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아자카산맥은 과거에 마족이 살았던 곳이자 바이에드와 제네리아가 처음 만난 곳이기도 했다. 만약 바이에드를 데려간 이유가 복수를 위해서고, 복수의 수단으로 봉인을 푸는 것을 택한 거라면 두 사람 모두에게 의미가 있는 아자카산맥에서 의식을 행했을 확률이 가장 높았다. 봉인을 풀면 어차피 세상이 혼돈으로 뒤덮일 텐데 굳이 숨어서 봉인을 풀 필요가 없기도 했다.
‘일단 거기부터 시작해야겠군.’
아무런 단서도 없이 대륙을 뒤지는 것보다는 의심이 가는 곳부터 수색하는 게 나았다. 그러나 연고가 있는 지역이 하나뿐인 만큼 제네리아 역시 습격에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을 터였다.
‘확인만 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한 테오도르는 넌지시 입을 열었다.
“수색은 아자카산맥부터 시작한다.”
“아자카산맥… 말입니까?”
“아자카산맥은 과거에 마족의 근거지였던 곳이다. 마족에게 있어 의미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지.”
테오도르는 루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루크 아베르타 기사단장. 경이 책임지고 수색대를 이끌도록.”
“맡겨 주십시오, 전하.”
“마족의 곁에는 피델리오 플레타와 마물이 있어. 절대 방심하지 마.”
“명심하겠습니다.”
회의가 파하고 보름 후, 루크를 필두로 한 기사단은 수백 명의 군대를 이끌고 아자카산맥으로 향했다. 적진으로 가는 것치고는 적은 인원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번 출정의 목표는 제네리아와 일전을 치르는 것이 아닌, 아자카산맥이 성지가 맞는지 확인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제네리아 측의 전력은 적었지만 두 사람 모두 뛰어난 마법사인 데다가 마물 역시 성가셨다. 마법과 마물을 이용하여 화력 싸움을 해 온다면 기사단으로서는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 차원이 열리면 수많은 마족과 전쟁을 치러야 할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의 전력 손실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테오도르는 전투를 최대한 피하고 부득이한 경우에만 무기를 들라고 명령했다.
‘조용하군.’
아자카산맥은 스산했다. 깊게 내려앉은 어둠과 폐허가 된 산세가 일견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주변을 면밀히 살핀 루크는 수색대와 함께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눈이 하얗게 쌓인 바닥에서 뽀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루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주머니에서 하얀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바로 얼마 전 일리아가 별궁 지하에서 찾은 신물이었다.
사실 이렇게 어둑한 산속을 횃불도 없이 수색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길 수 있는 이유는 신물을 이용하면 굳이 시야를 확보하지 않아도 성지를 찾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사벨라는 루크에게 신물을 건네며 ‘목걸이에 반응이 오면 바로 돌아와요.’ 하고 말했다. 지금의 그들로서는 제네리아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제로스 제국의 기사라는 것을 평생 자랑스럽게 여겨 왔던 루크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묵묵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전쟁은 자존심으로 치르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 것보다는 꼬리를 말고 도망치더라도 살아남는 게 중요했다. 루크는 목걸이를 손에 단단히 감으며 아자카산맥의 중심부로 향했다.
‘아직 반응은 없어.’
벌써 아자카산맥에 들어선 지 한 시간이 훌쩍 지났으나 신물은 조용하기만 했다. 아자카산맥에 성지가 있기를 바랐던 루크는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만약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했던 아자카산맥에 성지가 없다면 그들은 남은 네 달 동안 온 대륙을 뒤져야 할 수도 있었다. 지금은 주변국과의 관계가 좋지 않아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지 않던가. 루크는 ‘적어도 아제로스 제국 내에는 성지가 있었으면 좋겠군.’ 하고 생각하며 수색대를 독려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커다란 바위가 있는 산봉우리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루크의 손에 감겨 있던 신물이 돌연 옅은 빛을 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신검의 흔적을 감지한 것이었다.
루크는 신물을 갈무리하곤 침착하게 퇴각 명령을 내렸다. 곧, 루크의 명령을 전달받은 기사들이 분주하게 산을 내려갔다. 벌써 밤이 되었는지 기온이 많이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는 전투를 치를 수 없었다. 들키기 전에 빨리 아자카산맥을 벗어나야만 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때, 어둠 속에서 화가 난 듯한 목소리와 함께 돌풍이 불어닥쳤다. 기민하게 검을 뽑아 든 루크는 바람을 피해 물러나며 자세를 다잡았다.
“프노이트인이로군. 피델리오 플레타인가?”
루크의 물음에 피델리오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며 말했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수적으로는 이쪽이 우세하다만.”
“질적으로는 아니지.”
자신만만한 피델리오의 말에 루크는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머지않아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산맥을 내려가던 수색대원들이 피델리오의 마법에 당한 모양이었다.
“피델리오 플레타…….”
“전부 죽여 주마.”
피델리오가 한 손을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소름 끼치는 울부짖음이 귓가를 울렸다. 우거진 수풀 속에서 전광석화와 같이 튀어 오른 마물이 검을 들고 서 있는 대원들을 향해 커다란 손톱을 휘둘렀다. 깜짝 놀란 대원들이 다급하게 검을 휘둘러 막아 냈지만 그뿐이었다. 은빛 검날을 아무렇지도 않게 부순 손톱은 대원들의 몸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겼다.
