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 클리드의 정체 】
마계에서 마족들이 밀려들기 시작한 지 수일이 지났다. 아자카산맥에 터를 잡은 그들은 주변 도시들을 부수고 불태웠으며 고작 며칠 만에 아제로스 제국의 절반 이상을 점령했다. 마족의 마수를 피해 간 곳은 오직 수도와 클리드의 마법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일부 지역들뿐이었다.
빛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테오도르는 낙담하지 않았다. 제국민을 미리 대피시킨 덕분에 인명 피해가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안심하기는 일렀다. 마족은 피를 통해 선대의 기억을 물려받기 때문에 실전된 고대의 마법 또한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일전에도 제네리아가 테멜군에게 은밀하게 폭발 마법을 새겨 넣어 아이기스에 균열을 내지 않았던가. 지금은 아이기스가 건재하니 당장 마족들에게 습격받을 일은 없겠지만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사소한 것 하나도 놓쳐서는 안 돼.’
테오도르는 기사단과 마법사단에 황성의 경비를 더욱 강화하라고 이르는 한편 황족과 그라니체 가문의 일원들에게 근위대원을 붙여 그들을 항시 호위하게 했다.
덕분에 황성의 경비를 강화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 일리아는 신물 제작을 엘레나에게 인계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사샤가 엘레나를 잘 따라 준 덕분에 신물 제작은 차질 없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기 그지없었지만 항상 비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 오전, 마법사 협회에서 마법을 이용해 땅을 녹이고 새싹을 틔워 내는 데 성공했다는 보고를 올렸다. 게다가 적절한 환경만 조성해 주면 식물의 성장을 촉진시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희망적인 이야기까지 덧붙였다.
그들이 이루어 낸 눈부신 성과에 경탄한 테오도르는 마법사 협회에 직접 방문하여 마법사들을 독려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또한 테오도르는 카일루스를 비롯한 에스테반 가문에 아제로스군의 훈련 및 감독을 명령했다. 원래는 군대 내의 훈련 교관들이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봉인이 풀렸을 당시 일부 교관들이 도망을 치는 바람에 인원이 부족해졌다. 그래서 카일루스가 남은 교관들과 함께 병사들의 훈련을 맡게 된 것이었다.
카일루스는 테오도르의 명령을 성실하게 수행했고, 덕분에 병사들 사이에서 ‘철혈의 공작’이라는 별명이 더욱 굳어져 버렸다.
그리고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불타 없어진 도시 위에 진지를 구축한 마족들은 어느새 아로스 인근까지 세력을 넓혀 왔다.
마족들은 이따금씩 마물을 보내어 위협을 하기도 했지만 적극적으로 황성을 함락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에 무슨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이사벨라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외성 망루에 올랐다.
고요한 아로스 너머로 새카맣게 모여든 마족들이 보였다. 개중에는 이사벨라가 아는 얼굴도 있었다. 선두에 서 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와 한쪽 눈에 안대를 한 남자였다.
가나슈와 라기에. 그들은 인간을 노예로 부리며 거들먹거리는 다른 마족들과 달리 오직 살육만을 즐기는 자들이었다.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죽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인간들이 피 흘리며 죽어 가는 모습을 잘 그린 명화처럼 웃으며 지켜볼 뿐이었다.
이사벨라의 적금빛 눈동자가 분노로 화르륵 타올랐다. 수백 년 전의 기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성벽만큼이나 높이 쌓여 있던 시신들과 피의 강, 그리고 그 위에 우뚝 선 마왕까지. 그 끔찍한 지옥도는 앞으로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었다.
‘이번에는 다를 거야.’
고개를 휘휘 내저어 과거의 기억을 털어 낸 이사벨라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마왕군을 빠르게 훑었다.
마족들의 기세는 여전히 무시무시했지만 이전과 같이 압도적이지는 않았다. 마왕의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인 듯했다.
마왕은 마족들의 지도자이자 힘의 근원이었다. 마왕이 약해지면 마족들도 약해졌으며 마왕이 강해지면 마족들 또한 강해졌다. 현재 그들의 기세가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마왕이 신성에 당해 약해졌기 때문에.
당연했다. 신이 엘리시오에게 부여한 신성은 오직 마족을 멸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화의 힘이었다. 아무리 마왕이라고 해도 신의 힘에 의해 정화된 부분을 고작 수백 년 만에 회복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가 도움을 주었다고 해도 말이다.
‘어렴풋하지만 그의 신성이 느껴져. 다시 돌아온 거야.’
이사벨라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차피 이번 전쟁은 과거와 달리 성지 탈환을 위한 가림막에 불과했다. 과거에는 지금처럼 두 차원이 연결되어 있지 않아 차원을 봉인하기 위해서는 마족을 완전히 쫓아낼 수밖에 없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성지에서 봉인 의식을 치르기만 하면 마계의 산물들은 인력에 의해 마계로 끌려가게 될 것이고, 그러면 전쟁 역시 자연스럽게 끝날 터였다. 즉 농성을 이어 가며 지지부진한 대치 상황을 유지하는 것보다는 마왕군을 아자카산맥 밖으로 끌어내는 게 낫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결단을 내린 이사벨라는 망루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클리드를 황녀궁으로 불렀다.
