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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96)화 (96/101)

96화 

신성과 정형화된 검술로는 일리아를 죽일 수 없다. 그렇게 판단한 펜드릭은 몸을 뒤로 물리며 후우,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펜드릭의 전신에서 검붉은 마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일리아는 카일루스가 있는 곳까지 물러서며 경악했다.

“저게 대체…….”

“아무래도 마계의 힘을 받아들인 모양이군.”

펜드릭이 내뿜는 검붉은 마력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강했다. 그의 육신을 구성하고 있는 신성마저 집어삼킬 정도로 말이다.

펜드릭의 전신이 검게 물들며 손톱이 장검만큼이나 길게 자라났다. 들고 있던 검을 집어 던진 그는 고개를 쳐들고 짐승처럼 포효했다.

신의 사자가 마계의 마력을 사용한다는 게 기묘하기는 했지만, 카일루스는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신성은 모든 것을 정화하는 신의 힘이다. 신을 저버린 사자를 처리하기에는 딱이지 않은가.

“정신 바짝 차려. 빠르게 끝내는 거야.”

“알겠어요.”

“다 찢어 죽여 주마!”

카일루스와 펜드릭이 치열하게 맞부딪쳤다.

펜드릭은 일리아의 지원 사격을 마력으로 방어하며 카일루스를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열 개의 길쭉한 손톱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카일루스를 압박했다.

매서운 공격이었지만 전투의 양상은 결코 이전과 같지 않았다. 카일루스의 검에 서려 있던 신성이 전에 없이 밝게 빛나며 펜드릭의 마력을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펜드릭은 금이 가기 시작한 손톱을 내려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건 칼리파의 힘이다! 고작 인간 따위가!”

펜드릭은 괴성을 내지르며 카일루스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의 검과 맞부딪칠수록 손톱은 부서져만 갔고, 결국 육신마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식겁한 펜드릭은 서둘러 마계의 마력을 날려 버렸다. 하지만 그의 몸을 정화하기 시작한 신성은 더욱 밝게 타오르며 정화를 가속할 뿐이었다.

“크윽, 안 돼!”

얼마 지나지 않아 펜드릭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완전히 재로 화했다.

그 모습을 본 카일루스는 거친 숨을 토해 내며 검을 떨어뜨렸다. 일리아가 서둘러 휘청거리는 그를 부축했다.

“끝난 것 같죠?”

“그래. 드디어 끝난 것 같군.”

“이, 일단 봉인부터 해요! 신물은요?”

“신물은 메넬라에게 맡겼었는데…….”

카일루스와 일리아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전투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바로 신물의 존재였다.

봉인의 열쇠가 될 황족과 드래곤의 피는 카일루스와 일리아가 대체할 수 있었지만 신물은 아니었다. 신물을 잃어버리면 봉인을 할 수 없으니 아제로스 제국이 멸망하고 말 것이었다.

“메, 메넬라가 잘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일단 가 보자.”

두 사람은 서둘러 성지로 돌아왔다. 전투는 이미 끝난 지 오래였다.

“각하!”

카일루스의 모습을 확인한 한 기사가 화색을 띠며 그에게 다가왔다.

“메넬라는?”

“그러고 보니 못 본 것 같은데…….”

카일루스는 주위를 둘러보며 크게 외쳤다.

“메넬라를, 신물을 찾아!”

에스테반 부대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열심히 뛰어다니며 아자카산맥을 뒤졌지만 메넬라도, 그의 시신도, 신물도 찾아내지 못했다.

“차라리 내가 가지고 있는 거였는데…….”

일리아가 허탈한 얼굴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껏 많은 희생을 치러 가며 전투에서 승리했는데 신물을 잃어버려서 차원의 통로를 봉인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니. 이런 바보 같은 경우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이렇게 멍청하게 시간을 버리고 있는 사이에도 황성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 차원의 통로를 봉인하지 못하면 머지않아 인간계는 다시금 끔찍한 지옥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젠장…….”

일리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 널려 있는 시신들 사이로 지친 기색이 역력한 병사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은 성지를 탈환해야 인간계를 구할 수 있다는 일념 하나로 검을 휘둘렀을 것이다. 그런데 신물을 잃어버린 탓에 모두의 목숨이 날아가게 생겼다.

일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분이 올라오는지 별안간 흙바닥을 세게 내리쳤다.

그 순간, 일리아의 왼손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어? 이거 왜 이래?”

일리아는 눈을 세차게 깜박거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빛의 근원지는 바로 카일루스가 선물로 주었던 반지였다.

“카일루스? 이거 왜 이래요?”

카일루스가 서둘러 일리아에게 다가왔다. 반지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명백한 신성이었다. 처음 보는 금속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신물과 관계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단 시도해 보는 게 좋겠어.”

“네, 네!”

일리아는 얼른 반지를 빼내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손가락에 상처를 내어 피를 떨어뜨렸다.

이어서 카일루스도 피를 떨어뜨리자 성지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아자카산맥 전체를 아우를 정도로 영역을 넓힌 빛은 이내 하늘 높이 치솟았고, 검게 물든 하늘에 황금빛 봉인진을 그려 냈다.

쿠구궁!

엄청난 굉음과 함께 검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 * *

황금빛 봉인진은 황성에서도 확연하게 보였다. 결계 안에 갇힌 채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칼리파는 쯧, 하고 혀를 차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네가 이겼군, 엘리시오.”

“인간이 이긴 거지. 내가 말했잖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칼리파가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패배를 인정하지.”

“인정하겠다고? 당신이 웬일이야?”

“수백 년이나 지났으니까.”