건장한 몸이 바닥에 허물어지고, 어둠 속에서 붉은 선혈이 솟구쳤다. 피를 한껏 뒤집어쓴 마물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재차 발을 굴렀다. 마물이 손톱을 휘두를 때마다 대원들 역시 하나씩 쓰러져 갔고, 가슴이 선득해진 루크는 이를 악물었다.
‘이 정도로 강한 마물이 넘어왔을 거라고는…….’
루크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검으로 일가를 이룬 그 역시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마물은 강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만은 없었다. 벌써 절반이 넘는 대원을 잃었다. 남은 대원들만이라도 살려서 돌아가야 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루크는 종횡무진으로 날뛰는 마물에게 빠르게 날아들었다. 그러고는 검에 마력을 입힌 후 있는 힘껏 휘둘렀다. 기습으로 행한 공격이었기에 어느 정도는 타격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마물의 몸은 강철만큼이나 단단했다. 오히려 검을 쥔 손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크르르륵…….”
마물은 붉은 이빨을 번뜩이며 루크를 돌아보았다. 찰나의 순간, 루크의 검과 마물의 손톱이 십여 차례나 부딪치며 거센 불꽃을 피워 냈다. 푸른 마력을 한껏 두른 루크의 검은 마물의 손톱을 버텨 낼 수 있었지만 마력의 상성 때문인지 점차 힘에 부쳤다.
루크마저 고전하는 듯하자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대로는 성지에 관한 소식을 황성에 가져가기도 전에 전멸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최선의 선택을 해야 했다. 남은 대원들은 바쁘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단장님!”
루크가 마물을 상대하는 사이에 전열을 가다듬은 대원들이 그의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얼른 몸을 피하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냐!”
“기사단에는 단장님이 필요합니다. 여긴 저희가 막고 있을 테니 얼른 피하십시오!”
대원들이 사방에서 검을 휘두르며 마물을 몰아세웠다. 그러나 루크조차 버텨 내는 것이 고작이었던 마물을 일개 대원들이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대원들이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하자 루크가 얼굴을 구기며 외쳤다.
“너희들로는 상대가 안 된다! 내가 시간을 벌 테니 얼른 퇴각해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기사단에는…….”
“여기서 전멸하면 누가 이 소식을 황성에 전하겠느냐! 잔말 말고 도망치기나 해!”
루크는 대원들을 뒤로 밀쳐 내곤 검을 고쳐 잡았다. 그의 손바닥에는 이미 상처가 가득했다. 기껏해야 두세 번 더 검을 휘두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루크는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 마물을 붙잡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다. 루크는 열 명, 아니,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누구든 살아남아서 황성에 소식을 가져가기를 바랐다.
“눈물겨운 전우애군. 어차피 다 죽을 텐데.”
피델리오가 코웃음을 치며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사방에서 거센 돌풍이 몰아치며 대원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루크와 마물의 전투를 가만히 지켜만 보던 그가 마침내 전투에 가세하기 시작한 것이다.
앞에서는 마물이, 뒤에서는 피델리오의 마법이 수색대를 죄어들었다.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 루크는 애써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미 한계에 달해 있던 검은 처참히 부서지고 말았고, 마물이 소름 끼치는 괴성을 내지르며 루크의 복부를 꿰뚫었다.
그때였다. 루크의 안주머니에 들어 있던 목걸이가 돌연 새하얀 빛을 터뜨렸다.
“크와아아악!”
순도 높은 신성에 마물은 몸을 비틀며 비명을 터뜨렸고, 루크는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뛰어!”
살아남은 대원들이 돌풍을 피해 아자카산맥 곳곳을 내달렸다. 사위가 어두워 방향을 가늠하기가 힘들었지만 그들은 그저 살아야 한다는 일념하에 죽기 살기로 뛰었다. 다행히도 피델리오는 도망치는 대원들의 뒤를 쫓지 않았다. 마치 아자카산맥을 떠나지 못할 이유라도 있는 것처럼.
어느새 아자카산맥을 완전히 벗어난 그들은 진입로였던 산맥 어귀에 다시 모였다.
“허억, 헉……. 괜찮으십니까, 단장님?”
“…나는 괜찮다.”
“근처에서 치료라도 하고 가시는 게…….”
“아니. 황성으로 돌아간다.”
겉옷을 벗은 루크는 피가 줄줄 흐르는 복부를 세게 동여맸다. 그러고는 진입로에 매어 두었던 말을 타고 황성으로 향했다. 피를 많이 흘린 탓에 자꾸만 정신이 흐려졌지만 루크는 성지를 찾았다는 희망적인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이를 악물며 버텼다.
두어 시간을 더 달리자 황성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성문을 지키는 근위대원들을 지나 황태자궁 앞에 다다른 루크는 복부를 움켜쥐며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뒤편이 조용한 것을 보니 아직 다른 대원들은 도착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크윽……. 어서 전하를 뵈어야 한다…….”
“이대로는 위험합니다! 일단 치료부터 하셔야 합니다!”
한 근위대원이 허물어지려는 루크의 몸을 붙드는 것과 동시에 시종을 시켜 마법사를 불러오게 했다. 출혈의 정도로 미루어 보아 의사가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상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종은 곧장 마차를 타고 마법사단으로 향했고, 얼마 후 일리아와 함께 돌아왔다.
“아베르타 단장님!”
마차에서 내린 일리아는 루크의 상처를 확인하곤 깜짝 놀랐다. 커다란 이빨 같은 것이 복부를 완전히 관통하면서 장기마저 손상되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상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