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카일루스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곤 일리아에게 넌지시 말했다.
“일리아, 그대는 먼저 가서 쉬어. 테오도르한테는 내가 다녀올 테니까.”
“아니에요. 같이 가요. 아직 괜찮아요.”
“힘들면 꼭 말해.”
“알겠어요. 고마워요, 카일루스.”
일리아는 카일루스와 함께 테오도르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노크를 하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테오도르가 화색을 띠며 다가와 카일루스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잘 돌아왔어.”
“징그럽게 뭐 하는 거야?”
“그냥. 반가워서.”
픽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선 테오도르는 일리아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그라니체 경도 수고 많았어.”
“감사합니다.”
“일단 앉지. 나눌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곧 이사벨라도 올 거야.”
그들이 소파에 앉기 무섭게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연 사람은 바로 이사벨라였다.
“저 왔어요!”
“딱 맞춰서 왔네. 앉아, 이사벨라.”
이사벨라가 배시시 웃으며 테오도르의 옆에 앉았다.
이사벨라의 얼굴은 전에 없이 밝았다. 그럴 만했다. 칼리파는 이사벨라의 숙적이었다. 앓던 이가 빠졌으니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일단은 보고부터 듣지.”
목을 가다듬은 카일루스는 성지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보고했다. 펜드릭과의 일전부터 어떻게 봉인을 끝마칠 수 있었는지까지 전부.
펜드릭이 마계의 마력을 사용했다고 했을 때도 놀라지 않았던 테오도르가 신물을 잃어버렸다는 말에는 뒷목을 붙잡고 쓰러질 뻔했다. 그란디아의 눈물은 리안나 황후의 유품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테오도르는 당장 수색대를 보내야겠다며 눈에 불을 켰다.
“오라버니, 진정하세요.”
“후우, 그래. 일단 봉인에 썼다던 반지부터 보여 줘 봐.”
테오도르가 일리아를 향해 손을 내밀자 그녀는 장갑을 벗더니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빼내어 그의 손바닥 위에 척 올려놓았다.
“클리드가 준 건가?”
“아닙니다. 각하께서 생일 선물로 주신 겁니다.”
테오도르는 반지를 이리저리 돌려 가며 자세히 살폈다.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새하얀 반지는 은은한 신성을 머금고 있었다. 그에 호기심이 생긴 이사벨라도 테오도르 쪽으로 몸을 기울여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이거!”
“왜 그래?”
이사벨라가 카일루스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에스테반 공작, 이 반지, 산 거 아니죠? 혹시 집에 있던 금속으로 만든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역시 그렇군요! 이건 신의 눈물이에요. 제가 펜드릭의 칼에 찔렸을 때 칼릭스의 앞에 떨어졌다고 해요.”
“신의 눈물… 말입니까?”
“네. 신의 눈물은 순수한 신성의 결정체예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신물과는 차원이 다르죠.”
테오도르는 반지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놀라운 이야기긴 하지만 그런 엄청난 걸로 연인의 생일 선물을 만든 남자가 있다는 게 더 놀라운데.”
“…난 이게 뭔지 몰랐어. 우연히 눈에 띄었을 뿐이라고.”
“그것 참 대단한 우연이군.”
“비꼬지 마, 테오도르.”
이사벨라는 두 사람의 설전을 뒤로한 채 반지를 집어 들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만은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카일루스가 신의 눈물을 발견한 것도, 그것을 일리아에게 선물한 것도. 엘리시오의 환생 또한 칼리파의 재림을 예견한 신의 안배일 확률이 높았다. 신은 항상 몇 수 앞을 보고 있었으니까.
‘이럴 거면 그냥 제대로 도와주기나 하시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어 상념을 털어 낸 이사벨라는 반지를 다시 일리아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전하?”
“이건 일리아가 가지고 있는 게 좋겠어요. 신께서도 그걸 바라시는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일리아가 어리둥절해하는 얼굴로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테오도르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경이 보관하도록 해.”
“그래도 되겠습니까?”
“생일 선물이라면서. 그런 걸 어떻게 빼앗겠어. 무려 에스테반 공작이, 신의 눈물로, 직접, 만들었다는데.”
“시끄러워, 테오도르.”
테오도르의 허락이 떨어지자 일리아가 볼을 발그레 물들이며 꾸벅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제네리아와 피델리오 플레타는?”
테오도르의 물음에 카일루스가 대답했다.
“제네리아는 죽었어.”
“죽었다고?”
“일리아가 기절시킨 후에 병사들에게 맡겼다는데 봉인이 완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로 화했다고 하더군.”
아무래도 제네리아 역시 반마족이었기 때문에 칼리파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테오도르는 다시금 물었다.
“그럼 피델리오 플레타는?”
“피델리오 플레타는 생포했어. 감옥에 옮겨 놓으라고 지시하지.”
“…제네리아가 죽은 건 조금 아쉽군. 물어볼 게 아주 많았는데 말이야. 일단은 알겠어. 별로 쓸모는 없을 테지만 피델리오는 내가 데리고 있도록 하지. 자, 그럼 보고는 이만하면 된 것 같으니까 일단은 푹 쉬도록 해. 조만간 바빠질 테니까.”
카일루스와 함께 테오도르의 집무실을 나선 일리아는 반지를 내려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에요.”
“그만 내려다보고 얼른 가서 쉬어. 그라니체 백작은 다이아몬드궁에 있을 거야.”
“알려 줘서 고마워요. 카일루스도 푹 쉬어요. 아, 그리고.”
