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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87)화 (87/101)

87화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인 듯하군.”

테오도르가 이사벨라의 제안을 받아들이려는 듯이 보이자 가만히 눈치만 살피던 로베르트 백작이 사색이 되어 말했다.

“그럼 저희는… 아, 아니, 국민들은 어떻게 합니까?”

“별수 있나. 라플라드로 대피시켜야지.”

순간 회의장이 고요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라플라드는 특이한 마력의 흐름으로 인해 이상 기후가 발생하여 사시사철 북풍한설이 휘몰아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마계의 영향을 받은 탓에 더욱 추워졌을 터였다. 마법으로 공기를 데우지 않는 이상은 발도 들이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런 극악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은 쉽게 반대 의견을 표하지 못했다. 살기 위해서는 라플라드로 피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들 역시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어차피 마법사 협회가 식량 문제를 해결한 참이 아니던가.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는 이들이 수두룩한데 고작 추위를 견디는 게 대수인가 싶었다.

귀족들의 의견이 일치한 듯 보이자 테오도르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라플라드로 이동하는 제국민의 호위는 루크 아베르타 단장이 맡도록 한다. 부상의 후유증이 남아 있다고는 하나 그 정도쯤은 할 수 있겠지.”

“…명을 받들겠습니다.”

루크에게서 시선을 뗀 테오도르는 기사단의 부단장인 토드 백작을 근위대의 임시 대장으로 임명하여 황성을 수호하게 했다.

원래라면 현직 근위대장인 할스리르사 후작이 수행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그는 차원의 통로가 열리기 전에 바이에드로부터 모종의 명령을 받고 황성을 떠난 상태였다.

어차피 마족이 도처에 깔려 있어 할스리르사 후작의 무사 귀환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워 보이니 최대한 빨리 빈자리를 채우고 전략을 세우는 편이 나았다.

“부대의 편성은 에스테반 공작에게 맡기지.”

“알겠습니다.”

대충 상황을 정리한 테오도르가 이사벨라를 바라보았다.

“이게 다인가, 이사벨라?”

“사실 하나가 더 남아 있긴 한데……. 펜드릭에 관한 이야기요.”

“펜드릭이라고?”

“네. 과거에 드래곤과 함께 마족 토벌에 앞장섰던 사람이에요. 신을 배신하고 마족의 편에 서는 바람에 역사에는 남지 않았지만요.”

아무리 신을 배신했다고는 하나 펜드릭은 신의 사자였다. 아이기스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신성마저 그를 막아설 수는 없었다.

“그자는 강한가?”

“네. 강해요. 펜드릭은 엘리시오와 미카엘에게 직접 검술을 가르친 사람이에요. 다른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검술로는 누구도 이길 수 없어요.”

그 말은 곧, 펜드릭이 황성에 숨어들어 수작을 부리기라도 한다면 아제로스군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당하게 될 거라는 소리였다.

“일단은 제가 펜드릭의 신상을 정리해서 모두에게 전달할게요. 오라버니는 펜드릭이 보이면 클리드를 부르라고 명령을 내려 주세요. 그나마 상대가 될 거예요.”

“그렇게 하지. 달리 더 이야기할 건 없나?”

“지금으로서는 없어요.”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다.”

테오도르와 이사벨라가 회의장을 벗어나고, 일리아도 기지개를 쭉 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의가 이어지는 내내 경직된 자세로 앉아 있었더니 허리가 찌뿌드드했다.

‘본부로 돌아가면 또 회의가 있겠지?’

일리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터덜터덜 복도로 향했다.

그런데 미처 회의장을 벗어나기 직전,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바로 클리드였다.

클리드는 매사에 여유롭던 평소와 달리 매우 초조해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에 일리아는 눈을 끔벅거리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오라버니?”

“일리아, 오늘은 바쁘겠지?”

“응. 부대 편성 때문에 회의가 길어질 것 같아. 그런데 왜?”

“할 말이 있어서…….”

한참을 우물쭈물거리던 클리드는 일리아의 손을 놓더니 비장하게 말했다.

“일주일 후, 오후 다섯 시까지 황제궁으로 와.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알겠어. 늦지 않게 갈게.”

클리드는 일리아를 뒤로하고 회의장을 벗어났다. 일리아 역시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몇 걸음을 채 떼기도 전에 또 다른 목소리가 일리아를 불러 세웠다.

“일리아.”

익숙한 목소리였다. 일리아는 치솟으려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 내리며 몸을 돌렸다.

“카일루스.”

“왜 같은 회의장에 있는데도 그대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군.”

“맙소사. 그래서 그렇게 뚱한 얼굴로 앉아 있었던 거예요?”

“어쩔 수 없잖아. 한동안 바빠서 만나지 못했으니까.”

어린아이 같은 카일루스의 투정에 일리아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어쩔 수 없잖아요. 회의 때는 신분에 따라 자리가 배정되니까요.”

“그대의 신분을 바꾸든가 해야지.”

“제가 더 높은 작위를 받아도 카일루스와 함께 앉는 건 불가능해요. 카일루스는 방계 황족이고 저는…….”

“공작 부인이 되면 되잖아, 일리아.”

“아무리 공작 부인이어도……. 네?”

태연하게 받아치려던 일리아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기…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아요?”

“글쎄.”

일리아가 얼굴을 굳히며 입술만 달싹거리자 카일루스가 그녀의 볼을 가볍게 두드렸다.

“정신 차려, 귀염둥이.”

