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일리아는 루크를 바닥에 눕히고 치유 마법을 시전했다. 원래는 깨끗한 장소에서 상처를 어느 정도 닦아 낸 후에 마법 치료를 하는 게 정석이었지만 지금 그를 의궁으로 옮겼다가는 반도 가지 못해서 숨이 끊어질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일리아는 흙먼지를 바람으로 날려 낸 후에 치유를 시작했다.
이내 일리아의 손에 푸른 마력이 맺히고, 루크의 상처가 천천히 아물기 시작했다. 일리아는 마력을 더욱 끌어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마력이 급속도로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만큼 상처가 위중하다는 의미리라.
“웬 소란이냐.”
그때, 하얀 정장을 입은 테오도르가 정문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직 집무를 보던 중이었는지 차림새가 말끔했다.
“전하.”
일리아가 루크를 치유하며 테오도르를 올려다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일리아의 얼굴과 피투성이인 루크의 상태가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테오도르는 서둘러 그들에게 다가갔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에 급하게 와 봤는데…….”
“아베르타 백작의 상태는?”
“사실… 살아 있는 게 용할 정도입니다.”
테오도르는 얼굴을 굳히며 루크의 안색을 살폈다.
“완전히 치유할 수 있겠나?”
“일단은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최대한 빠르게…….”
“전하!”
테오도르가 한창 루크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십여 명의 수색대원이 연달아 황태자궁 앞에 도착했다. 그들은 말에서 뛰어내려 아자카산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물론 그곳에 성지가 있다는 말 또한 잊지 않았다.
“아자카산맥에 성지가 있다는 건 희망적인 일이지만 피델리오가 강한 마물을 부린다는 건 악보로군.”
“그 마물은… 마력을 두른 검날마저 부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그런 마물을…….”
테오도르는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이사벨라에게 듣기로는 강한 마물이 차원을 넘기 위해서는 그만큼 강한 인간을 매개체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아직 차원이 완전히 열리지 않은 시점이니 그 조건은 아직도 유효했다. 그러나 그만한 힘을 가진 기사와 마법사는 전부 아로스에 모여 있는 상태였고, 최근에 마물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러니 아제로스군을 통해 나타난 마물은 아닐 터였다.
‘프노이트 왕국이 개입하기 시작한 건가.’
테오도르는 일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아베르타 백작이 바로 움직일 수 있겠나?”
“아니요. 적어도 한 달은 요양해야 할 겁니다.”
“한 달이라…….”
만약 프노이트 왕국이 제네리아와 손을 잡은 게 확실하다면 당장 며칠 안에도 전쟁이 벌어질 수 있었다. 그들은 차원이 열리는 것과 관계없이 언제든지 병력을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만의 마법사 군대가 작정하고 덤벼들면 아무리 아제로스 제국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전력 손실은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기사단장인 루크가 부상을 당하다니. 이건 뼈아픈 손실이었다. 단장의 부재는 곧 기사단의 사기와도 직결된다. 전쟁이 벌어지면 당연히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테오도르는 루크의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기사에게 ‘아베르타 백작이 깨어나면 회복에 전념하라고 전해.’ 하고 말하곤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아베르타 백작은 근위대원들이 옮길 테니 경도 푹 쉬어. 안색이 좋지 않아.”
“…알겠습니다.”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일리아는 후우, 하고 깊은숨을 토해 내며 걸음을 옮겼다. 속이 허하고 머리가 어질어질한 것을 보니 그새 마력이 바닥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루크의 상처가 위중한 건 사실이었지만 치유 마법에 마력이 이렇게 많이 소모된 건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마력 고갈에는 상처의 정도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원인이 있는 듯했다.
걸음을 멈춰 선 일리아는 뒤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마물에게 공격당한 것이라고 했으니 굳이 원인을 따지자면 마력밖에 없었다. 마계의 마력이 상처를 통해 루크의 체내에 간섭을 일으켰고, 그 탓에 회복이 더뎠던 것이다. 일리아의 마력은 마계의 마력을 없애기 위해 더욱 많은 힘을 쏟아부었던 것이고. 일리아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차원이 열리면 저런 것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거 아니야.’
고개를 휘휘 내저은 일리아는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루크의 상처를 보니 차원이 완전히 열리기 전에 봉인을 마쳐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쇠로 쓸 만한 신물을 빨리 찾아야 해.’
침실로 향하려던 일리아는 신물을 수색하기 위해 창고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막상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보물들을 마주하니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밤새 하면 금방 끝나겠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일리아는 보물을 하나씩 들어 올렸다 내팽개치기를 반복했다.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신물이 아닌 보물들을 뒤로 던질 때마다 쨍그랑거리며 금속이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 소란에 잠에서 깨어난 것인지 사샤가 야옹거리며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하얀 털이 오늘따라 유독 눈부셨다. 일리아는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사샤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미안해. 내가 깨웠어?”
“야옹!”
일리아의 품으로 폴짝 뛰어든 사샤는 그녀가 들고 있는 목걸이를 킁킁거리며 호기심을 나타냈다. 백금으로 만든 줄에 커다란 블루 다이아몬드가 달린 목걸이였다. 일리아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왠지 익숙한 목걸이인데…….”
