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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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로스군은 총 세 개의 부대로 재편성되었다. 테오도르는 각 부대의 이름을 아베르타, 토드, 에스테반으로 명명하고 빠르게 명령을 하달했다.
아베르타 부대는 라플라드로 대피하는 제국민을 호위하고, 토드 부대는 근위대와 함께 황성을 수호하며, 에스테반 부대는 성지 탈환을 위한 단독 작전을 수행한다.
일리아는 지난 테멜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토드 부대에 배속되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난 오늘 아침, 갑자기 소속이 변경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에스테반 부대로 가라고?”
공문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일리아는 이내 그것을 들고 단장실로 향했다.
“단장님.”
“무슨 일이야?”
일리아는 오스카에게 공문을 척 내밀었다.
“전속 명령을 받았는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아, 그거. 황태자 전하의 명령이야.”
“황태자 전하요?”
오스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래. 아무래도 전투가 벌어질 것을 염두에 두신 것 같아.”
그란디아의 눈물은 신성에 의해 보호받고 있어 웬만한 힘으로는 부술 수 없었지만 레이븐과 테오도르의 피는 달랐다. 피가 담긴 유리병을 단단히 봉인한다고 해도 상대적으로 보호 체계가 약하기 때문에 유실되거나 오염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래서 테오도르는 일리아를 에스테반 부대로 전속시킨 것이었다. 방어 마법에 일가견이 있는 일리아에게 봉인의 열쇠를 지키게 하고, 여차하면 그녀의 피를 대체제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말이다. 황족의 피 역시 카일루스가 대체할 수 있었으니 두 사람이 함께한다면 설령 유리병이 파손된다고 한들 봉인 의식을 치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일리아의 전속으로 토드 부대의 전력이 어느 정도 감소하기는 하겠지만 그것 역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황성에는 드래곤의 영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전쟁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라 에스테반 부대가 차원의 통로를 봉인하는 동안 마왕군을 붙잡아 두는 것이었다. 그러니 전력을 황성에 집중하기보다는 아자카산맥으로 분산하여 봉인 의식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게 더욱 중요했다.
오스카의 말이 끝나자 일리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정 불안하면 부단장의 경험담이라도 단원들에게 전해 줘. 그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단장실을 나선 일리아는 부단장실로 돌아와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출발해야겠네.”
오늘은 클리드와 황제궁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일리아는 나갈 채비를 하며 답지 않게 초조해하던 클리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대체 할 말이 뭘까.’
당시 클리드의 얼굴은 깊게 그늘져 있었다. 필시 예삿일은 아닐 터였다. 일리아는 클리드가 무슨 말을 하든 담담하게 들어 주리라 다짐하며 마법사단 본부를 나섰다.
오랜만에 온 황제궁은 여전히 고요했다. 거대한 규모와 달리 궁 안에 기거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그라니체 가문의 식솔들과 하인들, 그리고 검증된 근위대원 십여 명이 다였다.
테오도르는 모든 위험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황제궁에 시종조차 배치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라니체 가문의 하인들이 있었기에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말이다.
일리아가 넓은 복도를 지나 응접실 앞에 다다르자 문 앞에 서 있던 로레인이 꾸벅 인사를 했다.
“오셨어요, 아가씨.”
“오라버니는?”
“안에 계세요. 다들 모이셨으니까 얼른 들어가 보세요.”
“다들 모였다고?”
일리아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자 로레인이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클리드 님의 안색이 엄청 안 좋으세요. 아무래도 심각한 이야기를 하시려나 봐요.”
“…그래?”
“놀라지 않게 마음의 준비라도 단단히 하고 들어가세요.”
“알겠어. 알려 줘서 고마워, 로레인.”
일리아는 작게 심호흡을 한 후에 응접실 문을 열었다. 조용한 응접실 안에는 클리드와 레이븐, 그리고 엘레나가 앉아 있었다.
일리아는 소파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클리드의 얼굴을 살폈다. 로레인이 말했던 대로 클리드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정말 심각한 일인 건가?’
조심스럽게 클리드의 옆에 앉은 일리아는 모른 척 말문을 뗐다.
“다들 모여 계셨네요?”
“네 오라비가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말이다. 몸은 괜찮니, 일리아? 잠은 잘 자고 있고?”
“전 괜찮아요. 잠도 잘 자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그럼 일리아도 왔으니까 이제 말해 보거라, 클리드.”
모두의 시선이 클리드에게 향하자 그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심지어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눈치를 살피기까지 했다.
차원의 통로에 균열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할 때도 태연했던 클리드가 이렇게 망설이는 모습은 처음 보는 터라, 일리아는 의문보다 걱정이 앞섰다.
“오라버니,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심각한 일이야?”
“그게…….”
“괜찮으니 어서 말해 보거라.”
가족들의 다정한 눈빛에 클리드는 한숨을 푹 내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숨겨 왔던… 진실에 관해서입니다.”
