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클리드의 꼬리를 가볍게 피해 낸 칼리파는 할버드를 거세게 찔러 넣어 클리드의 비늘을 무자비하게 부쉈다.
클리드가 황급히 몸을 돌리며 날개를 세차게 펄럭거렸다. 네 장의 날개에서 불어닥친 돌풍이 칼리파를 밀어내며 다시금 숨 막히는 대치 상황이 찾아왔다.
클리드는 칼리파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아래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다행히도 아제로스군의 피해는 크지 않은 듯했다. 오스카를 필두로 한 마법사단과 기마단을 필두로 한 기사단이 방어선을 유지하며 치열하게 전투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나름 쓸모 있는 녀석들이었네.’
클리드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순식간에 날아든 할버드를 쳐 냈다.
“감히 한눈을 팔다니.”
“지금의 너 정도는 눈 감고도 이길 수 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당연하지. 그나저나 펜드릭은 어디 있지?”
“아자카산맥에.”
클리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제네리아나 피델리오는 일리아가 쉽게 이길 수 있을 테니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펜드릭이 함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펜드릭은 무려 클리드에게 검술을 가르친 실력자였다. 일리아나 카일루스가 대적할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제네리아가 하도 불안해해서 두고 왔는데 왜? 과거의 동료가 보고 싶기라도 한 모양이지?”
“…보고 싶기는. 죽이고 싶은 거지.”
“아직도 펜드릭이 엘리시오를 죽인 걸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건가?”
“그 더러운 입에 엘리시오의 이름을 담지 마!”
클리드가 비늘을 곤두세우며 으르렁거리자 칼리파가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펜드릭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클리드의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 짙은 분노 사이에 섞여 있는 감정은 명백한 불안이었다. 칼리파는 할버드를 가볍게 휘두르며 물었다.
“미카엘.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거지?”
“무슨 헛소리야?”
“혹시 아자카산맥으로 가고 있는 인간들 때문인 건가?”
클리드가 날개를 움찔 떨었다.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칼리파는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곡을 찔렀나 보군. 내가 그것도 모를 줄 알았나?”
“…알고 있었다면 왜 아자카산맥으로 돌아가지 않은 거지?”
“이런 것도 가능하니까.”
칼리파의 눈동자가 번뜩이는 것과 동시에 검은 하늘이 우르릉! 하고 거대한 울림을 토해 냈다.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눈치챈 클리드는 황급히 거대한 날개를 펼쳐 황성 위를 가렸다.
그 순간, 사방으로 핏빛 번개가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표적은 비단 황성뿐만이 아니었다. 인간계 전체가 번개의 비에 잠식되어 처참하게 부서져 갔다.
“이 미친놈이…….”
클리드는 날개를 퍼덕거려 마력의 흔적을 털어 냈다. 다행히도 내상은 입지 않았지만 날개가 저릿거려 운신이 힘들었다. 워낙 찰나의 순간에 행해진 공격이라 바로 방어 막을 펼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칼리파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클리드가 날개를 저는 사이에 빠르게 거리를 좁힌 그는 할버드를 힘껏 휘둘러 클리드의 한쪽 날개를 베어 냈다. 길쭉하게 그어진 자상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뇌리를 파고드는 고통에 이를 악문 클리드는 서둘러 날개를 치유했다. 하지만 칼리파는 클리드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할버드와 핏빛 번개가 번갈아 가며 클리드의 전신을 타격했고, 결국 그는 중심을 잃고 황녀궁에 처박히고 말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궁이 무너져 내리자 주변에 포진해 있던 병사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크윽…….”
“마계의 힘은 곧 내 힘이야. 두 차원이 이어져 있다는 것을 간과한 모양이지.”
“어쩐지 여유를 부리더니만…….”
“얼른 일어나, 미카엘. 네가 얼마나 처절하게 발버둥 칠지 벌써부터 기대되는군.”
칼리파의 붉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 * *
한편, 서문을 통해 황성을 벗어난 에스테반 부대는 아자카산맥에 도착하기도 전에 의외의 장소에서 고전하고 있었다. 바로 안타르라는 도시였다.
안타르는 수도의 서쪽에 있는 도시로, 건물이 적고 주변의 산세가 수려하여 귀족들 사이에서 각광받는 휴양지였다. 물론 지금은 마족들이 들쑤시고 다닌 탓에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지만.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라, 누군가가 안타르 전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을 걸어 놓았다는 것이었다.
일리아는 안타르 안에 발을 들이고 나서야 안타르에 환각 마법진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주위가 묘하게 왜곡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는 거지?”
마법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마법진을 지탱하고 있는 마력의 근원을 파괴하거나 시전자를 죽여야만 했다. 하지만 이처럼 환각으로 가득한 공간 안에서 그것들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내로라하는 마법사인 일리아조차도 말이다.
가만히 서서 머리를 굴리던 일리아는 ‘이럴 줄 알았으면 오라버니한테 이것저것 물어보는 건데!’ 하고 후회했다.
마력의 근원을 이용한 마법진의 구축은 고대 룬어의 해독법처럼 현재는 실전된 과거의 산물이었다. 그라니체 가문의 지하 서고에 있는 고서에도 마력의 근원을 파괴해야 한다는 것만이 적혀 있을 뿐 마법진이 작동하는 원리나 구성에 관해서는 전혀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즉, 일리아는 지금 출구 없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다름없다는 소리였다.
