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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98)화 (98/101)

98화 

“흐아아앙! 나 이제 어떡하면 좋아!”

“진정해, 레미. 세상에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더 좋은 남자가 나타날 거야.”

그때, 한쪽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사단 단원인 레미와 라리사였다. 호기심이 생긴 일리아는 그들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아, 부단장님!”

“끄흑, 부단장님…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 그러니까 울지 말고 말해 봐. 무슨 일인데 그래?”

일리아가 레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자 그녀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로렌스가 헤어지자고……. 흐으앙!”

“로렌스?”

라리사가 일리아에게 슬쩍 귀띔했다.

“레미의 연인이에요.”

“아…….”

“오늘 갑자기 헤어지자는 편지가 왔대요. 그것도 숙소가 아니라 여기로요.”

“자주 못 만나니까 마음이 멀어진 것 같다고……. 흐윽! 자꾸 울어서 죄송합니다, 부단장님…….”

“…아니야. 일단 조금 쉬고 있어.”

일리아는 레미와 라리사를 뒤로한 채 걸음을 돌렸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자주 못 만나서 마음이 멀어진 것 같다고…….’

일리아도 카일루스와 만나지 못한 지 오늘로 정확히 두 달째였다. 그동안 편지를 두어 번 주고받기는 했지만 일이 많이 바쁜 모양인지 지금은 연락마저 끊어진 상태였다.

이런 때에 비슷한 상황에 처한 커플의 결말을 듣게 되었다. 일리아는 ‘아니야. 카일루스는 달라.’ 하고 생각하면서도 불안해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시간만 보낸 일리아는 해가 지자마자 별궁으로 향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괜히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동안 숱하게 연애에 실패해 왔던 일리아였다. 또다시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별궁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던 일리아는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 * *

한동안 다이아몬드궁에 머무르던 일리아는 가족들과 함께 그라니체 저택으로 돌아왔다. 드디어 보수 공사가 끝났기 때문이었다. 드래곤의 마력 덕분인지 그라니체 저택은 유독 피해가 적었다. 그래서 다른 이들보다 먼저 일상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오고 싶어 했던 집에 도착했음에도 일리아는 울적하기 그지없었다. 클리드가 아직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벨라는 클리드가 아이기스를 펼치느라 무리하게 영혼을 나눈 것이 치명적인 영향을 준 것 같다고 했다. 그녀조차 클리드가 언제 깨어날지 모르겠다고.

‘자기 몸부터 좀 챙기지.’

일리아는 물수건으로 클리드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수건을 제대로 짜지 않은 탓에 물이 뚝뚝 떨어져 베개가 금세 흥건해졌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누군가를 간호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치유 마법을 쓰면 금방 나을 텐데 뭐 하러 간호를 하겠는가. 일리아는 그저 로레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타이밍 좋게 들어온 것뿐이었다.

‘오라버니가 깨어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하지?’

일리아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축축한 물수건이 클리드의 코와 입을 막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로.

한참이 지나도 물수건이 걷히지 않자 곤히 잠들어 있던 클리드는 결국 눈을 떴다. 회복이 끝난 건 아니었다. 육체가 질식사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그를 강제로 깨운 것이었다.

“…일리아.”

“오라버니!”

클리드가 눈을 뜨자 깜짝 놀란 일리아가 물수건을 홱 집어 던지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소리를 빼액 내질렀다.

“악! 어떡해! 오라버니, 미안해!”

일리아는 물수건을 치우고 나서야 클리드의 몰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마치 막 목욕을 마치고 나온 사람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 당황한 일리아는 옷소매로 클리드의 얼굴을 슥슥 문질렀다.

“미안해…….”

“젖은 건 크게 문제가 아닌데……. 아니, 괜찮아. 덕분에 일어났잖아.”

“……정말 미안해.”

클리드가 작게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오래 누워 있었던 탓인지 전신이 찌뿌드드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나는 괜찮아. 너는?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응. 멀쩡하니까 걱정하지 마.”

클리드가 일리아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런데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어?”

“원래 이렇게 생겼…….”

“아니야. 우리 일리아는 더 뽀송뽀송하고 하얗고 말랑말랑하고 귀엽다고.”

“…요새 일을 많이 해서 그런가 봐.”

일리아는 머쓱해하는 얼굴로 콧잔등을 긁적였다.

“아버지랑 어머니는?”

“두 분 다 잘 계셔. 이따 같이 인사드리러 가자.”

“그래. 또 다른 건?”

일리아는 아자카산맥에서 있었던 일부터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자카산맥에서의 전투를 제외하면 도시 재건을 위해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게 다였지만 말이다.

일리아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던 클리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펜드릭이 마계의 마력을 사용했다고?”

“응. 신의 사자라는 사람이 그렇게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니까.”

“어리석은 놈. 내가 죽이지 못한 건 아쉽지만… 자업자득이지, 뭐.”

“그리고 곧 국장과 즉위식이 열릴 거야.”

“굳이 국장을 치를 필요가 있나?”

“국민들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선황 폐하에 대한 예우는 해 드려야지.”

“흐음, 그런데 일리아.”

클리드가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것 말고도 무슨 일이 있어 보이는데.”

