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83)화 (83/101)

83화 

‘설마 드래곤이 죽지 않은 건가?’

일리아가 넌지시 세실라를 떠보았지만 그녀는 드래곤에 관해서만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허락받지 못했다고 한 게 드래곤에 관한 이야기였던 듯했다.

일리아는 가만히 팔짱을 끼며 세실라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세실라, 지금 이 사실을 알려 주는 이유가 뭐야?”

“차원이 열리면 계속해서 마력을 사용하셔야 할 것 아니에요.”

“그렇겠지.”

“오늘처럼 마력이 고갈되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세실라는 지금 자신을 마력 충전용으로 이용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세실라 자신의 마력 역시 한정적임에도 불구하고. 일리아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

“또 이렇게 쓰러지시게 둘 수는 없어요.”

“정 도움이 필요하면 말할게. 하지만 그 외에는 함부로 네 마력에 손대지 않을 거야.”

“전 사람이 아니어서 괜찮아요. 금방 회복되는걸요.”

“사람이든 사람이 아니든 상관없이 안 돼. 세실라는 내 소중한 가족인걸. 가족을 그런 식으로 취급하고 싶지는 않아.”

일리아의 말에 세실라가 얼굴을 발그레 물들였다. 얼핏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일리아는 세실라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그런 말 하지 마. 알았지?”

“…네.”

“그나저나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야?”

“대략 여덟 시간 정도요.”

“뭐?!”

일리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세실라에게서 사샤를 넘겨받았다.

“보고드려야 해.”

“사샤에 관해서요?”

“응. 이건 아주 중요한……. 잠깐. 세실라도 알고 있었어?”

세실라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같은 신의 산물이니까요.”

“그런데 왜 말 안 했어!”

“안 물어보셨잖아요.”

“으으, 정말! 진작 물어볼걸!”

일리아는 한참 동안이나 발을 구르며 아쉬워하다가 이내 우두커니 멈춰 섰다. 바로 황태자궁까지 뛰어가고 싶었지만 테오도르를 알현하기 위해서는 미리 기별을 하고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하아, 준비부터 해야겠다. 세실라는 쉬고 있어.”

“네?”

“밤새 내 옆을 지키느라 피곤했을 거 아니야. 내 침대에서 푹 자고 있으라고.”

“…네. 감사합니다, 아가씨.”

세실라가 부드럽게 웃으며 일리아의 침대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그런 세실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일리아는 곧장 서재로 뛰어가 테오도르에게 편지를 보내고 황태자궁에 갈 채비를 했다.

얼마 후, 방문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일리아는 사샤와 그란디아의 눈물, 그리고 백금의 숟가락을 품에 안고 황태자궁으로 향했다.

넓은 응접실에는 테오도르와 이사벨라뿐만 아니라 카일루스도 있었다. 일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카일루스가 픽 웃으며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막 성지에 관해 이야기하려던 참이었는데.”

테오도르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그래서, 보고할 게 뭐야?”

“그게… 신물을 찾은 것 같습니다.”

“뭐라고?”

일리아는 탁자에 그란디아의 눈물과 백금으로 만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에 테오도르의 미간에 미미하게 주름이 잡혔다.

“이건…….”

테오도르가 그란디아의 눈물을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예전에는 신성이 깃들어 있지 않았는데…….”

“사실 이 아이가 만든 겁니다.”

일리아가 품에 안고 있던 사샤를 앞으로 쭉 내밀었다.

“야옹!”

사샤가 꼬리를 살랑거리자 테오도르는 헛웃음을 흘렸고, 카일루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으며, 이사벨라는 눈을 빛내며 방긋 웃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을 줄이야!”

이사벨라가 팔을 벌리자 사샤가 그녀의 품으로 냉큼 뛰어들었다. 신의 사랑을 받는 이답게 사샤의 사랑 또한 손쉽게 차지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탐탁지 않아 했다. 고작해야 아기 고양이 주제에 어떻게 신물을 만들어 낸다는 말인가.

“그 고양이가 신물을 만들었다고?”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일리아는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꺼냈다. 그것을 사샤에게 내밀자 사샤가 동그란 앞발을 들어 올려 금화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작은 앞발에서 새하얀 신성이 터져 나오며 금화를 신물로 바꾸어 놓았다. 그 모습에 테오도르는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이 고양이가 대체 뭐길래?”

“신의 사자예요.”

대답은 이사벨라에게서 들려왔다. 그녀는 사샤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신께서 일리아가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에요. 선물을 다 주시고. 이 아이만 있으면 봉인의 열쇠는 금방 만들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성지도 찾았겠다, 봉인의 열쇠만 완성되면 바로 차원의 통로를 봉인할 수 있어요.”

이 희망적인 소식은 테오도르를 통해 모두에게 전해졌다. 덕분에 루크의 부상으로 침울해져 있던 황성이 금세 활기를 되찾았다.

테오도르는 여세를 몰아 군사 회의를 소집했다. 아자카산맥의 탈환에 관한 회의였다. 기사단의 보고에 따르면 현재 성지를 지키고 있는 것은 피델리오와 마물, 단 둘뿐이었다. 수백 명의 기사로도 그 둘을 상대하지 못했으니 나중에 제네리아까지 합세할 것을 대비하여 군대를 편성해야만 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분명히 존재했다. 바로 프노이트 왕국이었다. 테멜 왕국은 막 내전이 끝난 참이라 출정할 여유가 없겠지만 프노이트 왕국은 달랐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침묵으로 일관하며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하여 병력을 나누는 게 중요하다는 것.

