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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99)화 (99/101)

99화 

카일루스는 그 이후로도 편지를 쓰고 버리기를 반복했다. 어느덧 구겨진 편지지가 쓰레기통을 가득 채우다 못해 바닥까지 밀려났을 무렵이었다. 누군가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엘리엇이었다.

“저택의 보수 공사가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 돌아오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건 됐으니까 요새 일리아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나 알아봐.”

엘리엇은 바닥에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종이 뭉치를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카일루스에게 갈색 봉투를 내밀었다.

“그러실 줄 알고 이미 알아봤습니다.”

“…유능하군.”

“과찬이십니다.”

카일루스는 봉투 안에 들어 있던 보고서를 찬찬히 살폈다. 최근에 일리아가 그라니체 저택으로 돌아갔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게 없어 보였다.

“잘 지내고 있나 보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별궁에 오셨다더군요.”

“별궁에?”

“네. 근위대원의 증언입니다. 그라니체 님께서 별궁 앞까지 오셨다가 다시 돌아가셨다고.”

엘리엇은 무덤덤한 얼굴로 카일루스의 가슴에 쐐기를 박았다.

“표정이 굉장히 안 좋으셨다고 합니다.”

카일루스는 그만 들고 있던 보고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 * *

일리아는 본격적으로 청혼 준비에 나섰다. 카일루스의 기억에 평생 남을 만한 청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혼 준비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리아는 위기에 봉착했다. 전쟁의 여파로 운영하고 있는 가게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무엇을 사려고 해도 파는 곳이 없으니 청혼 준비는 자연스럽게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일리아는 책상에 엎어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슬슬 카일루스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연락도 못 할 정도로 바쁜 사람을 찾아가서 귀찮게 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연인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아…….”

일리아가 연거푸 한숨을 내쉬자 에나가 찻잔을 건네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청혼 때문에.”

“청혼하시려고요?”

“응. 그런데 마땅한 물건이 없네. 카일루스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주면서 청혼하고 싶은데.”

사실 일리아는 카일루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라니체 저택의 비밀 창고를 몰래 뒤져 보기도 했다. 그러나 신의 눈물과 같은 보물은커녕 카일루스에게 어울리는 브로치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낙심하는 일리아에게 클리드가 ‘내 비늘이라도 하나 떼어 줄까? 신의 힘이 깃들어 있어서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을 보호할 수가 있거든.’ 하고 말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클리드가 드래곤으로 현신하기 위해서는 아이기스를 해제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돌연 아이기스가 사라지고 드래곤이 떡하니 황성에 나타나면 테오도르에게는 그 상황을 대체 뭐라고 설명하란 말인가. 청혼 한번 하자고 클리드와 황성을 위험에 노출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아, 뭐 좋은 거 없을까…….”

그때, 세실라가 창문으로 훌쩍 뛰어 들어오며 말했다.

“좋은 거요?”

“깜짝이야!”

일리아는 소리를 빽 내지르며 펄쩍 뛰었다. 다행히 의자가 막아 준 덕분에 볼썽사납게 굴러떨어지지는 않았다.

“세실라! 내가 창문으로 다니지 말라고 했지!”

“놀래 드리고 싶어서요.”

“으으, 정말. 어제 깨어났으면서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조심 좀 하고 다녀.”

“알겠어요. 그것보다 좋은 거라니요?”

세실라의 물음에 일리아가 뾰로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카일루스한테 청혼하려는데 마땅한 선물이 생각이 안 나서.”

카일루스는 일리아에게 신의 눈물로 만든 반지를 선물했다. 그러니까 일리아도 그에 버금가는 보물을 선물로 주고 싶었다. 가령 그란디아의 눈물만큼 가치 있는 것으로. 하지만 그런 보물은 황성의 보고에나 있을 텐데, 국가의 보물을 훔쳐 올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일리아가 연거푸 한숨만 내쉬자 세실라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제가 구해 올게요.”

“뭘?”

“청혼에 좋은 마땅한 선물이요.”

* * *

세실라가 호기롭게 저택을 떠나고 며칠이 지났다. 황성에서 바이에드의 국장이 치러졌다.

원래 국장은 황성에서 추모 의식을 하고 일주일 동안 장례 행렬이 수도 전체를 돌며 국민들의 애도를 받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절차를 완전히 간소화하여 추모 의식만으로 국장을 끝내 버렸다.

즉위식 또한 속전속결이었다. 바로 오늘, 테오도르는 마침내 아제로스 제국의 새로운 황제가 될 것이다.

‘국장과 즉위식이 고작 열흘 차이라니.’

일리아는 예복으로 갈아입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즉위식의 절차 또한 국장과 비슷하게 간소화되었다. 테오도르가 선황의 보관과 반지를 물려받고, 이사벨라가 축사를 하고. 그게 끝이었다. 남은 직계 황족이 둘뿐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머리를 깔끔하게 올려 묶은 일리아는 의장용 검을 차며 거울 앞에 섰다.

“이제는 제복이 제일 편한 것 같아.”

“파티 때도 입으시면 어때요?”

“아니. 그러기는 싫으니까 오늘 당장 루네르한테 연락해 놔. 제일 자신 있는 디자인으로 부탁한다고.”

“알겠습니다.”

