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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79)화 (79/101)

79화 

일리아는 동굴 안에 있는 물건들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주변을 면밀하게 살폈다. 신물은 일종의 아티팩트로서 신성을 주입하여 발동시키지 않는 이상은 탐지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일리아는 혈통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이사벨라를 통해 신성을 느껴 본 적도 있어 물건을 만져 보면 신성이 내재되어 있는지 아닌지 확인이 가능했지만 다른 단원들은 이사벨라의 신성은 물론이고 이미 각성을 마친 카일루스의 신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물론 황족의 마력로를 살피는 게 무서워서 제대로 탐지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말이다.

‘일리가 있어. 나 같아도 무서웠을 거야.’

일리아는 카일루스와 접점이 없었기 때문에 그를 실물로 본 건 출정식 때가 처음이었다. 그때, 서릿발같이 차가운 황금빛 눈동자를 보며 확신에 찼던 기억이 났다.

- 와, 이거 이겼다.

그만큼 카일루스가 주는 위압감은 대단했다. 지금은 능글거리는 미남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지만. 일리아는 ‘내가 문제인 건가?’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자신을 돌이켜 보았다. 어쩐지 자신의 옆에만 있으면 멀쩡하던 사람도 능글거리게 되는 듯했다. 에나도 그렇고, 카일루스도 그렇고.

‘차가운 것보다는 낫지, 뭐.’

고개를 휘휘 내저어 상념을 털어 낸 일리아는 먼지가 가득한 책장 앞에 섰다. 책에 신성이 깃들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책의 내용이 궁금할 뿐이었다.

일리아는 책장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책을 꺼내 들었다. 먼지를 탁탁 털어 내니 낡은 종이 위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가 보였다. 문자의 형태로 미루어 보아 고대에 쓰던 아제로스어인 모양이었다.

‘그럼 얼마나 오래된 거야, 대체?’

일리아는 아예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펼쳤다.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림이 많이 그려져 있어 보는 것 자체는 재미있었다.

낡은 책 안에는 드래곤과 신검, 그리고 소박한 저택과 정원을 그린 그림들이 가득했다. 오래되어 선이 흐려지고 군데군데가 지워졌음에도 형태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이건…….”

어느덧 마지막 장이었다. 책의 마지막 장에는 긴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땋아 내린 여성의 그림이 있었다. 다른 그림들에 비해 정성이 많이 들어간 게 여실히 느껴졌다.

“누구지?”

일리아가 그림을 더욱 자세히 보기 위해 불꽃을 하나 더 피워 올렸을 때였다.

“수색하자더니 놀고 있어?”

“깜짝이야!”

돌연 카일루스가 등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깜짝 놀란 일리아는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렸고, 차가운 돌바닥에서 흙먼지가 폴폴 일어났다.

“콜록……. 갑자기 나타나면 어떡해요?”

“그대가 놀고 있으니까 그렇지.”

“논 거 아니에요! 열심히 살펴보고 있었다고요.”

일리아는 뚱한 얼굴로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을 열심히 살펴보고 있었군.”

“…책도 열심히 살펴본 거예요.”

일리아의 옆에 주저앉은 카일루스는 가만히 책을 내려다보았다.

“고대 아제로스어?”

“읽을 줄 알아요?”

“어느 정도는.”

일리아에게서 책을 건네받은 카일루스는 책장을 이리저리 넘기다가 다시 마지막 장을 펼쳤다.

“다른 글자는 대부분이 지워져서 잘 모르겠지만 이건 확실히 알겠군.”

“뭐라고 써 있는데요?”

“엘리시오 그란디아.”

“…초대 황제 폐하요?”

“그래. 이건 초대 황제 폐하의 초상이야.”

일리아는 그림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인상이 이사벨라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초대 황제 폐하께서 여성분이셨을 줄은…….”

“성별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으니까.”

“그러니까요.”

카일루스가 책을 덮자 일리아가 표지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혹시 제목도 읽을 수 있어요?”

“‘엘리시오를 기리며.’라고 쓰여 있어.”

“초대 황제 폐하의 사후에 그려진 책이겠네요.”

“그렇지.”

일리아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카일루스를 돌아보았다.

“우리 다른 것도 한번 봐 봐요.”

바람을 일으켜 바닥의 먼지를 털어 낸 일리아는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을 모조리 꺼내 왔다. 바닥에 책이 켜켜이 쌓이기 시작하자 카일루스의 얼굴이 점차 굳어졌다. 아무래도 괜히 아는 척을 한 듯했다. 마법사의 탐구심을 무시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얼른 읽어 주세요!”

카일루스는 일리아의 허리를 당겨 안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것도 보상을 받든가 해야겠어.”

그러자 일리아가 배시시 웃으며 카일루스의 볼에 입을 맞췄다. 어린아이나 할 법한 가벼운 입맞춤이었지만 카일루스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항상 수줍어만 하던 일리아가 탐구심 앞에서는 이렇게나 대담해질 줄이야.

“이제 됐죠? 읽어 주세요!”

카일루스는 내심 서운했지만 티 내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수확은 있었으니까.

작게 헛기침을 하며 다음 책을 펼쳐 든 카일루스는 책장을 팔락거리며 말했다.

“이것도 아까 본 것과 같은 그림책이야.”

“그럼 이거는요?”

“이건… 드래곤에 관한 책 같은데.”