일리아가 까치발을 들더니 카일루스에게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소리가 넓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직접 만들었을 줄은 몰랐어요. 선물 정말 고마워요.”
일리아가 생긋 미소 짓자 카일루스 역시 마주 웃으며 그녀에게 재차 입을 맞췄다.
“별말씀을.”
“그럼 가 볼게요, 카일루스.”
“푹 쉬어.”
황태자궁을 나선 일리아는 곧장 다이아몬드궁으로 향했다. 넓은 복도를 지나 거실 문을 활짝 열자 레이븐과 엘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일리아는 당장 안으로 뛰어 들어가 두 사람의 품에 안겼다.
“아버지, 어머니!”
“일리아! 무사했구나, 내 딸!”
레이븐의 목소리를 들으니 긴장이 풀리며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이제야 비로소 전쟁이 끝났다는 것이 실감 났다.
한참을 그들의 품에서 눈물만 흘리던 일리아는 코를 훌쩍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다들 무사한 거죠? 오라버니는요? 지금 어디 있어요?”
“그게…….”
레이븐이 쉽게 대답하지 못하자 엘레나가 일리아를 부드럽게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따라오렴.”
엘레나는 일리아를 침실로 안내했다. 넓은 방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침대에는 클리드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파리한 안색과 꾹 다문 입술이 평소와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침대 끄트머리에 앉은 일리아는 조심스럽게 클리드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도 어렴풋하게나마 온기가 느껴졌다.
“오라버니가 왜 이렇게 된 거예요?”
“마력의 고갈 때문이란다.”
칼리파와의 일전에서 마력을 극한까지 사용한 클리드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무리해서 아이기스를 펼쳤고, 결국 가수면 상태에 빠지고 만 것이었다.
일리아는 울컥거리는 감정을 애써 다스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제로스 제국을 지키는 게 오라버니의 임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조금 속상하네. 이렇게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일리아는 문득 지난 테멜전을 떠올렸다. 그때, 일리아도 본대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 하에 희생을 자처했었다. 클리드 역시 그런 마음으로 마력을 한계까지 사용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자꾸만 눈물이 새어 나오려고 했다.
소매로 눈가를 벅벅 문지른 일리아는 클리드의 손을 꼭 붙잡았다. 지금 눈물을 흘리는 건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희생하여 제국을 구한 클리드를 위해서라도 발 벗고 나서서 제국의 안위를 살펴야만 했다.
일리아는 고개를 살짝 돌려 엘레나에게 물었다.
“오라버니가 쓰러졌으면, 세실라는요?”
“세실라도 쓰러졌단다. 지금은 에나가 돌보고 있고.”
“에나한테 세실라를 잘 돌봐 달라고 전해 주세요.”
다시금 클리드를 향해 고개를 돌린 일리아는 부드럽게 웃었다.
“고생 많았어, 오라버니. 당분간은 푹 쉬어. 내가 오라버니 몫까지 열심히 일할게.”
* * *
“오라버니 몫까지 열심히 일하긴 개뿔! 힘들어 죽겠네! 오라버니, 도와줘! 보고 싶어!”
일리아가 우는소리를 하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흙먼지가 폴폴 휘날리는 것과 동시에 사방으로 부서진 건물 잔해가 날아갔다. 그렇다. 현재 일리아가 있는 곳은 아로스의 복구 현장이었다.
마법사인 그녀가 왜 공사판에 나와 있는 것인가. 사건은 두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테오도르는 라플라드에서 귀족들이 돌아오자마자 회의를 소집했다. 그러고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 국장과 즉위식은 간소화하여 진행하겠다.
귀족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국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즉위식만큼은 최대한 성대하게 치러야 타국에 위엄을 세울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강경했다.
- 도시를 복구하는 데만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데 쓸데없는 데다가 국고를 낭비할 수는 없다.
- 세금을 더 걷으면 되지 않습니까!
- 그럼 그만큼 그대가 더 내면 되겠군, 로베르트 백작.
그제야 로베르트 백작을 비롯한 귀족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에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 테오도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를 더 보탰다.
- 아, 그리고 근위대를 제외한 모든 병사를 도시 복구 현장에 투입하겠다. 당분간 할 일도 없을 테니 힘이라도 쓰고 오도록.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일리아는 아로스 복구 현장에 파견된 이후로 두 달 동안 단 한 번도 쉬지 못했다.
땅을 움직여 바닥을 고르고, 바람으로 건물 잔해를 옮기고, 옮긴 잔해들을 태워서 처리하고. 일리아는 일당백의 효율을 낼 수 있는 최고의 일꾼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 꼭 필요한 인재라는 말이다. 덕분에 이리저리 불려 다니느라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하아, 거의 다 치워 가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 나머지는 건축가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래도 일리아의 사정은 나은 편이었다. 적어도 여러 속성의 마법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으니 말이다.
크리스틴은 플로라 후작령인 하베룬과 글렌의 복구를 맡게 되었고, 오스카는 헤이스팅스 후작령인 길로티아까지 내려갔다.
그곳들은 거리가 먼 데다가 가는 길도 험하고, 무엇보다 외곽 지역이라 기술자가 많이 부족했다. 마법을 다루지 못하는 크리스틴과 물 속성 마법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오스카로서는 여러모로 힘들 수밖에 없는 것.
“빨리 끝내고 쉬어야지.”
애써 몸을 일으킨 일리아는 옷을 탁탁 털어 냈다. 이제 일을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