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89)화 (89/101)

89화 

일리아가 넌지시 세실라에 관해 물어보자 클리드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거. 사실 나도 잘 몰라.”

“모른다고?”

“원래 세실라는 자아가 없어야 해. 내가 그렇게 설정했으니까. 그런데 일리아 너와 함께 지내면서 세실라에게 조금씩 의식이 생기기 시작했어. 지금은 내 명령마저 뒷전으로 할 정도로 고집도 생겼고 말이야.”

“그게 가능한 거야?”

“불가능하지는 않아. 내 분신이 내 통제를 벗어나서 인간 여자와 관계를 맺었던 것처럼 세실라도 네게서 무언가를 느꼈던 거겠지.”

일리아는 배시시 웃던 세실라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유독 일리아의 앞에서만 감정을 드러내곤 했었다.

그때는 그저 ‘내가 제일 편한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설마 이런 이유가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일리아는 앞으로 세실라에게 더 잘해 주리라 마음먹으며 책임감을 불태웠다.

“지금은 들어가면 안 돼! 이리 와!”

그렇게 클리드의 고백이 일단락되고,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돌연 응접실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어렴풋하게 야옹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사샤가 말썽을 피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가 나가 볼게요.”

소파에서 일어난 일리아가 응접실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와 동시에 주홍색 드레스 자락이 나풀거리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일리아의 품에 뛰어들려던 사샤를 누군가가 잡아챈 것이었다. 일리아는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곤 눈을 세차게 깜박거렸다.

“랜더 영애?”

“…그라니체 영애. 조금 소란스러웠죠?”

“네, 뭐……. 그런데 이건 무슨 상황이에요? 랜더 영애가 왜 여기 있어요?”

“그게…….”

“종종 사샤를 돌봐 주고 있거든.”

소피아가 우물쭈물거리는 사이 엘레나가 응접실에서 나오며 말했다.

“사샤를 돌봐요?”

“그래. 전에 사샤가 무료한 것인지 도통 힘을 쓰지 못해서 정원으로 산책을 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랜더 영애와 만났단다. 사샤가 랜더 영애를 아주 잘 따르더구나.”

일리아는 가드너 가문의 파티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도 사샤는 소피아의 품에 뛰어들어 막무가내로 애교를 부렸었다. 당시에는 사샤가 소피아의 복잡한 감정을 읽었기에 그렇게 어리광을 부린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그냥 소피아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황태자 전하께 말씀드려 랜더 영애가 황제궁에 출입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단다. 덕분에 사샤도 활기를 되찾았지. 신물 제작에도 더욱 몰두하게 되었고.”일리아가 묘한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자 그녀의 어깨가 한껏 움츠러들었다.

“그라니체 영애가 내키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오지 않을게요.”

“아니에요. 그런 의미로 본 게 아니었어요. 그냥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랜더 영애를 여기서 볼 줄은 몰랐어서요.”

“저로 인해 사샤가 힘을 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와야죠.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돕고 싶어서요.”

한껏 움츠러든 어깨와 달리 소피아의 눈빛은 올곧기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랜더 저택에서 그 난리를 겪으면서 무언가 큰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사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요, 랜더 영애. 그럼 조금만 더 고생해 줘요.”

“…고맙긴요.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이따 봬요, 백작 부인.”

“야오옹!”

사샤가 일리아를 바라보며 울부짖었지만 소피아는 지체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럼 저도 이만 가 볼게요. 이럴 때 쉬어 둬야죠.”

“그래. 푹 쉬거라, 일리아.”

가족들과 인사를 나눈 일리아는 곧장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냅다 침대에 엎어졌다. 그동안 부단장실 안에 있는 소파에서만 잠을 청한 탓에 푹신한 침대가 너무나도 그리웠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에나가 잔소리를 하러 들어오리라는 것을 잘 알았지만 일리아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자야지…….”

일리아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마음이 편하기 때문인지 금세 잠이 쏟아졌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떠날 준비를 마친 국민들은 아베르타 부대의 호위를 받으며 라플라드로 향했다.

라플라드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걸음을 서두른다고 해도 한 달 이상이 소요될 듯했다. 인원이 지나치게 많아 도보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와 노약자를 위한 마차가 준비되어 있기는 했지만 걷는 이들과 열을 맞춰야 했으니 속도가 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그사이 클리드는 육체가 본래의 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아주 천천히 힘을 거두어들였다.

아이기스에 관해 알지 못하는 마왕군은 그저 드래곤의 마력이 고갈되었다고밖에 생각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 방심을 잘만 노린다면 기선 제압은 확실히 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군.”

망루에 선 클리드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마왕군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수도에 진입하는 것조차 주저하던 그들이 아이기스의 마력이 옅어지자 과감하게 전선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일반 병사들마저 그들의 모습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여기 있었어?”

클리드의 뒤를 이어 이사벨라가 망루에 올랐다. 그녀는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클리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기스가 사라지면 저들이 네 마력을 느끼고 미리 대비하지 않을까?”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어.”

“칼리파가 약해졌기 때문에?”

