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펜드릭 님.”
그때, 숲의 한쪽에서 제네리아가 절뚝거리며 걸어 나왔다. 그녀는 초조한 듯한 얼굴로 펜드릭에게 말했다.
“기슭 쪽에서 인간들의 기척이 느껴집니다. 아제로스군이 온 것 같아요.”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왜 움직이지 않으시는 거죠? 적은 숫자지만 군대를 매복시켜 놓았습니다. 그들을 동원하면 금방 끝낼 수 있을 거예요.”
제네리아의 말에 펜드릭은 코웃음을 쳤다.
“저딴 인간들을 내가 어떻게 믿고 일을 쳐?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라고.”
제네리아가 아자카산맥에 매복시켜 놓은 인원은 총 삼백 명으로, 그들은 마법사와 기사로 구성된 프노이트 왕국의 정예 군대였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꽤나 악명 높은 군대였지만 펜드릭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그는 평생을 엘리시오와 미카엘, 그리고 칼리파와 함께 보낸 사람이었다. 상대적으로 프노이트군의 실력이 형편없어 보이는 건 당연했다.
펜드릭이 여유를 부리는 게 못마땅했던 제네리아는 불퉁한 얼굴로 재차 말을 꺼냈다.
“저들로 기습을 하면 머릿수라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요?”
“하아, 지금 같은 상황에 기습이 통할 것 같아? 저쪽 지휘관은 바보인 줄 아나?”
“하지만…….”
“그냥 여기나 지키고 있어. 그리고.”
펜드릭이 제네리아의 멱살을 잡아채며 으르렁거렸다.
“내 발목은 잡지 마. 그것들이 나를 방해하면 너도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아제로스군은 매복을 피해 성지로 진군했다. 천여 명의 병사들이 거친 기세를 내뿜으며 병장기를 뽑아 들자 고요하던 아자카산맥이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벌써 여기까지……!”
제네리아는 다급하게 피델리오에게 신호를 했다. 그러자 이곳저곳에 숨어 있던 프노이트군 역시 부리나케 성지로 모여들었다.
“마법사는 거리를 벌리고 후방 지원에 집중해라!”
“절대 물러서지 마!”
잿빛 숲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각기 다른 제복을 입은 병사들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서로에게 검을 꽂았다. 온갖 마법이 하늘을 수놓고, 여기저기서 피가 튀었다.
카일루스는 일리아가 무사한지 빠르게 살피곤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앞에는 어느새 펜드릭이 서 있었다. 꼭 닮은 금빛 눈동자 사이에서 파지직 하고 불꽃이 튀었다.
“황족인가? 엘리시오보다는 칼릭스를 많이 닮았군.”
“그쪽이 내 시조니까.”
“칼릭스의 후손이라고? 그런데 왜…….”
펜드릭은 눈을 가늘게 뜨며 카일루스를 훑었다. 분명 그의 외모는 칼릭스와 비슷했지만 신성만큼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칼릭스는 신성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엘리시오의 동생이면서도 신의 선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일루스의 신성은 엘리시오와 동급,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었다.
“하, 이제는 이놈이라는 말이지…….”
펜드릭의 눈동자가 분노로 타올랐다. 자신이 그렇게 노력할 때는 쳐다도 보지 않더니 고작 칼릭스의 후손에게 이 정도의 신성을 부여하다니. 속에서 무언가가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죽여 버리겠어.”
검집을 바닥에 집어 던진 펜드릭이 카일루스에게 달려들었다. 뒤에서 제네리아가 펜드릭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성지에 관한 것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잊힌 지 오래였다. 펜드릭은 그저 눈앞에 있는 카일루스를 죽이고 싶었다.
두 사람의 검이 허공에서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번쩍이고 피가 튀었다.
카일루스는 펜드릭을 경계하며 손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검을 쥐고 있는 오른손에 할퀸 듯한 상처가 가득했다. 검풍 때문이었다. 검을 제대로 막아 냈음에도 펜드릭의 검에서 매서운 검풍이 따라붙는 바람에 상처가 생긴 것이었다. 카일루스는 쯧, 하고 혀를 차며 검을 고쳐 잡았다.
원래 사람은 감정이 앞설 때 흔들리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펜드릭은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흥분했음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검로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확실히 노련하군.’
카일루스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일리아의 시기적절한 지원과 수적인 우세 덕분에 질 것 같지는 않았다.
‘다치지 말아야 할 텐데.’
한편, 일리아는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마법들을 막아 내며 죽은 병사의 검을 주워 들어 휘두르고 있었다. 마력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카일루스가 대단한 실력자라고는 하나 아직 펜드릭에게는 역부족일 터였다. 그러니 상황을 빠르게 정리하고 그를 도우러 가야 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그렇게 힘들지는 않네.’
어쩐지 몸이 가벼웠다. 전에 지하 동굴에서 클리드의 마력을 받아들였기 때문인 듯했다. 일리아는 괜히 들뜨려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피델리오가 어디……. 아, 찾았다.’
피델리오는 제네리아를 지키며 사방에 세찬 비바람을 뿌려 대고 있었다. 일리아는 바람 장막으로 몸을 보호하며 지체 없이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만났네, 피델리오 플레타.”
일리아의 자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반짝거렸다. 그에 피델리오는 어깨를 움찔 떨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역시 살아 있었군.”
