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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95)화 (95/101)

95화 

“…….”

제네리아는 말라비틀어진 팔을 숨기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강자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일리아의 마력은 이전과 차원이 달랐다. 마력의 양도, 드래곤의 기운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월등하게 높아져 있었다. 신성의 영향으로 죽어 가고 있는 제네리아로서는 절대 일리아를 이길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후우, 거의 다 정리되었네.”

제네리아를 기절시키고 손을 탁탁 털어 낸 일리아는 성지를 둘러보았다. 프노이트군도, 마물도 거의 다 베어 내어 이제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천여 명에 달하던 에스테반 부대도 수가 현저히 줄어들긴 했지만 이 정도면 대승이었다.

‘카일루스는? 괜찮은 건가?’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카일루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일리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카일루스!”

* * *

전쟁이 시작된 지도 벌써 두 달이 훌쩍 지났다. 굳건하게 버티던 내성 성벽도 이미 반쯤 허물어졌고 고된 전투에 지친 병사들은 점차 피폐해져 갔다.

그래도 클리드와 오스카, 그리고 제논이 힘을 써 준 덕분에 지상에서의 전투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지만, 정작 클리드의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인간계가 마계와 맞닿아 있는 게 화근이었다. 마왕은 마르지 않는 샘물을 퍼 담는 것처럼 마계의 마력을 끊임없이 끌어다 썼다. 반면 사용할 수 있는 힘이 한정적인 클리드는 어쩔 수 없이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하아, 하아…….”

클리드가 거친 숨을 토해 내며 칼리파를 노려보자 그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나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이건 반칙이잖아.”

“내게 주어진 무기를 사용했을 뿐이야. 반칙이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클리드는 반쯤 잘린 두 장의 날개를 겨우 퍼덕거려 외성에 내려섰다. 이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난생처음 겪어 보는 마력 고갈에 클리드는 이를 악물며 꼬리를 바르작거렸다.

“너라도 죽일 수 있어서 다행이야, 미카엘.”

칼리파가 천천히 클리드의 목 위에 올라섰다. 그러고는 할버드를 하늘 높이 치켜들며 섬뜩하게 웃었다.

“끝이다.”

“크흑, 칼리파!”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할버드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어디선가 하얀 빛이 날아와 날카로운 도끼날을 쳐 냈다.

칼리파는 얼얼해진 오른손을 가볍게 털어 내며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할버드를 쳐 낸 것은 바로 눈처럼 새하얀 고양이였다.

“이건…….”

“멈춰, 칼리파.”

그때, 한쪽에서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치열한 전쟁터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소리였다.

칼리파는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백금의 머리카락에 노을과도 같은 적금빛 눈동자, 그리고 속이 뒤틀릴 정도로 올곧은 눈빛까지. 외모는 많이 달라졌지만 칼리파는 그녀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엘리시오.”

식겁한 클리드가 몸을 버둥거리며 외쳤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이사벨라!”

“넌 가만히 있어.”

칼리파가 클리드의 목을 지그시 밟으며 웃었다.

“오랜만이군, 엘리시오. 그때 죽은 줄 알았는데.”

“죽었지. 어쩌다 보니 다시 살아나 버렸지만.”

“드디어 신도 널 버린 모양이야. 그런 모습으로 나를 만나게 하다니.”

들고 있던 할버드를 던져 클리드의 손등에 내리꽂은 칼리파는 이사벨라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사샤가 바짝 따라붙었다.

“또다시 많은 인간이 죽었다. 절망스럽지 않나?”

“전혀. 그들의 희생은 마음 아프지만 당신을 다시 마계로 돌려보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설마 그 인간들이 펜드릭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 당신만 이곳에 붙잡아 둘 수 있다면 말이야. 사샤!”

이사벨라가 사샤의 이름을 부르며 칼리파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와 동시에 사샤의 몸이 환하게 빛났고, 눈처럼 새하얀 빛이 곧 결계로 화하여 그들을 가두었다.

“이게 뭐 하자는 짓이지?”

“당신을 붙잡아 놓으려는 거야. 신의 사자는 미카엘과 펜드릭이 다가 아니거든.”

이사벨라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이 공간 안에서 당신은 나를 죽일 수 없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칼리파가 이사벨라의 손을 쳐 내더니 손톱으로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러나 피는 터져 나오지 않았다. 그저 하얀 가루만이 상처 부위에서 잘게 흩날릴 뿐이었다.

“이것 봐. 당신은 나를 죽일 수 없어.”

“이런다고 결과는 달라지지 않아. 인간들은 펜드릭을 이길 수 없을 테니까.”

“왜 그렇게 확신하는 거지, 칼리파?”

“내가 펜드릭에게 작은 선물을 주었거든.”

칼리파의 말에 이사벨라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더 확실하게 이길 수 있겠어.”

“뭐라고?”

“에스테반 공작은 신이 직접 선택한 자야. 그의 옆에는 든든한 지원군도 붙어 있고. 예전의 나처럼 말이야.”

* * *

카일루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숨겼다. 잘게 떨리는 오른팔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렀다.

사실 카일루스는 봉인 의식을 주관해야 했기에 절대 성지에서 멀어져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일리아는 물론이고 다른 병사들 역시 자신의 전투에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펜드릭은 강했다. 카일루스는 모두를 지키면서 펜드릭을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일리아는 무사하겠지.’

잠시 검을 내려놓은 카일루스는 돌연 실소를 터뜨렸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일리아를 가장 먼저 떠올리다니. 중증이 아닐 수 없었다.

