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 * *
“화살이 떨어져 갑니다!”
“창병, 교대!”
“기름 좀 가져와!”
혼란스러운 바깥만큼이나 성벽 위도 분주하기 그지없었다. 마왕군을 내성으로 유인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머릿수를 줄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드래곤의 영혼이 대기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었다. 최대한 전력을 감소시켜 전투를 조금이라도 더 수월하게 이끌어야만 했다.
“부상자는 신속하게 뒤로 물러나라! 절대 틈을 줘서는 안 돼!”
치열한 공방전은 며칠이나 계속되었다. 아제로스군의 강력한 저항에 마족들은 욕지거리를 외치면서도 발리스타의 사정거리 밖으로 전선을 물렸다.
아제로스군 입장에서는 다행인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고작 며칠을 싸웠을 뿐인데 준비해 두었던 발리스타의 화살을 절반 가까이 소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왕군의 수는 여전히 까마득했다. 다시금 밀려들기 시작한 마족들은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끊임없이 성벽을 두드렸다.
그렇게 마족들의 공성전이 시작된 지 한 달이 되던 날, 에스테반 부대가 서문을 통해 황성을 벗어났다는 연락이 왔다. 그에 병사들은 전쟁이 금방 끝날 수도 있겠다는 희망에 젖어 들었고, 그것은 토드 백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절대 쓰러지지 마라!”
“와아아아아!”
토드 백작은 병사들을 독려하며 외성의 방어를 더욱 견고히 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노력도 순리를 거스르는 힘 앞에서는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콰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흩날렸다. 지지부진한 대치 상황을 견디다 못한 칼리파가 직접 손을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토드 백작은 사색이 되어 퇴각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재앙과도 같은 검붉은 마력은 단 두 번 만에 외성 성벽을 허물었고, 급하게 후퇴하던 토드 백작과 아제로스군을 한 번에 집어삼켰다.
켈른산맥의 마정석은 칼리파에게 있어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날아드는 무기들을 대충 쳐 낸 칼리파는 외성 안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왕군 역시 칼리파의 뒤를 따라 외성 안으로 진입했다.
그들은 웅장한 궁들을 자비 없이 쳐부수며 자신들의 힘을 과시했다. 하지만 애초에 외성의 병력은 성벽 수비대가 전부였던지라 모든 궁을 부숴도 인명 피해는 나오지 않았다.
칼리파의 무심한 시선이 내성 쪽으로 향했다.
“어차피 죽는 건 매한가지인 것을.”
칼리파는 부서진 건물의 잔해를 짓밟으며 내성 쪽으로 다가갔다.
내성 망루에 서서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테오도르는 무심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더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칼리파는 감히 인간이 대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렇게 강렬한 존재감은 난생처음이었다.
테오도르의 심장이 쿵쿵거리며 거센 울림을 냈다. 칼리파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신성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자신의 숙적이 다시금 이 땅에 나타났다는 것을 알리는.
‘저게 약해진 거라니.’
테오도르는 새삼 이사벨라가 존경스러워졌다. 아무리 신의 가호를 받았다고는 하나 저런 존재와 맞설 생각을 하다니. 수백 년 전의 인간계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저런 걸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군.’
카일루스는 아자카산맥까지 대략 보름 정도가 소요될 것 같다고 했다. 직선으로 주파하면 하루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지만 서쪽으로 크게 돌아 이동해야 했기에 넉넉하게 잡은 것이었다.
즉, 지휘관을 잃은 황성 수비대가 무려 보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마왕군의 발을 묶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작전을 세울 때까지만 해도 테오도르는 자신에 가득 차 있었다. 수만의 아제로스군에 무려 드래곤의 영혼도 있지 않던가. 요새의 이점을 살리면서 전투를 치른다면 마왕을 죽이고 마족 자체를 멸족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테오도르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건 절대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테오도르는 주먹을 꾹 쥐며 몸을 돌렸다.
* * *
테오도르와 이사벨라가 황제궁에 몸을 숨기고 불과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마왕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선두에 선 칼리파는 외성을 부술 때와 마찬가지로 내성 벽에 거대한 마력 폭발을 일으켰다. 하지만 돌벽은 잘게 흔들리기만 할 뿐 부서지지 않았다.
칼리파는 공격을 멈추고 내성 벽을 훑었다. 마력의 흐름이 이상하다 했더니 성벽 전체에 얇은 방어 막이 겹겹이 펼쳐져 있었다. 아무래도 칼리파의 공격을 버티기 위해 인간 마법사들이 교대로 방어 마법을 펼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칼리파의 검은 눈동자에 호기심이 일었다. 고작 인간들의 마력으로는 칼리파의 마력을 막아 낼 수 없었다. 마력의 상성상 우위는 절대적이었으니까.
하지만 방어 막에 흐르는 묘한 기운이 칼리파의 마력을 방해하고 있었다. 드래곤과 유사하면서도 상당히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드래곤의 후손인가.”
금세 흥미를 잃은 칼리파가 더욱 큰 마법을 준비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성문이 열렸다.
“와아아아아!”
내성 안에서 아제로스군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지휘관인 토드 백작이 전사했음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도리어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무기를 휘둘렀다.
“드래곤의 가호가 우리를 보호할 것이다! 전군 진격하라!”
오스카의 목소리가 우레와 같은 함성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렸다. 그는 마법사단을 직접 지휘하며 전장의 한복판에 섰다. 분홍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어지러이 휘날렸다.
“절대 물러서지 마!”