그렇게 연일 군사 회의가 계속되고, 그러는 동안 일리아와 사샤는 신물 제작에 나섰다. 봉인의 열쇠가 될 신물은 그란디아의 눈물로 정해졌다. 그란디아의 눈물은 과거에 인간계에 살았던 드워프라는 종족이 만든 것으로 신검과 비견될 정도의 기물이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쌍수를 들고 환영했지만 테오도르만은 탐탁지 않아 했다. 그에게 있어 그란디아의 눈물은 신물이기 이전에 리안나 황후의 유품이었다. 그것을 봉인의 열쇠로 사용하려니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그러자 이사벨라가 그런 테오도르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이 목걸이는 황성 보고에 영원히 보관해 둘 테니 안심하세요, 오라버니.’ 하고 테오도르에게 말했고,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또 발생했다. 봉인의 열쇠를 만드는 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사샤가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신성의 양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이사벨라는 사샤의 신성이라면 신물이 완전히 완성되기까지 약 한 달 정도가 걸릴 거라고 추정했다. 결국 아자카산맥을 탈환하기 위한 출정은 신물이 완성된 이후로 미루어졌다.

차원의 봉인이 완전히 열리기까지 네 달 정도가 남은 시점이었다. 아자카산맥을 얼마 만에 탈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래서 일리아는 매일 초조한 얼굴로 사샤를 어르고 달랬다.

“오늘로 보름째인가.”

일리아는 침대에 누워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최근 들어 툭하면 불안감이 치밀어 오르고 가슴이 일렁거리는 바람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이러면 꼭 무슨 일이 생기던데.’

일리아는 재차 한숨을 내쉬며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사샤를 바라보았다. 오늘도 한계까지 신성을 쓴 탓에 많이 피로했던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사샤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이 작은 몸에 기댈 수밖에 없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미안해, 사샤.”

일리아는 모든 상황이 정리되면 사샤를 꼭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 잠든 사샤를 보고 있으니 스멀스멀 잠이 쏟아졌다.

“자고 일어나서 마저 놀자, 사샤…….”

그렇게 일리아가 조금씩 잠에 빠져들려고 할 때였다.

콰앙!

갑자기 하늘이 깨어지는 듯한 엄청난 소리와 함께 황성이 크게 흔들렸다. 기민하게 몸을 일으킨 일리아는 사샤를 품에 안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검게 물든 하늘에서 검붉은 마력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건 분명 마계의 마력이었다.

‘설마. 아닐 거야…….’

일리아는 황제궁을 돌며 엘레나와 하인들을 안심시킨 후에 황녀궁으로 향했다.

황녀궁 앞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갑자기 일어난 이변에 겁을 먹은 사람들이 이사벨라에게 사정을 묻기 위해 모인 모양이었다.

인파를 헤치고 정문 앞에 선 일리아는 문을 막아서는 근위대원에게 자신은 이사벨라를 꼭 만나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근위대원은 ‘회의장으로 모이시라는 전언입니다!’ 하고 외치며 정문을 아예 잠가 버렸다.

마음이 급해진 일리아는 품 안에서 추욱 늘어져 있는 사샤를 더욱 단단히 고쳐 안곤 회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회의장 안에는 이미 많은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시간이 없으니 본론만 말하지.”

테오도르가 하얗게 질려 있는 귀족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차원이 완전히 열렸다는군. 머지않아 마족들의 공격이 시작될 거다.”

가만히 테오도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귀족들이 깊은 탄식을 토해 냈다. 개중에는 ‘신이시여!’ 하고 외치며 눈물을 줄줄 흘리는 이도 있었다. 막연한 두려움이 회의장에 물결처럼 퍼져 나가기 시작하자 테오도르는 탁자를 가볍게 내리쳐 귀족들의 시선을 모았다.

“지금 이렇게 멍청하게 떨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제국민을 구하고 마족을 몰아낼 대책부터 강구해야 돼.”

테오도르는 일단 근처에 사는 모든 제국민을 황성 안으로 대피시키고 성문을 닫으라고 지시했다. 또한 마족의 공격을 조금 더 용이하게 막아내기 위하여 마법사들을 성벽에 배치하라고 일렀다. 지금은 아이기스가 황성을 지키고 있기는 하지만 언제, 어떻게 부서질지 모를 일이 아니던가. 만약의 경우까지 모두 생각하여 철저하게 대비해야만 했다.

“그럼 지방에 있는 이들은 어떡합니까?”

한 귀족의 물음에 테오도르는 입을 다물었다. 아제로스 제국의 수도는 국토의 북쪽에 치우쳐 있었다. 그 때문에 국토의 최남단에서 수도까지는 마차를 타고 이동한다고 해도 자그마치 한 달이 훌쩍 넘게 걸렸다. 이미 차원이 완전히 열린 이상, 지방의 제국민들까지 황성으로 데리고 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피를 유도하는 와중에 전멸할 게 분명했다.

“그건…….”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때, 누군가가 회의장 문을 열고 들어왔다. 행색이 남루한 남자였다. 옷은 군데군데가 찢겨 있는 데다가 몸 곳곳에 피와 먼지가 가득했다. 그러나 그런 남루한 행색에도 보석 같은 자색 눈동자와 은빛 머리카락만큼은 찬란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일리아가 화색을 띠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클리드 오라버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