카일루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상처 부위를 지혈했다. 피가 완전히 멎을 때까지는 휴식을 취해야 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어두컴컴한 숲 너머에서 강한 신성을 가진 존재가 다가오고 있었다. 펜드릭이었다. 카일루스는 왼손으로 검을 움켜쥐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왜 자꾸 도망가는 거야? 대충 죽어 주면 좀 좋아?”

“시끄러워.”

펜드릭의 비아냥거림에 카일루스는 검을 치켜들었다. 육체가 벌써 한계에 달한 것인지 손끝이 덜덜 떨려 왔다.

지난 전쟁 때도 이렇게까지 몰리지는 않았었다. 카일루스는 새삼 신의 힘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실감하게 되었다.

“칼릭스의 후손. 너만 죽이면 봉인 의식은 치를 수 없게 될 거야. 그렇지?”

“아제로스 제국에 황족이 나 하나뿐인 줄 아나?”

“적어도 이곳에는 너 하나뿐이지. 다른 황족이야 나중에 죽이면 되는 거고.”

펜드릭이 눈을 섬뜩하게 빛내며 잇새로 말을 씹어뱉었다.

“신은 너희를 지켜 주지 않을 거야.”

펜드릭이 발을 크게 굴러 카일루스에게 달려들었다. 카일루스 역시 침착하게 검을 휘둘러 그에게 대응했다.

신성을 머금은 칼날이 연달아 부딪치면서 날카로운 금속음을 토해 냈다. 일견 대등해 보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카일루스의 발끝이 조금씩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슬슬 한계인가.’

그렇게 치열한 접전을 이어 가던 때였다. 갑자기 한쪽에서 거대한 마력이 휘몰아쳤다.

마력의 정체는 드래곤의 형상을 한 파도였다. 아가리를 쩍 벌린 드래곤이 순식간에 펜드릭을 집어삼키고 카일루스를 뒤쪽으로 밀어냈다.

“카일루스!”

“일리아?”

일리아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카일루스에게 달려왔다. 그러고는 얼떨떨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맞닿은 카일루스의 몸에서 짙은 혈향이 풍겨 왔다.

“왜 이렇게 많이 다쳤어요!”

“난 괜찮아. 그대는?”

“저는 멀쩡해요. 진짜… 속상하게…….”

울먹거리며 몸을 떼어 낸 일리아는 카일루스를 치유했다. 피가 줄줄 흘러나오던 상처들이 삽시간에 아물면서 육체의 피로감 또한 옅어졌다.

“고마워, 일리아.”

“고마우면 다치지나 말아요.”

카일루스가 몸을 추스르는 사이, 펜드릭이 일리아의 마법을 칼로 베어 내곤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상당히 놀란 모양인지 헛웃음을 흘렸다.

“하, 이 마력은 또 뭐야? 미카엘이 자식을 만들기라도 한 거야?”

“자식이라니. 말조심해. 우리 오라버니는 아직 미혼이라고.”

“…오라버니? 그럴 리 없어. 미카엘은 신이 만든 피조물인데 가족이 있을 리가…….”

“있어. 당신은 마계에 처박혀 있느라 잘 몰랐겠지만.”

펜드릭의 얼굴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그에게 신은 오직 엘리시오밖에 모르는 편향적인 존재였다. 그런데 칼릭스의 후손에게 엄청난 신성을 부여한 것으로도 모자라 미카엘에게는 가족까지 허락하다니. 이제는 화가 나다 못해 신이 증오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렇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애먼 사람 그만 괴롭히고 나한테 덤벼. 내가 상대해 줄 테니까.”

“하, 건방진 건 미카엘과 똑같군.”

펜드릭이 일리아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일리아는 빠르게 몰아치는 검을 피해 내며 그에게 얼음 화살과 화염구를 쏘아 보냈다.

펜드릭은 마법을 검으로 베어 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 순간, 일리아의 검이 순식간에 그의 목 줄기를 노려 왔다.

펜드릭은 급하게 몸을 틀며 검을 뻗었다. 그러나 자세가 무너진 탓에 검 끝이 흔들렸고, 일리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휘청거리는 펜드릭의 팔을 잡아챈 일리아는 그의 눈앞에서 마력을 폭발시켰다. 콰광! 하는 소리와 함께 숲이 터져 나갔다.

일리아는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탁한 운무가 가라앉자 반쯤 무릎을 꿇은 펜드릭이 보였다.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지만 내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크윽…….”

일리아는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력의 반을 터뜨린 거였는데.”

어이가 없기는 펜드릭도 마찬가지였다. 일리아는 카일루스도 막아 내는 게 고작이었던 펜드릭의 검을 가볍게 피해 냈다. 심지어는 검을 거두는 타이밍에 맞춰 반격을 하기까지 했다. 마치 그의 검이 어디로, 어떻게 움직일지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탓에 호흡이 흐트러져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펜드릭은 자존심이 상했다.

“검술은 미카엘에게서 배운 건가?”

“맞아. 이게 당신의 검술인 줄은 몰랐지만.”

“정말 소름 끼칠 정도로 닮았군, 그 녀석과.”

비단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일리아와 미카엘은 눈빛도, 말투도, 심지어는 마력과 마법을 운용하는 법까지도 꼭 닮아 있었다. 그 때문일까. 왠지 미카엘에게 지고 있는 것만 같아 펜드릭은 속이 뒤틀렸다.

이를 악문 펜드릭은 다시금 몸을 날렸다. 그러나 결과는 같았다. 일리아는 펜드릭의 검술을 정확하게 읽어 내며 매섭게 반격을 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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