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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78)화 (78/101)

78화 

* * *

신물의 수색은 시작부터가 난항이었다. 일리아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신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수재라고 불리던 오스카마저 신성을 감지해 내지 못했다.

덕분에 이 큰 황성을 일리아 혼자 수색하게 생겼다. 작은 궁 하나만 해도 꼬박 며칠이 걸릴 텐데 어떻게 혼자서 모든 궁을 수색하겠는가. 반년이 아니라 일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을 터였다.

‘이럴 때 오라버니라도 있었다면…….’

연거푸 한숨을 내쉬던 일리아는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지금은 없는 사람을 아쉬워하기보다는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할 때였다.

‘일단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부터 찾아보자.’

현재 이 황성에서 신성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레이븐과 테오도르, 그리고 이사벨라와 카일루스뿐이었다. 하지만 레이븐은 마법사 협회 소속으로서 마법 연구에 한창이었고, 테오도르와 카일루스는 국무 때문에 바쁜 상황이었다. 바이에드를 대신하여 할 일이 많은 그들에게 신물의 수색까지 도와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남은 건…….’

일리아는 당장 걸음을 옮겼다.

“어서 와요, 일리아!”

그러나 막상 해사한 이사벨라의 얼굴을 마주하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엘리시오의 환생이라고는 하나 지금은 그저 열다섯 살의 어린 황녀가 아닌가.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는 양심에 찔렸다.

일리아는 ‘내가 잠 좀 줄이면 되지, 뭐.’ 하고 생각하며 이사벨라와 인사를 나누었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에요?”

“그냥 안부차 들렀습니다.”

“에이, 아닌 것 같은데. 일단 들어와요.”

일리아를 응접실로 안내한 이사벨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차를 우렸다. 곧 향긋한 차향이 은은하게 응접실을 메웠다.

“말해 봐요. 무슨 일이에요?”

이사벨라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기대하는 게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게…….”

일리아가 쉽게 입을 열지 못하자 이사벨라의 입가에 돌연 음흉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냥 말해도 돼요.”

“하지만 말씀드리기가 조금…….”

“뭐 어때요, 우리 사이에!”

이사벨라는 일리아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말했다.

“제가 이래 봬도 연애 상담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다 들어 줄 테니까 얼른 말해 봐요.”

“네? 연애 상담이요?”

“아니에요?”

“…아닙니다. 카일루스와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걸요.”

이사벨라는 쯧, 하고 혀를 차며 일리아의 손을 놓았다.

“그럼 뭔데요?”

“사실… 신물의 수색을 도와주실 수 있는지 여쭈어보려고 했습니다.”

“아아, 신물 때문이었군요.”

“네. 저 혼자서는 불가능할 것 같아서요.”

“그건 그렇겠네요. 신성은 아무나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고개를 작게 끄덕거린 이사벨라는 책장에서 지도 한 장을 꺼내 왔다. 지도에는 황성 내에 있는 궁의 위치와 용도가 간단히 적혀 있었다.

“잘 봐요.”

이사벨라는 손가락을 들어 총 다섯 개의 궁을 가리켰다. 그중에는 카일루스가 사용하는 별궁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단 제가 알려 준 곳부터 수색해 봐요. 창고만 뒤지면 될 테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여기서도 신물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제가 도와줄게요.”

“감사합니다, 전하.”

“아, 그리고 별궁의 지하 창고는 에스테반 공작과 함께 가요. 신성을 써야 열릴지도 모르거든요, 거기는.”

“알겠습니다.”

일리아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물론, 이사벨라가 짚어 준 곳에서 신물이 나오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일단은 수색할 장소가 특정되었으니 일리아로서는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찾아뵙길 잘했네.’

일리아는 이튿날부터 신물 수색에 나섰다. 대부분이 비어 있는 궁이었기에 수색에는 고작 사나흘밖에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네 개의 궁 어디에서도 신물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제 남은 곳은 별궁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별궁은 카일루스의 집무실이 있는 곳으로, 현재는 황태자궁 다음으로 바쁜 곳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협조 요청을 하기가 조심스러운데 부득이하게 카일루스의 도움마저 필요하게 되지 않았던가. 이렇게 갑자기 방문해서 부탁하기에는 눈치가 보였다.

‘미리 말하고 다음에 올까?’

일리아가 별궁 앞을 서성이며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톡톡 건들며 말했다.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깜짝이야!”

일리아를 부른 건 카일루스의 황실 보좌관 중 하나인 이카루트였다.

“노, 놀라셨습니까?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다른 생각을 하느라 미처 몰랐네요.”

“크흠, 일단 들어가시죠.”

일리아는 이카루트와 함께 별궁 안으로 들어섰다.

“그나저나 요즘 일은 어때요? 많아요?”

“평소와 비슷합니다. 정찰병이 보내오는 보고서도 검토하고, 지방 영지 조사도 다시 재개한 참이라 감사 보고서도 검토하고, 차원인지 뭔지도 살피고 있고, 또…….”

“…많이 바쁘네요.”

“그래도 요새는 적응되어서 괜찮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카일루스한테 도움받을 일이 생겨서요.”

이카루트는 돌연 화색을 띠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받으셔야죠! 겸사겸사 각하와 산책이라도 다녀오시고요!”

