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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80)화 (80/101)

80화 

“그대는 괜찮아?”

“네. 저는 괜찮아요. 그나저나 드래곤의 마력이 이렇게나 가득했다는 건…….”

“이곳이 드래곤의 거처였을 확률이 높지.”

왠지 주위에 널려 있는 모든 게 달리 보였다. 드래곤이 그라니체 가문의 시조라고는 하나 수백 년이 지난 지금은 그저 전설적인 존재일 뿐이지 않던가. 과거의 잔재를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니 감개가 무량했다.

“그래서 전하께서 이곳을 언급하셨던 걸까요?”

“그럴 수도 있지. 드래곤은 그대의 뿌리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카일루스는 그렇게 말하며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요? 움직일 수 있겠어요?”

“덕분에. 얼추 걸을 수는 있을 것 같아.”

“그럼 얼른 가요. 어차피 여기서 더 찾을 건…….”

“잠깐만.”

카일루스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동굴 끄트머리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돌연 바닥을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카일루스?”

“뭔가가 느껴져.”

아까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동굴을 가득 메우고 있던 드래곤의 마력이 사라지자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치 신성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한참이나 바닥을 더듬거리던 카일루스는 먼지 더미 사이에서 작은 손잡이를 발견했다. 손잡이를 힘껏 잡아당기니 얕게 파여 있는 공간에 목걸이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목걸이?”

“신성이 느껴져.”

“정말요?”

일리아는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황금빛 보석이 달린 새하얀 목걸이는 미약하게나마 신성을 품고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수확이 있어서 다행이군. 일단 나가지.”

“네!”

목걸이를 챙긴 그들은 지하 동굴을 나와 다시금 좁은 통로를 지났다. 혹시나 문이 안 열리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통로 안쪽에서는 별다른 장치 없이 회전문을 열 수 있었다.

일리아는 푸하, 하고 숨을 내쉬며 말했다.

“역시 사람은 지상에 살아야 해요.”

“동감이야.”

목걸이를 주머니에 넣은 일리아는 어깨를 살짝 떨었다. 복도가 아까보다 싸늘해진 것을 보니 어느새 밤이 된 모양이었다.

하늘이 검게 물든 이후로 계절이 사라지고 밤낮의 경계가 흐려졌다. 시간의 흐름은 오직 시계를 통해서만 알 수 있었고, 지금처럼 시계가 없는 곳에 있을 때는 온도의 변화를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불편하기 그지없었지만 일리아는 이렇게라도 때를 구분할 수 있는 게 어딘가 싶었다.

갑자기 들어찬 한기에 일리아가 팔을 문지르자 카일루스가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데려다줄게.”

“괜찮아요. 카일루스야말로 얼른 쉬어야죠.”

“그대를 데려다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어.”

카일루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일리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단단한 팔을 통해 포근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일리아는 얼굴을 발그레 물들이며 손을 바르작거렸다. 매일 카일루스의 손을 잡고 그의 품에 안기고 있으면서도 왜 항상 부끄러운지 모를 일이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일리아와 카일루스는 말없이 넓은 복도를 걸었다.

* * *

이튿날, 오전 훈련을 마친 일리아는 곧장 이사벨라를 찾아갔다. 별궁의 지하 동굴에서 찾은 목걸이를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이사벨라는 언제나처럼 방긋 웃으며 일리아를 맞이해 주었다.

“수색은 잘 끝냈어요, 일리아?”

“네. 도와주신 덕분에 잘 끝냈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에요. 그나저나 신물은요? 찾았어요?”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상자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사벨라는 조심스럽게 상자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황금빛 보석이 달린 새하얀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굳이 만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건 신물이 확실했다.

“잘 찾았네요.”

“그럼 이제 차원의 통로를 봉인할 수 있는 겁니까?”

“아니요. 이걸로는 부족해요.”

목걸이에 신의 힘이 깃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차원의 통로를 봉인하고 유지하기에는 내재된 신성이 너무나 미약했다. 이 정도면 봉인을 완성하기도 전에 목걸이가 부서질 수도 있었다.

이사벨라의 부정적인 말에 일리아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곧 모든 상황을 끝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직은 꿈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다른 궁도 얼른 수색해 봐야겠군요.”

“도와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뭘요. 그런데 이거, 어디에서 찾은 거예요?”

이사벨라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듯이 보였지만 일리아는 모른 척 태연하게 대답했다.

“별궁 지하에서 찾았습니다.”

“결국 찾았군요!”

“그런데 전하, 왜 별궁 지하에 관해 미리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일리아가 직접 확인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일종의 보물찾기 같은 거죠. 거기는 일리아의 조상인 드래곤이 살았던 곳이거든요.”