“진실이라고?”
“많이 놀라실 거라는 것도 알고 받아들이기 힘드실 거라는 것도 알지만,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는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클리드는 떨리는 손을 맞잡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사실…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니라니?”
“제 진명은 미카엘입니다. 그라니체 가문의 시조이자 엘리시오와 함께 마족을 토벌했던 드래곤이죠.”
클리드는 엘리시오가 죽은 이후로 자신이 어떻게 그라니체 가문의 명맥을 유지해 왔는지 전부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네 정체가 사실은 드래곤이고, 지금까지 영혼을 나누어 그라니체 가문을 운영해 왔던 거라고? 그럼 버논 형님도…….”
“그건 저였습니다. 당시의 그라니체 백작이 제 분신이었고요.”
“그럴 수가! 형님께서는 영지로 요양을 떠났다가 지병이 악화되어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버논 그라니체로서의 삶을 포기한 건… 아버지를 조금 더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클리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안개처럼 흐릿하긴 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미소였다.
“제 영혼에서 태어난 존재들은 전부 제 통제를 받았지만 아버지만은 달랐습니다.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릅니다.”
“클리드…….”
“일리아마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짜릿하기까지 하더군요. 정말로 가족이 생긴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치밀하게 숨겼습니다. 정체를 들키게 되면 다들 이전처럼 저를 대하지는 못하게 될 테니까요.”
클리드가 미소를 지우며 고개를 숙이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엘레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클리드.”
서늘한 엘레나의 목소리에 클리드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네, 어머니.”
“정말 실망스럽구나. 이런 중대한 사실을 이제야 이야기하는 것도, 네 정체가 무엇인지에 따라 우리의 태도가 바뀔 거라고 생각한 것도. 전부 다 실망스러워.”
“어머니…….”
“그래. 난 네 어머니다. 그건 네가 드래곤이라고 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지.”
고개를 한껏 치켜든 엘레나는 본격적으로 클리드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조곤조곤하게 몰아치는 잔소리의 폭풍에 안 그래도 주눅 들어 있던 클리드의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수백 년 동안이나 아제로스 제국을 지켜 온 드래곤이 고작 어머니의 잔소리에 쩔쩔매는 꼴이라니. 일리아는 웃음을 참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적당히 봐줘야 하나.’
사실 일리아는 드래곤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다. 그만 아니었어도 피델리오에게 끌려가 산 채로 피를 뽑히는 일은 없었을 것이 아닌가. 그때는 드래곤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죽어서 만나게 된다면 한 대 쥐어박아 주리라 다짐했을 정도로.
그러나 막상 클리드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화가 나기는커녕 일말의 원한마저 사그라드는 듯했다. 지금까지 정체를 속여 온 것이 괘씸하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먼저 말해 줘서 고마웠다.
일리아는 ‘그래. 나라도 오라버니의 편이 되어 주자.’ 하고 생각하며 엘레나의 잔소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아무튼, 앞으로는 뭐든 숨김없이 이야기하도록 해. 그게 네 정체에 관한 것이든 뭐든.”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사과는 됐다. 고개 들어.”
말을 마친 엘레나는 아까부터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클리드를 바라보고 있던 레이븐의 손을 붙잡았다.
“당신도 할 말 있으면 하세요.”
그에 레이븐이 엘레나의 손을 마주 잡으며 말문을 열었다.
“클리드, 솔직히 많이 놀라긴 했지만 네 어머니의 말마따나 넌 내 아들이자 일리아의 하나뿐인 오라비다. 그러니 가족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단다.”
“아버지…….”
“오히려 네가 드래곤이면 더 잘된 게 아니냐. 앞으로는 더 많은 일을 맡겨도 될 테니까. 그동안 난 네 어머니와 오붓한 시간이라도 보내야겠구나.”
레이븐이 장난스럽게 웃자 그제야 클리드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러셔도 됩니다. 전쟁이 끝나기만 하면 앞으로는 계속 한가할 테니까요.”
“그것 참 고맙구나. 그럼… 일리아, 너도 할 말이 있으면 하거라.”
이번에는 모두의 시선이 일리아에게 향했다.
“할 말이 뭐가 있겠어요. 잘난 오라버니가 더 잘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인걸요.”
“일리아……!”
클리드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일리아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귓가로 훌쩍거리는 생소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동안 정체를 숨기느라 클리드가 마음고생을 꽤나 심하게 한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클리드의 등을 가볍게 토닥거렸다.
“너무 신경 쓰지 마. 말하기 힘들었을 거라는 거 잘 알아. 그러니까 이해할 수 있어.”
“고마워, 일리아.”
클리드를 떼어 낸 일리아는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바로 세실라에 관한 것이었다.
전에 세실라가 해 주었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선대 그라니체 가문의 가주들처럼 클리드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클리드의 통제를 받으면서도 확실한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