일리아의 방문을 적극 권장하는 것을 보니 오늘도 카일루스에게 괴롭힘깨나 당한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말은 꺼내 볼게요. 그럼 일 봐요.”

“넵!”

일리아는 이카루트를 뒤로하고 카일루스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안은 의외로 한산했다.

“왔어?”

“많이 바빠요?”

“아니. 괜찮아.”

소파에 앉은 카일루스는 자신의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순간 강아지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일리아는 군소리 없이 그의 옆에 앉았다.

일리아가 막 말문을 떼려는 순간, 카일루스가 돌연 그녀의 손등을 건드려 왔다. 굳은살이 가득한 손끝이 여린 손등을 천천히 쓸어 왔다. 일리아는 무심코 숨을 멈추었다. 가벼운 접촉일 뿐인데도 어깨가 움찔 떨렸다.

‘이상한 것만 배워 와서는…….’

일리아는 손을 뒤집어 카일루스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귓가로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뭐, 용건이 있어야만 오나요?”

“그대는 그런 편이긴 하지.”

“크흠, 아무튼요. 사실 용건이 있긴 한데…….”

책상 위를 슬쩍 살핀 일리아가 말을 이었다.

“혹시 시간 돼요?”

“지금?”

“네. 신물을 찾는 데 카일루스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일리아는 이사벨라가 신물이 있을 법한 위치를 알려 주었으며 그중에는 별궁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황녀 전하께서 별궁의 지하 창고를 열기 위해서는 신성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하셨거든요.”

“별궁에 지하 창고가 있던가?”

카일루스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별궁을 배정받은 지 벌써 5년이 훌쩍 지났지만 지하 창고에 대해서는 들은 기억이 없었다.

“일단 전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럼 찾아보긴 해야겠군. 가자.”

“지금 바로요?”

“내친김에. 어차피 지금은 한가하기도 하고.”

“으음, 알겠어요. 가요.”

집무실을 나선 일리아와 카일루스는 복도를 돌아다니며 지하 창고가 있을 법한 곳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지하로 통하는 길은 발견할 수 없었다.

일리아가 복도에 기대어 서며 뚱하게 말했다.

“진짜 지하 창고가 있기는 한 걸까요?”

“전하께서 말씀하셨다면 있겠지.”

일리아는 고요한 복도를 둘러보았다.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은 별궁 동쪽의 복도였다. 창문이 많은 서쪽 복도와는 달리 그림 몇 점이 걸려 있는 것을 제외하면 휑하기 그지없었다. 일리아는 문득 카일루스의 집무실에 있는 비밀 통로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집무실에 있는 통로는 어떻게 발견하게 된 거예요?”

“정리하다가 우연히.”

“혹시 지하 창고로 가는 길도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요?”

“일리가 있군.”

벽에서 몇 발자국 물러난 일리아는 벽에 걸려 있는 그림들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전에 로맨스 소설에서 본 적 있어요.”

“…로맨스 소설?”

“네. 벽에 걸려 있는 것들을 만지다 보면 비밀의 문이 열려서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이 함께… 앗!”

그때였다. 가면이 그려진 그림을 반 바퀴 돌리자 돌연 벽이 회전했다. 덕분에 그림을 잡고 있던 일리아는 벽 뒤의 어둠으로 끌려 들어갔고 그런 일리아의 행동을 주의 깊게 보고 있던 카일루스 역시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깜짝이야…….”

벽 뒤에는 가파른 계단이 숨겨져 있었다. 카일루스는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는 일리아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항상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죄송해요.”

일리아는 숨을 고르며 바로 섰다. 넘어질 뻔했기 때문인지 카일루스와 급격히 가까워졌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렸다.

‘매번 이러면 곤란한데.’

일리아는 고개를 휘휘 내젓곤 허공에 작은 불꽃을 피워 냈다. 옅은 불빛에 계단의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돌을 깎아 만든 계단은 생각보다 정리가 잘되어 있었다.

“창고로 가는 길일까요?”

“일단 가 봐야지.”

어차피 황성 안이었으니 위험한 것은 없겠지만 두 사람은 의식적으로 주변을 경계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끝에 다다르자 좁은 통로가 보였다.

“대체 뭐 하는 장소일까요?”

“글쎄.”

카일루스는 말없이 벽을 살폈다. 흙을 단단히 고정시켜 만든 통로는 그의 집무실에 있는 비밀 통로와 상당히 비슷했다. 과거에 별궁이 어떤 용도로 쓰였던 것인지는 몰라도 수상하다는 것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일단 가지.”

“네. 발밑 조심해요.”

일리아와 카일루스는 작은 불꽃 하나에 의지한 채 좁은 통로를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점점 넓어지기 시작한 통로 안으로 희미한 바람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카일루스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중얼거렸다.

“여긴… 공기가 조금 답답하군.”

“그래요?”

“조금. 거슬릴 정도는 아니야.”

“먼지가 많아서 그런가 봐요. 얼른 둘러보고 나가요.”

두 사람은 걸음을 서둘러 통로를 벗어났다.

“여기는…….”

일리아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통로 끝에 있는 것은 거대한 동굴이었다. 궁 하나가 거뜬히 들어갈 정도로 거대한 동굴 안에는 수많은 책과 무기, 그리고 이런저런 잡동사니가 널려 있었다.

동굴 안에 인기척은 없었던 터라, 일리아와 카일루스는 흩어져서 신물을 수색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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