“하아, 이제 와서 후회하면 뭐 하겠어. 일단은 수색이나 해 보자.”
일리아는 마력의 근원을 찾기 위해 몇 번이나 탐지 마법을 시전했다. 하지만 사방이 마력으로 가득 차 있어 어느 한 곳을 특정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의미 없이 부서진 도시만 빙빙 돌던 일리아는 이내 바닥에 주저앉으며 분을 터뜨렸다.
“어떤 미친 작자가 이딴 걸 도시 한복판에 만들어 놓은 거야!”
한참 동안 분을 터뜨리고 나니 기분이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다. 일리아는 후우, 하고 숨을 길게 토해 냈다. 지금은 괜한 곳에 힘을 빼기보다는 탈출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일리아는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때, 반쯤 부서진 건물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일리아는 귀를 쫑긋 세우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공간이 바뀌었다. 일리아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부서진 성벽과 시신의 탑이었다. 바닥은 피로 가득했고, 부러진 검이 말라비틀어진 팔처럼 사방에 꽂혀 있었다. 일리아는 이 모든 게 환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일단 더 가 보자.’
일리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성안으로 들어섰다. 외성 안은 바깥보다 상황이 더욱 심각했다. 일 년이 넘도록 전쟁터에 있었던 일리아도 쳐다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주먹을 꾹 쥐며 고개를 돌린 일리아는 빠르게 달려 내성 안쪽으로 향했다.
“맙소사…….”
일리아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입을 틀어막았다. 황녀궁의 지붕에 이리저리 난도질당한 드래곤 한 마리가 추욱 늘어져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터져 나온 피가 일리아의 발치까지 밀려왔다. 검붉은 피에서 익숙한 마력이 느껴졌다.
“오라버니…….”
“네가 미카엘의 혈육이군.”
일리아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드래곤의 시신 위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피보다 더욱 붉은 눈동자가 뇌리에 아프도록 박혀 들었다.
“당신은…….”
“칼리파. 인간들이 마왕이라고 부르는 존재지.”
일리아는 덜덜 떨리기 시작한 손을 내리며 주먹을 꾹 쥐었다.
“당신이 오라버니를 죽인 거야?”
“쉽지 않은 상대였어. 간단히 죽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칼리파가 할버드를 가볍게 휘둘러 도끼날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이제 너 하나만 죽이면 끝이야.”
“그게 무슨…….”
칼리파가 할버드 끝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일리아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시신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레이븐, 엘레나 그리고 카일루스.
일리아는 충격에 눈을 부릅떴다. 몸이 덜덜 떨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모든 것이 환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이미 잊힌 지 오래였다. 일리아가 시신들을 보고 동요한 순간, 마법진의 마력이 그녀의 정신에 침투하여 감각을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일리아에게 남은 것은 칼리파에 대한 극심한 공포와 절망뿐이었다.
“이제 너도 사라져 줘야겠어.”
칼리파가 일리아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어둠과도 같은 마력도 일리아를 집어삼킬 것처럼 더 맹렬히 마수를 뻗어 왔다.
일리아는 주저앉은 채로 몸을 뒤로 물리며 이런저런 공격 마법을 흩뿌렸다. 그러나 그녀의 마법은 칼리파에게 닿지 않았다. 마력을 아무리 퍼부어도 허공에서 흐릿하게 사라지기만 할 뿐이었다.
일리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등 뒤로 차가운 돌벽의 감촉이 느껴졌다.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칼리파…….”
“네 가족들 곁으로 보내 주마.”
칼리파가 할버드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일리아의 목걸이에 달린 핏빛 보석이 잘게 떨렸다. 일리아는 보석을 움켜쥐며 눈을 감으려다 문득 이상한 점을 떠올렸다.
클리드가 만든 이 아티팩트는 착용자의 위험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일리아의 목숨이 위태로운 이런 상황에서도 목걸이는 잘게 떨리기만 할 뿐 마법을 발동시키지는 않았다.
그 말은 곧, 눈앞에 있는 이가 일리아의 신변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하, 당할 뻔했네.”
“뭐라고?”
일리아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상대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정신을 잠식하던 두려움 역시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나한테 저딴 환상을 보여 준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일리아의 몸을 중심으로 푸른 마력이 거세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거센 바람 안에서 파직거리며 불꽃이 튀었다.
“마력의 근원이 있을 만한 곳을 다 부숴 버리면 그만이지.”
카일루스나 다른 병사들도 말려들게 되겠지만 일단은 마법진을 부수는 게 우선이었다.
강력한 마력이 마법진을 당장이라도 찢어발길 듯이 요동치자 칼리파가 당황스러워하는 얼굴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잠깐만! 여기서 그런 규모의 마법을 썼다가는 다른 인간들도 모두 죽게 된다고!”
“너만 죽일 수 있으면 상관없어.”
“이, 이런 미친!”
칼리파, 아니, 칼리파의 형상을 하고 있던 마족은 부리나케 마법진을 해제했다. 그와 동시에 은빛 검날이 날아들어 마족의 가슴을 꿰뚫었다. 허물어지는 마족의 뒤로 검은 머리카락이 나부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