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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77)화 (77/101)

77화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오직 이사벨라의 힘을 목격한 바 있던 테오도르와 카일루스만이 태연할 뿐이었다. 이사벨라는 모두의 반응을 즐기며 까르르 웃었다.

“정말입니까?”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그럼 이번에도 황녀 전하께서 사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으신 겁니까?”

오스카의 물음에 이사벨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저는 성인식 전까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어요. 그게 신과의 계약이에요.”

“그럼…….”

“이건 여러분 세대의 일이에요. 여러분이 해결해야만 해요.”

하지만 여기에는 크나큰 문제가 있었다. 황족의 피와 드래곤의 피는 존재했지만 마지막 열쇠인 신검이 적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차원의 통로를 봉인하기 위해서는 신의 힘을 모두 모아야 한다. 즉, 신검이 사라져 버린 지금으로서는 차원의 통로를 봉인하기는커녕 마족을 몰아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이사벨라의 말을 경청하던 일리아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혹시 신검을 대체할 수 있는 게 있습니까?”

“그럼요. 신의 힘이 깃든 거라면 뭐든 상관없어요.”

그제야 모두의 얼굴에 희망이 깃들었다. 반년 안에 신의 힘이 깃든 물건을 찾아내기만 하면 차원이 완전히 열리기 전에 모든 상황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아직 좋아하긴 일러.”

그때, 가만히 듣고만 있던 테오도르가 훈훈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것 외에도 생각해야 할 일들이 많으니까 말이야.”

봉인이 풀린 것과는 별개로, 테멜 왕국은 아직까지도 병력을 모으며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게다가 프노이트 왕국까지 끼어들 여지를 주었으니 마족이 이 기회를 어떻게 이용하려 들지 모를 일이었다.

주위가 숙연해지자 테오도르가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께서 행방이 묘연하시니 당분간은 내가 폐하의 자리를 대신하겠다.”

그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은 일단 돌아가서 쉬어. 내일부턴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을 테니까.”

* * *

레이븐은 엘레나를 데리러 그라니체 저택으로 돌아갔다. 테오도르가 그라니체 가문 전체를 황성으로 소환했기 때문이다. 봉인의 열쇠가 될 드래곤의 피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라니체 가문의 식솔들은 당분간 빈 황제궁을 사용하기로 했다. 원래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일리아는 테오도르와 인사를 나누고 침실을 나섰다. 넓은 복도를 걷는 내내 클리드가 생각났다. 그는 현재 균열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여정을 떠난 상태였다. 봉인이 풀리고 균열이 더는 소용없게 된 지금, 일리아는 클리드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걱정되었다.

편지라도 한 통 보내 주면 좋으련만, 생일 파티 이후로 클리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일리아는 ‘별일 없겠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불안감을 떨쳐 낼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익숙한 목소리에 일리아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고개를 드니 말끔한 차림의 카일루스가 복도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일리아는 방긋 웃으며 그에게 다가가다가 흠칫 멈춰 섰다.

카일루스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어 왔다.

“왜 그래?”

“…지금 제 꼴을 보고도 모르시겠어요?”

일리아는 그동안 프노이트 사절단이 사라진 현장과 수도를 오가며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씻을 시간이라고는 마을에 들러 잠깐이나마 눈을 붙일 때밖에 없었는데 수도로 돌아오는 길에는 발길을 재촉하느라 마을에도 거의 들르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랜더 저택에 갇혀 산 채로 피를 뽑히는 수모까지 겪지 않았던가. 연인에게 보여 줄 만한 몰골은 절대로 아니었다.

일리아가 사색이 되어 몇 걸음 물러서자 카일루스가 큭큭거리며 낮게 웃었다.

“일리아.”

“왜요!”

“잊었어?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는 같은 진지에 있었다고.”

일리아의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질렸다. 전장에서는 치장을 할 시간이 거의 없다 보니 매일을 짐승 같은 꼴로 살았었다.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는 소리다. 그때는 카일루스에 대한 마음이 없었기에 별생각 없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과거의 자신을 혼내 주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다.

“따, 따라오지 마세요!”

일리아는 울먹거리며 카일루스를 쌩 지나쳤다. 등 뒤에서 청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타박할 겨를도 없었다. 일단은 씻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리고 한참 후, 일리아와 카일루스는 황제궁의 응접실에서 재회했다. 카일루스는 말끔해진 일리아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너무 웃으시는 거 아니에요?”

“역시 재미있다니까.”

일리아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대체 황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카일루스는 테오도르와 지젤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지젤은 처음부터 봉인을 풀기 위해 테오도르에게 접근한 것이었으며 봉인의 열쇠를 모두 손에 넣게 되자 테오도르를 마물의 매개체로 쓰려고 했다고.

이야기를 듣던 일리아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데 왜 폐하를 데려간 걸까요?”

애초의 봉인을 푸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피델리오가 그랬던 것처럼 피만 받아 가면 될 일이었다. 지젤은 그동안 황실 의사로 있으면서 테오도르의 피를 구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테오도르 역시 아제로스의 황족이었으니 봉인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셈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지젤은 테오도르를 죽이려고 하고, 바이에드를 납치했다.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전에 그 여자에 관해 했던 이야기 기억해?”