무너져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사샤가 결계를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그 순간, 칼리파의 눈이 빛나는가 싶더니 클리드의 손등에 꽂혀 있던 칼리파의 할버드가 이사벨라를 향해 빠르게 날아왔다. 팍! 하고 몸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붉은 선혈이 튀었다.

“엘리시오!”

클리드가 피로 흥건한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이사벨라에게 다가갔다.

“엘리시오! 괜찮……!”

클리드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붉은 번개를 두른 할버드는 이상하게도 이사벨라의 몸이 아닌, 칼리파의 목 줄기에 박혀 있었다.

“크윽…….”

칼리파가 신음을 흘리며 무릎을 꿇자 이사벨라가 그와 눈높이를 맞춰 앉았다.

“칼리파. 여긴 황성이야. 신과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

“큭……. 아직도 신의 가호를 받고 있을 줄은…….”

“어리석기는. 난 영원히 신과 함께야. 죽어서도, 살아서도 말이지.”

이사벨라가 씁쓸하게 웃으며 칼리파의 상처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잘 가, 나의 악연.”

마침내 칼리파의 신형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피 웅덩이에 쓰러진 그의 시신은 곧 재가 되었고, 남아 있던 마족들 또한 단말마의 비명만을 남긴 채 바람에 섞여 흩어졌다. 오직 살아남은 마물들만이 몸을 버둥거리며 마계의 인력에 끌려갈 뿐이었다.

그렇게, 전쟁은 끝이 났다.

【 전쟁이 끝나고 】

은은하게 빛나는 반지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일리아는 카일루스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전하께 가져다드려야겠죠?”

“…미안하군. 그대의 생일 선물인데.”

“미안하긴요. 덕분에 이렇게 봉인을 마칠 수 있었잖아요.”

“그래도…….”

“다음에 더 좋은 걸로 주세요. 까먹으시면 안 돼요.”

일리아가 방긋 웃으며 반지를 손에 끼웠다. 일단은 황성까지 무사히 운반해야 했기 때문이다. 괜히 다른 곳에 보관했다가 잃어버릴지도 모르니 손에 끼고 가는 게 마음 편했다.

“다들 무사할까요?”

“그럴 거야.”

“얼른 돌아가요. 제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불안해서 못 견디겠어요.”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 폐하를 찾아야지.”

남은 병사들이 피델리오를 포박하고 전장을 정리하는 사이 일리아를 비롯한 마법사들은 탐지 마법을 이용하여 마력의 흔적을 수색했다. 바이에드는 제네리아와 함께 있었을 테니 그녀의 마력을 추적하면 그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여기 근처인 것 같은데…….”

일리아가 멈춰 선 곳은 성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였다. 전소되어 잿빛으로 변한 숲은 태양이 비추고 있음에도 무척이나 을씨년스러웠다.

“샅샅이 뒤져.”

카일루스의 명령에 기사들이 사방을 들쑤시고 다니며 수색에 나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기사가 ‘여기 동굴이 있습니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윽, 이게 무슨 냄새야.”

어두컴컴한 굴은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것인지 입구 앞에 섰을 뿐인데도 묘한 냄새가 났다.

“제가 먼저 가 볼게요.”

일리아가 작은 불꽃을 피워 내며 선두에 섰다.

구불구불한 통로를 지나 넓은 동굴에 들어서자 고약한 썩은 내가 코를 찔러 왔다. 일리아는 코를 막으며 불꽃을 천장에 띄웠다. 곧 환한 불꽃이 사방을 밝히며 동굴 안을 적나라하게 비추었다. 오물로 얼룩진 간이침대 옆으로 누군가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헉!”

“폐하!”

그건 바로 바이에드의 시신이었다. 반쯤 썩어 있었지만 금색 머리카락과 황제의 침의 덕분에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일리아는 제복 겉옷을 벗어 바이에드의 시신 위에 덮었다.

“조심히 모셔.”

“알겠습니다!”

바이에드의 시신을 동굴 밖으로 가지고 나오자 썩은 내가 훅 풍겨 왔다. 일리아는 옅은 바람을 불러내어 냄새를 날리고 시신에 결계를 쳤다.

“카일루스, 폐하는 이미…….”

“일단 시신이라도 모시도록 하지.”

“네. 제가 감독할게요.”

고개를 작게 끄덕거린 카일루스는 병사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크게 외쳤다.

“전군! 귀환한다!”

“와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아자카산맥을 가득 울렸다.

* * *

바이에드의 시신을 수습한 에스테반 부대는 피델리오를 데리고 즉시 황성으로 향했다. 원래는 하루면 도착할 거리였지만 꼬박 닷새나 걸렸다. 시신이 손상되지 않도록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일리아는 황성에 도착하기 전까지 사심을 마음껏 채울 수 있었다. 카일루스와 함께 불침번을 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함께 잠을 자기도 했다. 물론 병사들이 보고 있어 애정 표현은 할 수 없었지만 일리아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드디어 도착했네.’

일리아는 말에서 내려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성은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아로스만큼이나 처참했다. 외성은 완전히 파괴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고, 내성 또한 피해가 막심해 보였다. 특히나 황녀궁은 지붕이 완전히 내려앉아 복구에 시간이 꽤 걸릴 듯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황성 전체에 아이기스가 펼쳐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클리드가 무사하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일리아는 한시름을 덜어 낼 수 있었다.

일리아가 황성을 둘러보는 동안 카일루스는 병사들에게 바이에드의 시신을 황제궁으로 옮기라고 지시하는 한편 테오도르의 소재를 파악했다. 마침 성벽 잔해를 치우던 내성 병사가 테오도르가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 그는 현재 황태자궁의 개인 집무실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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