전장에 직접 나선 것은 오스카뿐만이 아니었다. 상아색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 묶은 크리스틴 역시 은빛 검을 뽑아 들며 말을 몰았다.
“기마대는 나를 따른다!”
기마대장이 창을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그에 크리스틴을 비롯한 기마대는 그를 따라 전장을 종횡무진 누비며 마족과 마물을 베어 냈다.
켈른산맥의 마정석으로 제련한 무기들은 마족들에게 쉽게 치명상을 입혔고, 전세는 수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던 아제로스군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 건방진 인간들이!”
그때, 방어에 급급하던 가나슈가 마물을 방패로 삼더니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다. 그러고는 그것을 허공에 흩뿌리며 수인을 맺었다.
작은 핏방울이 붉은 운무가 되어 점차 몸집을 불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집채만 해진 운무는 곧 거대한 괴물로 화했다.
“크와아악!”
괴성을 내지른 붉은 괴물은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눈앞에 있는 모든 이들을 집어삼켰다. 마족도, 마물도, 인간도 괴물 앞에서는 그저 싱싱한 사냥감에 불과했다. 그만큼 괴물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가나슈는 괴물의 등에 훌쩍 올라타며 마족들을 지휘했다.
“물러서지 마! 그땐 내가 죽여 버릴 테니까!”
“이런 야만적인 마법은 처음 보는군.”
괴물이 아가리를 벌리며 병사들을 집어삼키려던 때였다. 오스카가 그들의 앞을 막아서더니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돌연 눈보라가 휘몰아치며 괴물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이런 같잖은 마법으로 감히!”
가나슈의 노성에 괴물이 포효를 내지르며 손을 뻗었다. 길게 자라난 손톱이 당장이라도 오스카를 꿰뚫을 것처럼 엄습해 왔다.
하지만 날카로운 손톱은 눈보라와 맞닿자 처참하게 깨졌다. 그저 눈송이인 줄만 알았던 하얀 결정들 하나하나가 전부 압축된 마력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나슈는 황급히 괴물을 뒤로 물렸지만 눈보라가 거대한 원을 그리며 휘몰아치고 있어 쉽사리 도망치지 못했다.
“이게!”
“전하께서 좋은 걸 빌려주셨거든. 꽤 효과 있네.”
오스카가 방긋 웃으며 양손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빛을 잃은 마정석들이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이게 뭔지 알아?”
“알 게 뭐야! 죽여 버리겠어!”
단검을 손에 든 가나슈가 손바닥을 크게 베었다. 자상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떨어지면서 허공에 또 다른 괴물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가나슈의 의지에 따라 눈보라에 몸을 부딪쳤다. 수많은 눈송이가 연달아 폭발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켈른산맥의 마정석을 이용해 펼쳐 낸 마법은 가나슈의 마법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마정석을 이런 식으로도 이용할 수 있다는 건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젠장!”
“좋은 실험이 되었어. 이제 지체할 필요가 없겠군.”
오스카가 몸을 물리며 신호하자 내성 성벽에서 푸른 화살 비가 쏟아져 내렸다. 푸른 화살은 하나하나가 옅은 드래곤의 마력을 품고 있었다.
“으아아악! 이 버러지 같은 인간이!”
눈보라 역시 사방으로 몰아치며 근처에 있던 마족들을 전부 휩쓸고 지나갔다. 가나슈와 괴물이 재로 화하고, 동시에 여기저기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전장의 한복판에 선 칼리파는 얼떨떨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마족이 죽거나 다쳤다.
후대의 인간들이 이렇게까지 준비를 많이 했을 줄은 몰랐던 터라, 칼리파는 순간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칼리파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왠지 즐거워졌다.
“시시할 줄 알았는데.”
칼리파가 하늘로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허공에서 짙은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거대한 형상이 나타났다. 네 장의 날개와 긴 뿔을 가진 은빛 드래곤이었다.
“칼리파!”
클리드가 거센 포효를 터뜨리자 칼리파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미카엘. 살아 있었군.”
“이번에는 확실히 마무리를 지어 주지.”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사냥해 주겠어.”
칼리파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자 그의 주변으로 핏빛 번개가 내리꽂혔다. 거대한 마력을 머금은 번개가 검은 하늘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고, 곧 칼리파의 신형을 그물처럼 휘감았다.
핏빛 번개를 갑옷처럼 두른 칼리파는 지금까지와 차원이 달랐다. 감히 쳐다보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로 짙은 어둠이 느껴졌다.
그러나 클리드는 겁을 먹기는커녕 코웃음까지 쳐 가며 칼리파를 도발했다.
“확실히 약해졌군, 칼리파.”
“그건 네놈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너보다는 덜하지. 난 너처럼 부상을 입은 게 아니니까.”
“그런 내게 목숨을 빼앗기면 그만한 수치가 없겠군.”
“그럴 일은 절대 없어!”
클리드가 마력을 끌어올리자 허공에 거대한 얼음 창이 생겨났다. 하나둘씩 수를 늘려 가기 시작한 얼음 창은 이내 수십에 달했고, 클리드의 의지에 따라 빠르게 칼리파에게 날아들었다.
칼리파는 매섭게 날아드는 얼음 창을 손으로 가볍게 쳐 냈다. 그가 쳐 낸 얼음 창들이 바닥에 떨어지며 수많은 이들을 죽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그래. 이래야 사냥할 맛이 나지.”
칼리파는 번개로 만든 할버드를 손에 쥐고 클리드에게 몸을 날렸다. 클리드가 할버드를 손톱으로 쳐 내며 꼬리를 휘둘렀지만 체구가 작은 칼리파를 맞히기는 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