“…카일루스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하니까 그렇잖아요.”

“어차피 먼 미래의 일인 데다가 강요할 생각도 없어.”

“아니요. 강요하셔도 되는데요…….”

일리아가 볼을 발그레 물들이며 카일루스의 어깨에 살포시 기댔다.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카일루스는 또다시 치밀어 오르는 충동과 싸워야만 했다.

지금까지 자제력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는데 어째서 일리아의 앞에만 서면 이렇게 무너지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크흠, 그에 대해선 나중에 이야기하지. 일단은 해야 할 일이 있잖아.”

일리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렇죠. 해야 할 일이 있었죠.”

“마법사단으로 갈 거지?”

“네. 아마 며칠은 거기서 지내야 할 것 같아요.”

“힘들면 언제든지 쉬러 와. 별궁이 황제궁보다는 가깝잖아.”

“…알겠어요.”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회의가 열린 다이아몬드궁에서 마법사단 본부까지는 대략 이십여 분이 걸렸다. 물론 마차를 타면 금방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마차가 있는 방향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당분간은 우연히 마주치는 것도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이런 시간마저 소중했다.

일리아는 배시시 웃으며 카일루스의 손을 더욱 꼭 붙잡았다.

“왜 그래?”

“아니에요.”

“나한테 숨기는 게 있는 모양이지.”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카일루스한테 숨기는 게 뭐가 있겠… 으앗!”

카일루스가 돌연 일리아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지며 포근한 온기가 밀려들었다.

일리아는 눈을 깜박거리며 카일루스를 올려다보았다. 마침 하늘에서 눈송이가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얀 눈송이 아래에 선 카일루스는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심술 가득한 얼굴마저도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일리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시선을 내렸다. 어쩐지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에렉과 함께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던 감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에렉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에렉 역시 로베르트 백작을 따라 황성으로 대피했을 테니 내성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벌써 몇 달이 훌쩍 지났음에도 일리아는 그와 마주치기는커녕 소식 한번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일리아는 문득 에렉이 어디서 사고라도 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프노이트 사절단의 환영 파티 날에도 제네리아에게 치근덕거리다 결국 사달을 내지 않았던가.

‘지금은 바빠서 수습할 겨를도 없는데…….’

일리아가 멍하니 상념에 잠겨 있자 심술이 난 카일루스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단숨에 입에 머금었다. 그러고는 일리아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허리를 더욱 단단히 붙들었다.

투정과도 같은 카일루스의 행동에 일리아는 웃음을 삼키며 그를 살짝 밀어냈다.

“화났어요?”

“아니.”

“그럼요?”

“아마도 질투인 것 같아.”

“미안해요. 이제부터는 카일루스한테 집중할게요.”

일리아는 에렉에 대한 생각을 털어 버리고 한 손을 들어 올려 카일루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당연히 그래야지.”

카일루스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하얀 눈송이가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 위에 꽃처럼 내려앉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신비롭고 아름다워, 일리아는 홀린 듯이 카일루스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느슨하게 풀려 있던 분위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또 나를 시험에 들게 할 셈이야?”

“미,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그……!”

카일루스가 고개를 숙이자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금 완전히 맞물렸다. 짙은 입맞춤에 싸늘하던 공기가 한여름의 태양처럼 금세 달아올랐다.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그에게 더욱 매달렸다. 빈틈없이 맞물린 입술 사이로 이따금씩 작은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카일루스의 끊임없는 애정 공세에 일리아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을 무렵이었다. 돌연 정원 한쪽에서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일리아는 카일루스를 밀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눈꽃이 맺혀 있는 작은 나무 뒤로 이질적인 붉은색이 보였다. 일리아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색이었다.

“레널드…….”

일리아의 목소리에 레널드가 어깨를 한껏 움츠리며 나무 뒤에서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머리카락 색깔만큼이나 붉어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크게 외쳤다.

“저, 저,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정말입니다! 죄송합니다!”

레널드가 급하게 자리를 뜨려고 하자 카일루스가 나직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레널드 메이헴.”

“네, 네! 각하!”

“앞으로 정원은 출입 금지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레널드가 부리나케 사라지고, 일리아는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카일루스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앞으로 레널드 얼굴을 어떻게 봐요…….”

“뭐 어때. 테오도르한테도 들켰었는데.”

“그러니까 문제인 거죠! 이러다 황성에 소문 다 나겠어요!”

“어차피 우리는 연인 사이잖아. 누가 뭘 보았든 문제 될 건 없어.”

“그건 그렇지만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다고요.”

“일단 가지. 이러다 늦겠군.”

카일루스는 툴툴거리는 일리아를 마법사단 본부까지 데려다주고 곧장 별궁으로 향했다. 돌아갈 때는 굳이 걸어갈 필요가 없었던 터라 마차를 이용했다.

일리아는 멀어지는 마차를 향해 손을 흔들곤 마법사단 본부 안으로 들어섰다. 회의실에는 이미 레널드와 퍼렐을 비롯한 단원들이 한데 모여 앉아 있었다.

일리아가 오스카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딱 맞게 왔어. 앉아.”

일리아는 헛기침을 하며 레널드의 옆에 앉았다. 껄끄러운 마음에 오스카만 쳐다보고 있자 돌연 레널드가 ‘전 오늘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하고 속삭였다.

‘안 되겠어. 앞으로 실외는 피하자.’

일리아는 레널드의 발을 지그시 지르밟으며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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