“없는데?”

“아니야. 분명히 있어. 얼른 말해 봐. 이 오라버니가 다 들어 줄 테니까.”

“정말 없다니까?”

“없는 얼굴이 아닌데. 혹시 카일루스에 관한 거야?”

잠시 망설이던 일리아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데 그래?”

“그게…….”

일리아는 깊은 한숨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얼마 전에 업무차 현장에 나갔다가 들은 이야기인데, 단원 중 하나가 연인이랑 헤어졌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그 남자가 레미한테, 아, 레미는 연인과 헤어졌다던 그 단원이야. 아무튼, 레미한테 자주 못 만나니까 마음이 멀어진 것 같다고 했다는 거야. 마침 카일루스와 내가 레미네와 비슷한 상황이거든. 나도 바쁘고 카일루스도 바쁘다 보니까 도통 만날 수가 없어. 최근에는 연락도 안 해. 전에 편지를 보냈는데 아직도 답이 안 왔어. 나는 그나마 여유가 생겼는데 카일루스는 아직도 많이 바쁜가 봐. 그래서 편지를 다시 보내 볼까 했는데 괜히 귀찮게 구는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집착하는 것 같기도 해서 보내지는 않았어. 이건 잘한 것 같아. 이번에도 답장이 안 오면 정말로 울지도 모르거든. 지금도 이렇게 슬픈데 그걸 또 어떻게 견디겠어. 카일루스와는 즐거운 추억만 쌓아 가고 싶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아,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아무튼, 내 마음은 그대로인데 카일루스의 마음이 어떤지는 알 수가 없으니까 너무 불안해. 혹시라도 정말 마음이 식어서 나를 피하는 거면 어떡해? 내가 너무 넘겨짚는 걸까? 하아, 나는 왜 항상 이 모양인 거야. 내가 이래서 맨날 연애에 실패하는 건가 봐.”

고민이 없다고 한 것치고는 꽤나 장황한 이야기였다. 어떻게 이렇게 쉬지 않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인지. 클리드는 가만히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차피 같은 황성에 있었을 거 아니야. 안 찾아가 봤어?”

“많이 바빠 보여서. 편지에 답장도 없고…….”

일리아가 의기소침하게 고개를 숙이자 클리드가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래서 일리아,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어떻게 하다니?”

“불안하다며. 계속 이런 상태로 지낼 수는 없잖아.”

“그건 그런데…….”

“이참에 헤어지는 건 어때? 그럼 걱정 안 해도 되잖아.”

“안 돼! 그건 절대 싫어!”

일리아는 눈물까지 그렁그렁 매단 채로 펄쩍 뛰었다. 그에 놀란 건 클리드였다. 에렉과 헤어지라고 할 때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카일루스를 정말 좋아하긴 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그냥 확 결혼해 버려. 못 헤어지겠으면 결혼해야지, 어쩌겠어.”

“결…혼?”

일리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잘 익은 사과처럼 달아올랐다. 문득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카일루스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있잖아요, 카일루스. 전쟁이 끝나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 지금 하면 안 되는 거야?

- 네. 지금은 안 돼요. 조금만 기다려 줘요.

사실 일리아는 전쟁이 끝나면 카일루스에게 청혼을 하려고 했었다. 전쟁 중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는 그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남은 여생은 카일루스와 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카일루스 역시 같은 마음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청혼할 타이밍을 놓치고, 이제는 연락마저 끊기는 바람에 괜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카일루스를 의심하고 말았다. 아직도 이렇게 사랑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일리아는 울먹거리며 클리드의 손을 꼭 붙잡았다.

“고마워. 오라버니 덕분에 마음이 정리됐어.”

“바로 황성으로 갈 거야?”

“아니! 그 전에 준비할 게 있어!”

* * *

한편, 별궁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던 카일루스 역시 일리아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때 답장을 보냈어야 했는데.’

카일루스는 깃펜을 내려놓으며 머리카락을 잔뜩 헝클어뜨렸다. 분 단위로 올라오는 보고서들 때문에 일리아의 편지를 보고도 그냥 넘긴 게 화근이었다. 내일 답장해야지, 내일 답장해야지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그사이 일리아에게서 새로운 편지는 도착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마음이 많이 상한 모양이었다. 당연했다. 같은 황성에 있으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조차 하지 않는 연인이라니. 최악이지 않은가.

‘차라리 지금이라도 쓰자.’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카일루스는 비장한 얼굴로 편지지를 꺼냈다. 그러고는 깃펜을 들고 편지의 첫머리를 채웠다.

[오랜만이야, 일리아.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게 얼마 만인지…….]

카일루스는 편지지를 잔뜩 구겨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다. 굳이 오랜만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줄 필요는 없었다. 첫머리부터 이렇게 썼다가는 괜히 일리아의 기분만 상하게 만들고 말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카일루스는 마음을 다잡으며 새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사랑스러운 나의 귀염둥이에게.]

두 번째 편지지 역시 쓰레기통 속으로 사라졌다.

[나의 아기 고양이, 일리아.]

“젠장.”

세 번째 편지지마저도 쓰레기통의 먹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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