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칼리파가 돌아온 이상, 계속해서 농성을 이어 가는 것은 어차피 무의미했다. 차라리 남아 있는 마왕군을 모두 황성으로 끌어 들여 공성전을 유도하고 아자카산맥이 한산해진 틈을 타서 차원의 통로를 봉인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어차피 지방에 있는 제국민은 클리드의 마법에 의해 보호받고 있으니 황성에 있는 이들만 대피시키면 되었다. 대피할 수 있는 장소가 라플라드뿐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머지않아 전쟁터가 될 황성에 제국민을 남겨 둘 수는 없었다.
“칼리파의 상태가 호전되기 전에 얼른 끝내야 해.”
“하지만… 갑자기 아이기스를 해제하면 함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
“알면서도 올 거야. 그러니까 네 힘을 조금씩 거두어들여. 어차피 칼리파와 맞서기 위해서는 현신하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네 본래의 힘에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현신이라…….”
아이기스를 해제하면 클리드는 마법에 갇혀 있던 영혼의 일부를 돌려받아 예전처럼 완전해질 수 있었다.
과거였다면 바라 마지않았을 일이었지만, 그동안 연기까지 해 가며 지켜 왔던 일상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클리드는 왠지 내키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그라니체 가문을, 가족들을 사랑하게 된 모양이었다. 아제로스 제국을 수호하는 것보다 더는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없다는 사실에 더욱 신경이 쓰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클리드가 갈등하는 기색을 보이자 이사벨라는 찻잔을 기울이며 웃음을 삼켰다.
‘그래도 미카엘에게 소중한 게 생겨서 다행이네.’
수백 년 전만 해도 미카엘은 엘리시오만 졸졸 따라다니며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펜드릭에게도.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가족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날이 오다니. 이사벨라는 그가 기특한 나머지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다른 부분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내가 뭐 때문에 고민하는 줄 알고?”
“모를 리가 없잖아. 너랑 몇 년을 알고 지냈는데.”
이사벨라가 입꼬리를 당겨 씩 웃었다.
“전쟁이 끝나도 네가 아제로스 제국의 수호룡으로서 살게 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모든 인간들이 내 원래의 모습을 볼 텐데?”
“나만 믿어, 클리드. 대신 이것만큼은 네가 선택해야 해.”
이사벨라가 허리에 손을 척 얹으며 말을 이었다.
“네 정체를 가족들에게 솔직하게 밝힐 건지, 말 건지.”
“당연히 숨겨야지.”
“현신하게 되면 그라니체 백작과 일리아는 분명히 네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거야. 그들은 네 일부이기도 하니까.”
“…….”
클리드는 원래 그라니체 가문을 이어 갈 생각이 없었다. 가문의 이름에 애정도,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엘리시오가 죽으면 지하 동굴로 들어가 잠이나 청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엘리시오가 죽기 전, 클리드에게 아제로스 제국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 모두가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지켜봐 달라고. 클리드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간절한 그녀의 눈빛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리고 엘리시오의 사후, 절대자였던 초대 황제를 잃은 국민들은 드래곤인 클리드에게 광적인 집착을 보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만 생기면 찾아와서 드래곤님, 드래곤님 하고 비는 통에 클리드는 넌덜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클리드는 결국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바로 드래곤으로서의 삶을 완전히 끝내 버리는 것.
지하 동굴로 들어간 클리드는 밤낮으로 연구에 매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기스를 완성할 수 있었다.
아이기스의 재료는 드래곤의 마력과 영혼, 그리고 신의 힘을 이어받은 이의 영혼이었다. 엘리시오는 이미 죽었지만 다행히도 황성 곳곳에 그녀의 영혼이 남아 있어 아이기스를 형성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렇게 영혼을 나누어 황성 전체에 아이기스를 설치한 클리드는 남은 힘으로 육체를 형성해 드래곤의 후손을 자처했다. 기나긴 임무를 마친 드래곤이 마침내 하늘로 돌아갔고, 마지막까지 아제로스 제국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남겼다고 공표하며. 드래곤의 후손임을 증명하는 것은 간단했다. 그저 아이기스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만 보여 주면 되었으니까.
그러나 인간의 삶은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생활 습관부터 시작해서 수명, 외형, 그리고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와 소문까지 신경 써야 했기 때문이다.
클리드가 서른을 넘겨서도 혼인을 하지 않자 귀족들은 그라니체 가문의 새로운 가주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연일 떠들어 댔다. 참다못한 클리드는 결국 영혼을 한 번 더 나누어 분신을 만들어 냈다. 자신의 부인이 될 여자를 만든 것이었다.
처음에 만든 분신은 부인이 될 여자 하나뿐이었다. 클리드는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클리드의 오산이었다. 부인을 맞이하자 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후사에 관해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아제로스 제국을 지키는 것은 고사하고 귀족들의 등쌀에 말라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클리드는 결국 영혼을 한 번 더 나누었다. 기존의 육체를 분신에게 양도하고 이번에는 후계자가 되어 본격적으로 대를 잇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육체를 바꿔 가며 아제로스 제국과 그라니체 가문을 지켜 온 클리드는 수백 년이 지나자 점차 권태에 빠져 갔다.