“그래. 이렇게 보니까 확실히 알겠어. 칼리파의 상태가 꽤 심각한 모양이야.”

“내가 제대로 몰아붙이기는 했지.”

이사벨라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자 클리드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맞아. 제대로 몰아붙였지. 펜드릭만 아니었다면 확실하게 끝을 낼 수도 있었을 거야. 그렇지?”

“내가 펜드릭이 배신할 줄 알았나, 뭐.”

“그러니까 말릴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그 자식, 진짜로 죽여 버릴 거니까.”

“알겠어. 네 마음대로 해. 오라버니만 지켜 준다면 네가 뭘 하든 막지 않을게.”

“황태자는 세실라가 지킬 거야. 내가 살아 있는 한 세실라도 죽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사실 세실라는 일리아와 함께 에스테반 부대에 속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토드 백작이 황성 수비대의 총사령관을 맡게 되면서 테오도르의 호위 자리가 비고 말았다. 그래서 클리드가 세실라를 테오도르의 호위로 붙인 것이었다.

클리드는 새삼 할스리르사 후작의 부재가 아쉬워졌다. 할스리르사 후작은 아제로스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남다른 자였다. 어떠한 명령이라도 군소리 없이 따를 정도로 말이다. 만약 그가 황성에 남아 있었다면 목숨을 다해서라도 테오도르를 지켰을 것이었다.

클리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할스리르사 후작이 기적적으로 생환하는 상상을 했어.”

“나랑 똑같네. 나도 방금 그런 상상을 하던 참이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클리드가 이사벨라를 내려다보았다.

“테오도르 옆에 딱 붙어 있어. 괜히 나서다가 다치지 말고.”

“알겠어. 걱정하지 마. 오라버니와 세실라 옆에 딱 붙어 있을게.”

“믿을게. 그나저나 여기 더 있을 거야?”

“아니. 내려가자!”

클리드는 마왕군을 노려보다 이내 몸을 돌렸다.

* * *

어둠이 내려앉은 깊은 동굴 안.

칼리파는 검은 눈동자를 들어 올려 허공을 바라보았다. 멀리서도 확연하게 느껴지던 드래곤의 마력이 며칠 사이에 눈에 띄게 옅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희미했다. 수도 근처에는 여전히 불쾌한 마력이 가득 차 있겠지만 드래곤의 영향력이 이만큼이나 줄어들었다는 것은 마왕군에 있어 낭보였다.

“칼리파 님.”

한참 상념에 잠겨 있는데 한쪽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리파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제네리아.”

“라기에 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수도로 진군 중이라고 하십니다.”

“나도 슬슬 움직일 때가 되었군.”

칼리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잠들어 있던 검붉은 마력이 기지개를 켜듯이 엄청난 존재감을 발산했다.

전신을 짓누르는 묵직한 기운에 제네리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펜드릭은 분명히 칼리파의 몸 상태가 예전과 같지 않다고 했다. 기껏해야 원래 힘의 반절 정도밖에 사용하지 못할 거라고. 그 말을 듣고 내심 실망했었는데, 이렇게 칼리파의 마력을 가까이서 접하고 나니 제네리아는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아자카산맥에 수색대가 왔던 일 때문이었다. 그들 역시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차원의 통로를 다시 봉인하기 위해서는 신검의 힘이 깃든 성지에서 봉인 의식을 치러야 하며, 이곳 아자카산맥이 바로 그 성지라는 사실을.

‘테오도르가 살아 있는 거야.’

제네리아와 아자카산맥의 연관성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테오도르뿐이었다. 분명 아이기스에 숨겨 두었던 그녀의 마력을 소멸시킨 사람이 수를 쓴 것일 터였다.

테오도르의 상태가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서 그가 군대를 보내리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칼리파 님, 아무래도 이곳에 남아 계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그들이 성지의 존재를 아는 것 같아요. 이곳을 지켜야만 인간계를 지배하실 수 있습니다.”

“아니. 난 황성을 무너뜨려야만 한다. 엘리시오의 흔적을 모두 부수는 것만이 내 목적이니까.”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함정이어도 상관없어. 다 죽이면 그만이니까.”

칼리파는 푸석푸석한 제네리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대신 펜드릭을 남기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부디 무사히 다녀오시기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제네리아를 일별한 칼리파가 천천히 동굴을 나섰다. 그가 새카만 하늘 아래 서자 동굴 밖에 있던 펜드릭이 말을 걸어왔다.

“나도 같이 가.”

“아니. 넌 이곳을 지켜.”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인간 부대 정도는 여기 있는 녀석들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일단은 이곳을 지켜. 인간 부대를 모두 죽인 이후에 합류하는 건 눈감아 주지.”

“하아, 알겠어.”

칼리파는 말을 타고 느긋하게 수도로 향했다. 그렇게 며칠을 이동해 마왕군 진지에 도착하니 가나슈가 황급히 달려와 그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칼리파 님.”

“확실히 많이 약해졌군.”

“네. 보름 정도면 공격을 개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름이라.”

칼리파는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황성을 올려다보았다. 불투명한 아이기스 너머로 어렴풋하게 신성이 느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