그것은 바로 사냥 대회의 상품이기도 했던 ‘그란디아의 눈물’이었다. 사냥 대회가 흐지부지 끝난 이후로는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설마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테오도르가 저주를 확인하겠다고 일만 벌이지 않았다면 그란디아의 눈물이 그라니체 가문의 소유가 되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니 일리아는 괜히 아쉬워졌다.
“비싸겠지, 이거?”
“야옹!”
일리아가 그란디아의 눈물을 내려다보며 연거푸 한숨을 내쉬자 사샤가 앙증맞은 앞발을 들어 올려 블루 다이아몬드를 만지작거렸다. 그 순간 사샤의 앞발과 보석 사이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눈이 부실 정도로 성스러운 이 힘은 분명 신성이었다. 일리아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사샤를 바라보았다.
“사샤, 너 신성을 쓸 줄 알아?”
“야옹!”
그러나 사샤는 천진한 얼굴로 울기만 할 뿐이었다. 일리아는 얼른 보물 더미를 뒤졌다.
“이, 이것도 한번 해 볼래?”
일리아가 보물 더미 사이에서 황금으로 만든 꽃병을 가져오자 사샤는 고개를 휙 돌렸다. 꽃병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건?”
이번에 가져온 것은 백금으로 만든 숟가락이었다. 반질반질한 숟가락을 빤히 쳐다보던 사샤는 다시금 앞발을 들어 올려 숟가락을 문질렀다. 곧 사샤에게서 피어오른 신성이 숟가락에 스며들었고, 놀랍게도 백금의 숟가락은 신물이 되었다.
일리아는 화색을 띠며 사샤를 안아 올렸다. 그동안 묘하게 똑똑한 것 같다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설마 신의 힘을 가진 고양이였을 줄이야!
“이 복덩이! 너를 어쩌면 좋니!”
“야옹!”
한참이나 사샤를 안고 구르던 일리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엄청난 사실을 테오도르와 이사벨라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일리아는 창고를 벗어나기도 전에 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몸을 움직이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온몸의 힘이 턱 풀렸기 때문이다. 전처럼 가수면에 들 정도는 아니었지만 몸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무력감이 들었다.
“하아, 진짜 심각했었나 보네.”
“야옹!”
일리아가 문에 기대어 주저앉자 사샤가 그녀의 다리에 몸을 비비적거리며 연신 울어 댔다. 그러나 신성은 일리아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샤의 몸이 새하얗게 빛나도 이미 고갈되어 버린 마력은 차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일리아는 애써 웃으며 사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사샤. 조금만 쉬면 나아질 거야.”
“야옹!”
“일단 세실라를 좀 불러 줄래? 침실까지만 옮겨 줬으면 좋겠는데…….”
일리아가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사샤가 전광석화와 같이 창고를 벗어났다. 작은 고양이가 향한 곳은 세실라의 방이었다.
“야옹, 야옹!”
사샤가 구슬프게 울며 문을 두드리자 세실라가 비몽사몽인 얼굴로 문을 열었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야, 사샤…….”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아가씨가 쓰러져?”
“야옹!”
사샤와 함께 창고로 뛰어간 세실라는 문 앞에 쓰러져 있는 일리아를 발견하곤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는 것이, 마력 고갈 현상이 분명했다.
세실라는 입술을 잘근잘근 짓이기며 일리아를 침실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일리아를 침대에 눕히고 차갑게 굳어 있는 그녀의 몸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원래 마력은 타고나는 것이었기에 누군가에게 넘겨준다든가 빼앗아 온다든가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제네리아처럼 예외가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그러했다. 그러나 세실라의 마력은 원래 일리아와 한 몸이었던 것처럼 무리 없이 그녀의 몸에 스며들었다. 그것은 곧, 세실라가 드래곤의 마력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일리아는 점점 충만하게 차오르는 마력을 느끼며 살며시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로 근심 가득한 세실라의 얼굴이 보였다.
“…세실라?”
“일어나셨어요, 아가씨?”
“응. 이제 괜찮아. 그런데…….”
일리아는 가만히 시선을 내렸다. 맞닿아 있는 손으로 마력이 전해져 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떻게……?”
“…설명하자면 길어요.”
일리아의 몸이 어느 정도 괜찮아진 듯 보이자 세실라가 얼른 손을 떼며 말했다.
“다 말할 수는 없어요. 허락받지 못했거든요.”
“허락?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세실라?”
사샤를 품에 안은 세실라는 한참을 우물쭈물거리며 말을 골랐다. 그러다 고개를 푹 숙이며 살며시 운을 뗐다.
“그러니까…….”
“괜찮으니까 말할 수 있는 데까지만 말해 봐.”
“전 사람이 아니에요.”
세실라의 입에서 갑자기 현실성 없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사람이 아니라고?”
“네. 전 그라니체 가문을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드래곤의 편린이에요.”
“하지만 세실라는 오라버니가 보육원에서 데려왔다고…….”
“…맞아요. 만들어진 이후에 클리드 님께 거두어졌어요.”
일리아는 눈썹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드래곤이 죽었다고 알려진 것은 벌써 수백 년도 더 된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세실라를 만들어 낼 수가 있었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