클리드가 슬슬 인간으로서의 생활도 청산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무렵,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수백 년 동안 가족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너무 자주 영혼을 나누는 바람에 클리드의 힘이 불안정해져 버린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모든 분신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수도 있었기에 클리드는 백작 부인의 역할을 하던 분신의 영혼을 거두어들이고 그녀의 사망을 공표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방에 틀어박혀 영혼의 안정화 작업을 진행했다. 그런데 그동안 가주 역할을 하던 분신이 대뜸 인간 여자를 부인으로 맞이하더니 덜컥 동생을 만들어 버렸다. 처음으로 그라니체 가문의 혈통에 인간의 피가 섞인 순간이었다.
- 이건… 흥미롭군.
인간의 피가 섞인 동생, 레이븐은 분신을 통해 클리드의 영혼을 극히 일부만 나누어 받았기 때문인지 그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지금까지 만들었던 분신과는 확연히 달랐다.
분신은 단 한 번의 돌발 행동 이후로 다시는 클리드의 통제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레이븐은 어려서도, 성인이 되어서도 클리드에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인간의 영혼과 드래곤의 영혼이 완전히 융합함으로써 클리드와는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거듭나 버린 것이다.
클리드는 그런 레이븐에게 큰 흥미를 느꼈다. 그를 더욱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현재의 육신을 버리고 레이븐의 자식이 되기로 했다.
어차피 레이븐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고 한들 그 아이는 빈 껍데기에 불과할 터였다. 레이븐은 클리드가 직접 영혼을 나누어 주었던 분신들처럼 그와 영혼을 공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래곤의 영혼은 오직 클리드를 통해서만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었다.
기회를 엿보던 클리드는 엘레나가 아이를 낳자마자 아이의 영혼이 제대로 붙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아이의 영혼은 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클리드는 아이를 살리는 셈치며 아이의 육신을 차지했다.
그렇게 클리드 그라니체로서의 삶을 시작한 그는 레이븐을 위해서 새로 태어난 동생에게도 영혼을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클리드의 영혼을 직접적으로 물려받은 일리아는 그의 통제를 받기는커녕 레이븐보다 자아가 더 강했다. 무려 자신의 근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드래곤의 머리채를 쥐어뜯을 정도로 말이다. 본능적으로 클리드를 존중하고 어려워하는 레이븐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때부터 클리드는 레이븐과 엘레나뿐만 아니라 일리아 역시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다.
‘내 정체를 알게 되면 다시는 예전처럼 지내지 못하겠지.’
클리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최대한 빨리 이야기할게.”
“잘 생각했어. 괜히 어설프게 숨겼다가 들키는 것보다는 미리 이야기하는 게 낫잖아.”
“…고마워, 이사벨라.”
“별말씀을. 그럼 오후 회의에서 봐.”
“그래.”
* * *
그날 오후, 대책 마련을 위한 회의가 열렸다. 마법사단의 업무를 마치고 회의장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일리아는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그러다 상석 쪽에 앉은 카일루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는 것인지 눈썹을 미미하게 찌푸리고 있었다.
일리아가 입을 벙긋거려 ‘왜 그래요?’ 하고 묻자 카일루스가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뚱했다. 그에 일리아가 막 의문을 표하려고 하는데 테오도르와 이사벨라가 회의장 안으로 들어왔다.
이사벨라는 테오도르가 회의의 시작을 알리자마자 회의장에 모인 귀족들에게 마왕군 유인 작전에 대해 설명했다.
당연히 귀족들은 클리드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봉인을 위해서라고는 하나 마왕군을 황성으로 유인하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족들의 부정적인 반응에도 이사벨라의 의지는 확고했다. 마치 믿는 구석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에 의아함을 느낀 테오도르가 이사벨라를 향해 물었다.
“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겠다만 굳이 황성으로 끌어 들일 필요가 있는 건가?”
“어차피 칼리파는 엘리시오에게 복수하기 위해 황성을 노릴 거예요. 그걸 이용하자는 거죠. 그리고 아이기스를 해제해야만 드래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도 하고요.”
“드래곤의 도움이라고?”
“네. 아이기스를 해제하면 마법 안에 속해 있던 드래곤의 영혼이 현신할 수 있게 돼요. 요새의 이점도 살리고 드래곤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는 거죠.”
“드래곤의 영혼이 황성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게 되어 있나 보군.”
이사벨라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줄줄 쏟아 냈다.
“맞아요. 그리고 아자카산맥부터 황성까지는 거리가 꽤 있으니 제대로 유인하기만 한다면 봉인 의식도 문제없이 치를 수 있을 거예요.”
“드래곤의 영혼을 계속 이용할 수는 없는 거겠지?”
“네. 영혼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힘이 다하기 전에 아이기스를 복원해야만 해요. 그건 클리드가 알아서 할 거예요.”
이사벨라가 클리드를 향해 눈가를 찡긋해 보였다. 일을 이런 식으로 해결할 줄은 몰랐던 터라 놀란 클리드는 멍하니 입술을 달싹거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