카일루스는 일리아가 건네주는 책들을 면밀히 살폈다. 절반은 ‘엘리시오를 기리며’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책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드래곤에 관한 책이었다.

“드래곤이요?”

“그래. 아이기스에 관한 것도 있군.”

고대 아제로스어 사이에 고대 룬어가 빼곡하게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아이기스를 구성하는 수식인 듯했다. 일리아는 고대 룬어의 해독법이 소실되었다는 사실에 탄식하며 낡은 종이를 손끝으로 쓸었다.

“아쉽네요. 아이기스를 해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클리드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오라버니가 안 알려 주던걸요.”

“그대한테도?”

“네. 엄청 치사하죠?”

카일루스는 픽 웃으며 책을 내려놓았다.

“치사하네. 그런 의미에서 수색이나 계속하지.”

“네. 이제 그만 놀게요.”

일리아는 꺼내 왔던 책들을 책장에 가지런히 정리하고 다시금 수색에 나섰다. 그러나 동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폈음에도 신의 힘이 깃든 물건은 찾을 수 없었다.

“카일루스, 그쪽은 어때요?”

“없는 것 같아.”

“이쪽도요. 그럼 별궁도 꽝인가 봐요.”

일리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카일루스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크라바트를 만지작거리는 그의 얼굴이 어쩐지 붉어 보였다.

“카일루스, 어디 아파요?”

“…내가?”

“얼굴이 붉은데요.”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그러고 보니 조금 어지러운 것 같기도…….”

카일루스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깜짝 놀란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몸을 붙들며 천천히 주저앉았다.

“가, 갑자기 왜 그래요! 언제부터 아팠던 거예요?”

“…아까까지는 괜찮았는데.”

“그런데 왜 이래요, 갑자기.”

“숨 쉬기가 조금 불편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일리아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먼지가 많긴 했으나 숨 쉬기가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카일루스가 이상을 느꼈다는 것은 먼지 외에 또 다른 원인이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손을 꼭 잡으며 탐지 마법을 펼쳤다. 그러고는 깜짝 놀랐다. 드래곤의 마력이 동굴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워낙 익숙한 기운이라 눈치채지 못했지만 공기 중의 마력 함유량이 보통이 아니었다. 일반인은 숨도 못 쉴 정도로 말이다. 그런 곳에서 수십 분을 넘게 있었으니 몸에 이상이 생길 수밖에.

‘이럴 때는 어떡하지…….’

곰곰이 고민하던 일리아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일단은 공기 중에 흐르는 마력을 조금이라도 없애야만 했다. 그래야 이곳을 벗어날 체력 정도는 회복할 수 있을 테니까.

“카일루스, 조금만 기다려요.”

“…쉬면 나아질 거야. 너무 신경 쓰지 마.”

“이렇게 아파하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눈물을 거칠게 닦아 낸 일리아는 허공에 띄워 놓은 작은 불꽃을 천장 끝까지 올려 보냈다. 그러고는 마력을 불어넣어 불꽃의 크기를 점차 키워 나갔다. 체내의 마력이 빠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공기를 가득 메우고 있던 드래곤의 마력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법은 체내의 마력과 자연계의 마력이 공명하고 융합하는 것으로 실체를 가진다. 즉, 마력을 많이 소모하는 마법을 사용할수록 동굴 안에 고여 있는 마력 또한 빠르게 사라질 거라는 것.

그러나 마력을 머금은 불꽃이 동굴 전체를 밝힐 정도로 커졌음에도 드래곤의 마력은 건재했다. 이 정도 마법으로는 어림도 없는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얼굴을 구기며 불꽃을 꺼 버렸다.

‘마력 소모를 위해 광역 마법을 쓰면 동굴이 무너질 거야. 하지만…….’

일리아는 카일루스를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카일루스의 상태가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드래곤의 마력이 카일루스의 육체는 물론이고 마력에까지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입술을 짓이기며 초조하게 고민하던 일리아는 ‘오라버니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생각하며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그때였다. 핏빛 목걸이가 밝게 빛나며 주변의 마력을 빠른 속도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목걸이에 흡수된 마력의 일부가 일리아의 체내로 흘러 들어왔다.

일리아는 눈을 깜박거리며 목걸이를 놓았다. 불과 몇 초 사이에 동굴을 메우고 있던 드래곤의 마력이 전부 사라졌다. 게다가 목걸이를 통해 들어온 마력이 일리아의 체내에 완전히 자리 잡으면서 마력량도 제법 늘었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카일루스는?’

목걸이에서 시선을 뗀 일리아는 카일루스를 돌아보았다.

“카일루스, 괜찮아요?”

“괜찮아.”

“조금 더 회복되면 나가요. 자, 여기 기대요.”

일리아는 카일루스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축 늘어진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어깨 근처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이런 경험은 처음이어서.”

“저도 처음이에요.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어쩔 수 없었잖아.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마력 때문이에요. 동굴 안에 가득 차 있던 드래곤의 마력에 짓눌린 거죠.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요. 이렇게 살아 있는 게 용할 정도라고요.”

일리아는 문득 클리드가 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마계 역시 이상할 정도로 마력의 농도가 짙어 생존이 어렵다고 했던 말. 짙은 농도의 마력은 결정화되어 마정석을 만들어 내고 수련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이렇게 치명적인 해를 끼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그냥 마력도 아니고 무려 드래곤의 마력이었다. 카일루스로서는 더욱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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