드래곤은 신이 엘리시오를 위해 만든 최강의 무기였다. 현존하는 모든 마법을 다룰 수 있는 데다가 마력의 성질 또한 특이해 감히 대적할 수 있는 종족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드래곤에게도 결점은 있었다. 마력이 지나치게 강한 탓에 주기적으로 수면에 들어 마력을 안정화시키지 않으면 폭주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마력을 빠르게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본체 상태로 수면에 들어야 했다. 하지만 황성에는 드래곤이 편하게 수면을 취할 수 있을 만한 공간이 없었고, 그라니체 저택은 드래곤의 본체가 들어가기에는 너무 작았다. 그렇다고 성만 한 드래곤을 외부에 덩그러니 놓아둘 수는 없었던 터라, 엘리시오는 기지를 발휘해 지하에 굴을 팠다. 공기가 안 좋기는 했지만 드래곤은 나름대로 마음에 들어 했다. 적어도 수면을 취하는 동안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제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 거기서 잤을 테니 정제되지 않은 마력이 공기 중에 남아 있었을 거예요.”

“네. 그 마력 때문에 카일… 각하께서 큰일 날 뻔하셨습니다.”

“어머, 지금은 괜찮아요?”

“네. 이제는 괜찮으신 것 같았어요.”

“에스테반 공작이라면 괜찮을 줄 알았어요. 미안해요.”

이사벨라의 사과에 일리아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신물도 찾았고요. 그러니까 너무 괘념치 마세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것보다 동굴에는 신물 말고도 다른 게 많이 있었습니다.”

“다른 거요?”

이사벨라가 일리아를 별궁 지하로 보낸 이유는, 물론 신물을 찾기 위해서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일리아에게 드래곤의 마력을 선물하기 위해서였다. 일리아가 인간이라고는 하나 드래곤의 핏줄을 이은 것은 사실이었기에 정제되지 않은 마력이어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동굴 안에 마력 말고도 다른 것이 많이 있었다니. 처음 듣는 소리였다.

이사벨라가 팔짱을 끼며 고민하자 일리아가 씩 웃으며 말했다.

“마력은 다 처리했으니 전하께서도 한번 가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요? 대체 뭐길래 그래요?”

“직접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으음, 일리아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궁금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후회는 없으실 겁니다.”

설렘 가득한 일리아의 모습에 이사벨라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이후로는 계속 바빠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 마왕의 재림 】

테멜 왕국의 동향에 또다시 이변이 생겼다. 북부에 남아 있던 병력을 모조리 수도로 귀환시킨 것이다. 내전이 생각보다 크게 번진 모양이었다. 정찰병의 말로는 아제로스 제국을 감시하던 인력마저 모조리 철수시켰다고 하니, 당분간 테멜 왕국에 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듯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직까지도 침묵하고 있는 프노이트 왕국과 신물이었다. 최근에 일리아가 별궁 지하에서 신물을 찾아내기는 했지만 신성이 너무 미약해 봉인의 열쇠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발표가 있었다. 그에 안달이 난 귀족들은 황성의 시종들을 닦달해 황성 구석구석을 뒤지게 했고, 가치 있어 보이는 물건을 발견하면 곧장 일리아에게 가져가도록 지시했다.

덕분에 일리아는 발품을 팔지 않아도 되었지만 시종들이 물건을 빼돌리는 일도 빈번히 발생해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시국이 시국이지 않은가. 인간계의 상황을 정확히 모르는 시종들은 돈을 마련해 타국으로 가면 전쟁을 겪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수차례 경고를 했음에도 그런 일이 계속해서 벌어지자 테오도르는 결국 현 상황을 모두에게 이야기했다. 그로 인해 일부 시종들은 도망을 갔고, 남은 시종들은 합심하여 신물 찾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황성 보물 절도 사건이 일단락되고, 어느덧 두 달이 훌쩍 지났다. 차원의 통로는 여전히 조용했다. 이따금씩 마력이 요동치며 굉음을 토해 내기는 했지만 마족이나 마물이 쏟아져 나오지는 않았다.

이사벨라는 차원의 통로가 오랜 시간 동안 봉인되어 있었던 탓에 마력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설명했다. 또한 마물이 인간의 마력에 간섭하여 차원을 넘었던 것처럼 자연계의 마력에 간섭을 일으켜야 차원을 완전히 넘을 수 있는데 봉인의 여파로 두 차원 사이의 마력이 틀어졌기 때문에 충돌을 일으키는 거라고도 덧붙였다.

당장은 괜찮겠지만 안심하기엔 일렀다. 차원이 완전히 이어지게 되면 수많은 마족과 마물을 몰아내고 차원의 통로를 봉인해야만 했는데 여기에는 결정적인 위험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사벨라는 회의장에 앉은 귀족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황성에서는 봉인 의식을 행할 수 없어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동안은 아이기스 때문에 긴가민가했는데 이제는 확실하게 알겠어요. 아로스에서는 봉인 의식을 치를 수 없어요. 차원을 봉인하기 위해서는 마족이 봉인을 푼 장소로 가야만 해요.”

아로스는 신검을 소실하면서 이미 성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다시 차원을 봉인하기 위해서는 신검의 힘이 깃든 새로운 성지를 찾아야만 했는데, 이 넓은 대륙을 뒤져 단 하나뿐인 성지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하지 그지없었다. 귀족들은 저마다 우려의 목소리를 내며 웅성거렸다.

‘마족이 봉인을 푼 장소라…….’

테오도르는 가만히 입가를 쓸었다. 의심 가는 곳이 있긴 했다. 바로 아자카산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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