엇 하나 아름답지 않았던 게 없었다.

‘또 보고 싶네.’

일리아는 추억을 되새기며 아로스를 지나 황성으로 향했다. 테오도르는 황제궁의 응접실에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오랜만이군, 그라니체 경. 일단 앉아.”

테오도르가 일리아에게 가볍게 눈짓을 했다.

“나한테 주고 싶다는 게 뭔지 궁금하군.”

“이것입니다, 폐하.”

일리아가 테오도르에게 보석함을 내밀었다.

“이건?”

“열어 보십시오.”

테오도르가 의구심 가득한 얼굴로 보석함을 열었다. 그러고는 눈을 부릅뜨며 안에 놓여 있던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이걸 어디서 찾은 거지?”

“세실라가 가져왔습니다. 전에 심부름을 보냈었는데 그 와중에 우연히 발견했다고 합니다.”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야…….”

한참 동안 목걸이를 내려다보던 테오도르는 옅게 웃으며 일리아에게 말했다.

“경에게는 항상 신세만 지는군.”

“아닙니다. 저는 한 게 없는걸요. 공치사는 세실라에게 해 주십시오.”

“경이 심부름을 보낸 덕분이잖아. 경에게도 보상을 내리고 싶은데.”

“전 정말 괜찮…….”

그때, 일리아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번뜩 떠올랐다. 이건 기회였다. 특별하면서도 좋은 것을 얻을 절호의 기회!

일리아는 즉시 태도를 바꿨다.

“폐하, 그럼 청이 하나 있습니다.”

“편하게 말해.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건 뭐든 들어주지.”

“각하께 어울릴 만한 선물을 하사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테오도르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일리아의 말을 두어 번 곱씹은 그는 이내 넌지시 반문했다.

“카일루스에게 어울릴 만한 선물을 하사해 달라고?”

“네. 각하께는 비밀로요.”

“이유는?”

“청혼을 하려고 하는데 아직 마땅한 선물을 찾지 못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폐하.”

테오도르는 귀를 의심했다. 설마 ‘청혼’이라는 말이 카일루스보다 일리아에게서 먼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테오도르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그대가 먼저 청혼하려고? 이렇게 급하게?”

“네. 더는 못 참겠어서요. 그러니까 부탁드립니다, 폐하.”

일리아의 자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테오도르는 그녀의 결연한 얼굴을 보며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황실의 보물을 개인에게 내어 주는 것은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은 이상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달리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 여기서 보물을 내어 주면 에스테반 가문의 대를 잇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이건 황제로서도 좋은 거래였다.

항상 흘러가듯 이야기하긴 했지만 테오도르는 진심으로 에스테반 가문의 존속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카일루스는 정략결혼마저 꺼릴 정도로 여자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리아가 그런 카일루스를 완전히 휘어잡아 버렸다. 테오도르는 에스테반 가문의 명맥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보물이 아니라 영지까지도 내어 줄 수 있었다.

“좋아. 그대의 청을 들어주지.”

“정말입니까?”

“그래. 이사벨라와 다녀와. 나는 남의 선물 고르는 재주는 없어서 말이야.”

“정말 감사합니다, 폐하!”

일리아는 테오도르의 서신을 들고 황녀궁으로 향했다. 응접실에 들어서자 이사벨라가 화색을 띠며 일리아에게 다가왔다.

“일리아, 어서 와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요. 아, 사샤 걱정은 말아요. 사샤도 여기서 잘 지내고 있으니까요.”

사샤가 신의 사자라는 게 밝혀진 이후로, 사샤는 이사벨라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신의 사자에 관해 잘 아는 사람이 그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일리아는 사샤가 평범한 고양이와는 다르니 전문가가 직접 키우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사샤를 이사벨라에게 맡겼다.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에요?”

“아, 여기… 폐하의 서신입니다.”

이사벨라는 테오도르의 서신을 펼쳐 들었다.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그녀의 눈동자가 점점 초롱초롱해졌다.

“청혼을 할 거라고요? 에스테반 공작한테요?”

“네. 그러니까 전하께서 각하께 드릴 선물 좀 골라 주세요.”

“좋아요! 가요!”

일리아와 이사벨라는 다시금 황제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테오도르에게서 열쇠를 받아 들고 보고로 향했다.

“와…….”

보고에 들어선 일리아는 입을 떡 벌렸다. 별궁의 지하 동굴만 한 보고에는 온갖 보물이 열 맞춰 정리되어 있었다. 작은 보석부터 거대한 조각상까지. 눈이 돌아갈 정도로 가치 있어 보이는 물건이 많았다.

“이 중에서 골라 봐요.”

“…벌써부터 힘든 것 같습니다만.”

“아직 시간은 많아요. 같이 힘내 봐요!”

“네, 전하!”

일리아와 이사벨라는 합심하여 보고를 샅샅이 뒤졌다. 카일루스에게 어울릴 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봤다. 장신구, 무기, 갑옷 등등. 하지만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그에 슬슬 흥미를 잃은 일리아는 괜히 검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시간만 보냈다. 그러자 한쪽에서 작은 상자를 집어 들던 이사벨라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잠시 차라도 마실까요?”

보고에서 나온 두 사람은 다시금 황녀궁으로 향했다. 응접실에 앉아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시종이 서둘러 따뜻한 물과 찻잎을 가지고 들어왔다.

“언제나 고마워요, 에반스.”

“아닙니다, 황녀 전하.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시종을 일별한 일리아는 차를 우리는 이사벨라를 바라보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전하, 혹시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전하께서는 시종들에게도 항상 존대를 하시던데, 혹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 겁니까?”

일리아의 물음에 이사벨라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연인끼리는 닮는다고 하더니 정말인가 보네요.”

“네?”

“전에 에스테반 공작도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거든요.”

이사벨라가 하얀 찻잔을 일리아의 앞에 놓아주며 말했다.

“사실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예전에는 신분이라는 게 없었거든요. 모두가 이렇게 말을 했죠.”

“그랬군요.”

“아직은 바꾸는 게 어렵더라고요. 클리드처럼 오래 살면 자연스럽게 바뀔지도 모르지만요. 그렇죠?”

이사벨라는 방긋 웃으며 보고에서 들고나온 작은 상자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일리아의 옆에 앉아 그녀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이건…….”

“열어 봐요.”

뚜껑을 여니 한 쌍의 반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반지의 디자인은 단순했지만 매끄러운 마감에서 만든 사람의 정성이 느껴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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