“지젤의 어머니가 폐하께 버림을 받고 저주를 걸었다는 이야기요?”

“그래. 테오도르는 그게 그 여자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듯해.”

일리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만약 테오도르의 말대로 지젤이 ‘제네리아’라면 인간계가 위험에 빠지게 된 게 전부 한 여자의 사랑을 배신한 대가라는 말이 아닌가.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동감이야. 그런데 일리아.”

맞은편에 앉아 있던 카일루스가 일리아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더니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상처를 살필 뿐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일리아는 괜히 부끄러워졌다.

“괜찮은 거야?”

“네. 다 치료했어요.”

카일루스가 깊은숨을 토해 내며 일리아를 끌어안았다.

“걱정했어.”

카일루스의 목소리에서 미약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항상 그랬다. 누구보다 일리아의 실력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매번 걱정했다.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등을 마주 안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일리아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조금은 빠른 듯한 심장 박동이 기분 좋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슬슬 잠이 쏟아졌다.

“으음, 조금만 잘게요.”

“편하게 누워서 자, 일리아.”

“싫어요. 전 이게 좋아요.”

“…또 시험에 들게 하는군.”

일리아는 울먹거리는 듯한 카일루스의 목소리를 끝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며칠이 지났다. 아제로스 제국의 황성에 새하얀 고요가 내려앉았다. 이틀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어느새 발등을 덮을 정도까지 쌓여 버린 탓이었다.

벌써 봉인이 풀린 지도 수일이 지났건만, 지젤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테멜 왕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북부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의 일부가 수도로 퇴각한 것뿐이었다. 정찰병은 왕성에서 연일 폭발음이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왕족 간에 내전이 벌어진 것 같다고 했다. 아제로스 제국으로서는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폭풍 전야와도 같은 나날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일상으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었다. 어둑하던 아로스에 불이 켜지자 다른 도시들도 연이어 불을 밝혔다. 그렇게 아제로스 제국은 다시금 활기를 되찾았다.

그러나 아직 문제는 남아 있었다. 바로 식량이다. 수확 철 직전에 겨울이 오기 시작하면서 농작물이 모두 얼어 죽고 말았다. 당장은 비축해 놓은 식량이 있어 괜찮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버티기 힘들어질 터였다.

“일단은 식량에 관한 문제부터 해결해야겠군.”

테오도르가 회의장에 앉은 귀족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무슨 대안 없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제로스 제국뿐만 아니라 인간계 전체가 겨울에 잠긴 상태였다. 얼어붙은 땅에 농사를 짓는 것도, 수입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모두가 침묵만을 지키던 그때, 이사벨라가 넌지시 말했다.

“마법으로 키우면 어때요?”

실로 괴이한 발상이었다. 아제로스 제국을 지키기 위한 힘을 고작 농작물을 키우는 데나 쓰자니. 일부 마법사들이 불편해하는 기색을 내비쳤지만 테오도르는 오히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가능할 것 같나?”

테오도르의 물음에 레이븐이 대답했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합니다. 마법사가 가진 마력의 속성은 전부 자연에서 온 것이니까요.”

물론, 문제는 존재했다. 바로 마력의 강도였다. 마법으로 농작물을 키우려면 전투를 할 때보다 훨씬 약한 힘이 필요했는데, 마법사들은 마법을 증폭시킬 생각만 해 봤지 의도적으로 감쇠시킬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마력으로 농작물을 무리 없이 키우기 위해서는 수식을 처음부터 새로 고안해야 했다. 그리고 그 부분이 마법사들의 탐구심을 건드렸다.

“전하, 해 보겠습니다.”

로웰이 먼저 대답하자 다른 마법사들도 너도나도 해 보겠다는 열의를 내비쳤다. 다들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으로 보아 제대로 불이 붙은 모양이었다.

“좋아. 그럼 이번 일은 마법사 협회에 맡기도록 하지.”

“네. 맡겨 주십시오!”

그렇게 식량 문제는 일단 일단락되었다.

다음은 프노이트 왕국에 관해서였다.

며칠 전, 테오도르는 프노이트 왕국으로 사절단의 시신과 함께 서한을 보냈다. 프노이트 사절단이 습격당한 경위와 범인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벌써 일주일이 훌쩍 지났음에도 프노이트 왕국은 답을 보내오지 않고 있었다. 정찰병을 보내어 확인도 해 보았지만 왕성은 고요하기만 할 뿐이었다.

“아직도 답이 없나?”

“네. 아직 없습니다.”

테오도르는 느릿하게 턱을 문질렀다. 테멜 왕국은 내전에 프노이트 왕국은 침묵이라. 그는 이런 불확실한 상황을 가장 싫어했다. 준비해야 할 게 배는 많아지니까.

“일단 상황은 계속 지켜보라고 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바로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테오도르는 마지막으로 기사단에는 황성의 경비를, 마법사단에는 신물의 수색을 맡긴 후 회의를 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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