얼마 후, 은빛 머리카락을 잔뜩 헝클어뜨린 클리드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손을 대충 휘저어 주변을 물리더니 그대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예의를 중요시하던 평소와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당황하기는커녕 익숙하다는 듯이 차를 우릴 뿐이었다.
응접실 내에 그윽한 차향이 퍼지기 시작하자 이사벨라가 넌지시 말문을 뗐다.
“할 말이 있어.”
“별거 아니면 알아서 해. 졸려 죽겠는데 이런 아침부터…….”
“마왕군을 황성으로 유인할 생각이야.”
“하아, 역시 별거 아니……. 뭐라고?”
반쯤 잠들어 있던 클리드가 눈을 부릅뜨며 몸을 일으켰다. 마왕군을 황성으로 유인한다. 그 말은 곧 황성을 보호하고 있는 아이기스를 거두라는 말과 같았다.
“제정신이야?”
“물론이지.”
“황성을 전쟁터로 삼을 수는 없어. 다 죽을 수도 있다고.”
클리드 역시 전면전을 치르기보다는 마왕군을 성지에서 떨어뜨려 놓고 차원의 통로를 봉인하는 게 최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 성공할지 모르는 봉인 의식을 위해서 황성을 전쟁터로 삼는 것은 지나치게 위험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모두가 죽고 말 것이었다.
클리드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이사벨라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똑바로 설명해 봐.”
“마왕이 돌아왔어.”
“…예상은 했는데 역시나군.”
“그리고 그의 옆에 펜드릭이 있는 것 같아.”
순간, 클리드의 기세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나른하게 풀려 있던 공기가 순식간에 조여들며 이사벨라의 숨통을 턱 막았다.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이사벨라가 탁자를 두어 번 두드려 분위기를 환기했다.
“진정해, 클리드.”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널 죽인 놈이 돌아왔다며!”
“…그때 죽지는 않았어. 죽을 뻔한 거지.”
“아니. 내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넌 그 자리에서 죽었을 거야, 엘리시오.”
“그건 그렇지만…….”
할 말이 없어진 이사벨라는 괜히 차만 홀짝거렸다. 그의 말이 맞았다. 클리드가, 아니. 드래곤이 제때 심장을 고치지 않았다면 그녀는 분명 죽었을 것이다.
“그때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던 거야?”
“그걸 말이라고 해?”
“고마워. 네가 내 옆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미카엘.”
이사벨라가 옅게 웃으며 클리드를 바라보았다. 말끔한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문득 과거의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수백 년 전, 신은 엘리시오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또 한 명의 사자를 만들어 냈다. 그게 바로 펜드릭이었다.
새하얀 장검을 들고 엘리시오의 앞에 나타난 펜드릭은 마치 마족을 죽이는 것만이 살아갈 이유라도 되는 것처럼 목숨을 다해 마족 토벌에 임했다. 실력, 품성, 외모. 사람들은 무엇 하나 나무랄 데 없는 펜드릭을 진심으로 존경했으며, 그것은 엘리시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엘리시오는 미카엘과 펜드릭, 그리고 모두의 힘을 합친다면 마족을 완전히 멸하고 인간계를 구해 내는 것도 꿈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왕의 목을 베기 직전, 상황이 급변했다.
- 칼리파. 이제 끝을 내자.
- …아쉽군. 네가 절망하는 모습을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 다음에는 신의 곁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랄게.
엘리시오는 신검을 들어 올려 마왕의 목을 베어 내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새하얀 검날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엘리시오는 밀려드는 격통에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렸다.
- 어떻게 네가…….
엘리시오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은 사람은 다름 아닌 펜드릭이었다.
그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검을 거칠게 잡아 뽑더니 마왕을 데리고 마계로 사라졌다. 배신의 이유를 물을 새도 없었다. 엘리시오는 심장이 꿰뚫린 탓에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미카엘에게서 모든 사실을 전해 듣곤 얼마나 허망했는지 모른다.
‘이제는 다 지난 일이지만.’
이사벨라는 눈을 두어 번 깜박거려 상념을 털어 냈다. 그러고는 분노에 주먹을 부들부들 떠는 클리드를 향해 말했다.
“미카엘.”
“그 이름은 이미 버렸어. 클리드라고 불러.”
“좋아, 클리드. 일단 들어 봐. 칼리파는 반드시 황성을 무너뜨리려고 할 거야. 그게 나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러겠지.”
“하지만 황성을 지키면서 싸우기에는 아제로스군의 군세가 너무 약해. 황성을 일부 희생해서라도 아자카산맥의 마왕군을 모두 황성으로 불러들여 서둘러 전쟁을 끝내야만 해.”
그나마 다행인 점은 마왕, 칼리파의 부상으로 마족들이 약해졌다는 것이었다.
현재의 마왕군은 과거처럼 마구잡이로 군세를 불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새로운 마족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칼리파의 힘이 필요했는데, 그가 지난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는 바람에 마족을 탄생시키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것조차도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칼리파는 꽤 신중한 편이었다. 당장 인간들과 전투를 치러야 하는 마당에 가진 힘을 모두 털어서 군세를 불리려고 하지는 않을 터였다. 즉 아자카산맥의 마왕군을 황성으로 끌어 들이면 아자카산맥은 비게 된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