이례적으로 테오도르는 즉위 기념 파티를 즉위식으로부터 한 달 후로 미루었다. 전쟁이 끝난 지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로스를 비롯한 모든 도시들은 아직 안정을 되찾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 파티를 벌여 봤자 국민들은 달가워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덕분에 제대로 준비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은 일리아가 청혼 선물을 고민하던 때보다 많은 가게가 문을 열었다. 이 정도면 파티 준비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을 듯했다.

게다가 그동안 꽤나 오랫동안 사교 모임이 없지 않았던가. 지금쯤 다들 파티에 굶주려 있을 것이었다.

일리아 역시 그랬다. 그녀는 원래 사교 모임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파티장의 화려한 분위기를 빌린다면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처럼 로맨틱한 청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일리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그때 청혼하는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카일루스에게 파트너 신청을 해야만 했다. 아무리 연인 관계라고는 하나 사교계의 예법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파트너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청과 승낙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예외는 없었다.

이제 와서 편지를 쓰기는 늦었으니 일리아는 카일루스와 즉위식 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보기로 했다.

‘얼마 만에 만나는 거지…….’

일리아는 아로스의 복구를 돕고 청혼할 준비를 하느라 꽤 오랫동안 카일루스와 만나지 못했다. 즉위식이 끝나면 그나마 여유가 생길 테니 일리아는 그때부터라도 매일 카일루스와 붙어 있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빨리 보고 싶다…….”

“그것보다 빨리 나가셔야 해요.”

“아! 그럼 다녀올게, 에나!”

즉위식이 열리는 황제궁 안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시종들과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귀족들, 그리고 예식장 앞에 도열해 있는 근위대까지. 이렇게 진짜 황성다운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던 터라 일리아는 괜히 들떴다.

“일리아.”

“크리스틴. 오랜만이에요.”

예식장 안으로 들어서자 크리스틴이 알은체를 해 왔다. 분홍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크리스틴은 잘 만든 인형 같던 예전과 달리 건강하고 활기차 보였다.

전해 듣기로는 크리스틴은 이번 전쟁에 참전해서 무훈을 세우기까지 했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작 검을 휘두르는 게 다였던 크리스틴이 무훈이라니. 이건 분명한 노력의 결과였다. 일리아는 새삼 크리스틴이 존경스러워졌다.

“그래도 시간 맞춰서 왔네요?”

“오늘 새벽에 도착했어요. 사실 조금 더 일찍 출발했는데 산적을 만나는 바람에…….”

“산적이요?”

“전쟁 때문이겠죠. 충분히 이해해요. 일단 아버지께서 보고서를 올리셨으니 금방 정리될 거예요.”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네요.”

일리아는 크리스틴의 말에 가볍게 대꾸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즉위식 시간이 가까워 오면서 복도에서 대화를 나누던 귀족들도 하나둘씩 예식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수많은 인파 사이로 소피아가 보였다. 그녀는 현재 랜더 자작의 사망으로 원치 않게 작위를 물려받은 상태였다. 그 때문에 랜더 자작의 옆자리를 탐내는 어중이떠중이들한테 끊임없이 청혼을 받고 있다고.

일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소피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랜더 영애도 힘들겠어요.”

“일단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와주려고요. 경영은 처음일 테니까요.”

“멋있어요, 크리스틴. 저는 경영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뒤에서 응원이나 할게요.”

크리스틴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벌써 즉위식이 열릴 시간이 되었다. 일리아와 크리스틴은 자리를 잡고 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장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오도르 레테 그란디아 황태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목소리가 잦아들 즈음, 테오도르가 천천히 예식장 안으로 들어왔다. 금빛 망토를 두른 테오도르는 마치 황제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내딛는 발걸음 하나에서도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사적으로 만났던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일리아는 속으로 감탄하며 슬쩍 시선을 돌렸다. 테오도르의 뒤로 이사벨라와 카일루스의 모습이 보였다.

원래 방계 황족인 카일루스는 단상에 오를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그러나 보관과 황제의 반지를 인계해야 할 바이에드가 먼저 죽는 바람에 절차를 진행하는 데에 어려움이 생겼다. 법적으로 황제가 먼저 사망하면 다른 황자들이 인계 절차를 대신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바이에드의 형제들은 모두 그의 계락으로 죽거나 불구를 얻어 이런 중요한 행사를 진행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방계 황족인 카일루스가 그 역할을 대신 수행하기로 한 것이다.

‘얼굴이 많이 안 좋네.’

즉위식 준비로 고생깨나 한 모양인지 카일루스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에 일리아도 덩달아 울적해졌다. 즉위식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 * *

“이것으로 나, 테오도르 레테 그란디아가 아제로스 제국의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하오!”

테오도르의 선포를 마지막으로 즉위식이 끝이 났다. 크리스틴과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온 일리아는 한적한 정원 앞에 서서 카일루스를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고, 카일루스가 크라바트를 만지작거리며 황제궁에서 나왔다. 그는 어쩐지 지쳐 보였다. 날을 다시 잡아야 하나 하고 고민하던 일리아는 이내 마음을 다잡고는 카일루스에게 다가가 그를 불러 세웠다.

“카일루스.”

일리아의 목소리에 카일루스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빠르게 다가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카일루스? 괜찮아요?”

“많이 화났어?”

“네?”

카일루스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일리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축 처진 눈꼬리가 왠지 귀여웠다.

“편지를 보내려다가 뭐라고 써야 할지 몰라서 저택에 찾아갔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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