“당연하지. 아직 당신한테 복수도 못 했는데 어떻게 죽겠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죽여 주지!”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마른침을 꿀꺽 삼킨 피델리오는 마력을 끌어올리며 일리아의 마법에 대비했다.
하지만 일리아는 마법을 사용하는 대신 바닥을 박차 순식간에 피델리오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그러고는 당황하는 피델리오의 얼굴에 냅다 주먹을 휘둘렀다. 마력을 실은 일격이었던 탓에 피델리오의 말간 얼굴에서 코피가 터져 나왔다.
“이 미친 여자가!”
“마법사는 역시 육탄전 아니겠어?”
일리아가 짙게 웃으며 손을 털어 냈다. 사방에 휘몰아치던 비바람은 이미 멈춘 후였다.
마법사는 정신이 흐트러지면 마법 또한 유지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일리아가 육탄전을 택한 것이었다. 지난 전쟁에서도 이런 식으로 테멜의 마법사를 붙잡지 않았던가. 마력을 이용한 육탄전은 마력을 최소한으로 사용하면서도 최대한의 효율을 낼 수 있는 일리아만의 전투 방법이었다.
“내가 근접전에 약하다고 생각하나?”
피델리오는 침착하게 거리를 벌리며 검은 비수를 만들어 냈다. 그는 카일루스와도 대적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리아 정도는 손쉽게 해치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게 큰 오산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피델리오는 빠르게 휘몰아치는 검을 겨우 쳐 내며 이를 악물었다. 일리아는 마법 실력만큼이나 검술 실력도 뛰어났으며 전투 센스도 좋았다. 검을 써야 할 때면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두르고, 피델리오가 조금이라도 거리를 벌리려고 하면 바로 마법으로 대응했다.
공격의 전환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워 마치 같은 인간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정말 사기적인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크윽…….”
변칙적인 일리아의 공격에 점차 밀리기 시작한 피델리오는 이를 악물며 성지를 바라보았다.
사실 제네리아에게서 받은 마계의 마력을 사용하면 일리아와 어느 정도는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다. 다만 신성의 영향력 때문인지 마계의 마력이 수증기처럼 정화되어 사라질 뿐이었다. 고심하던 피델리오는 결국 성지 밖으로 일리아를 유인하기로 했다.
피델리오가 숲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자 일리아는 뒤를 힐끔 쳐다보았다. 제네리아의 의지에 따라 마물들이 가세하기 시작하면서 에스테반 부대가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일리아는 피델리오의 기운에 감각을 곤두세우며 전장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빠르게 움직이며 대원들을 꿰뚫는 마물들을 하나씩 처리해 나갔다.
그렇게 수 시간이 지났다. 끝도 없이 이어지던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은 한 남자의 등장 때문이었다.
봉두난발을 하고 성지에 나타난 남자는 축 늘어진 피델리오를 질질 끌고 나오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또 길을 잃었군.”
에스테반 부대와 프노이트군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피로 목욕을 한 것처럼 온통 붉게 물든 그는 맑은 하늘만큼이나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근위대장님!”
한 대원의 외침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맞게 온 건가?”
제논 할스리르사. 그는 현직 근위대장이자 마검사였다.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황제궁에서 나오는 법이 없어 자주 회자되지는 않지만 클리드도 인정하는 실력자였다.
그런 제논이 오랜만에 황성을 나선 이유는 바이에드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바이에드는 제논에게 남부 지역에서 비밀리에 육성하던 마법사 부대를 데리고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그라니체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마법사 부대로, 은밀하게 훈련만 하다 보니 실전 경험이 전무해 이번 기회에 시험해 보고자 한 것이었다. 테멜 왕국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였다.
제논은 은밀하게 다녀오라는 바이에드의 명령에 따라 아제로스 제국의 반을 크게 돈 후에야 남부 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마법사 부대를 데리고 수도로 향하고 있을 무렵, 봉인이 풀려 버렸다.
제논은 밀려들기 시작한 마물들을 베어 내며 걸음을 재촉했지만 마법사 부대는 마물들의 거센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결국 혼자서 황성에 돌아가던 제논은 공교롭게도 아자카산맥 인근에서 길을 잃고 만 것이다. 원래부터 심각한 길치였던 제논은 끊임없이 이어진 전투로 마차도, 말도 잃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보로 이동하다 보니 이렇게 시간이 걸려 버리고 말았다.
일리아는 화색을 띠며 제논에게 다가갔다.
“근위대장님. 마법사단의 부단장, 일리아 그라니체입니다.”
“그래, 그라니체 부단장.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지? 숲에서 이자가 갑자기 나를 공격하기에 일단 응수하긴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군. 자네들은 왜 여기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건가?”
제논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피델리오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피델리오의 말간 얼굴은 엉망으로 쥐어 터진 상태였다. 일리아는 그를 일별하곤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차원의 통로를 막고 있던 봉인이 풀리면서 마족들이 인간계로 넘어왔습니다. 여기뿐만 아니라 황성에서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빨리 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뭐라고!”
제논의 눈에 핏발이 섰다. 씩씩거리며 자세를 다잡은 제논은 기세 좋게 대검을 휘두르며 황성이 있는 방향으로 달렸다.
그가 피델리오를 잡아 와 준 덕분에 분위기가 많이 반전되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제네리아와 펜드릭뿐이었다. 일리아는 숨을 고르며 제네리아에게 향했다.
“이제 끝이에요, 지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