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76)화 (76/101)

76화 

분을 이기지 못한 제네리아는 가지고 있는 마력을 모두 끌어모아 바이에드에게 저주를 걸었다. 서서히 생명력을 잃다가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아주 끔찍한 저주였다. 저주가 심장에 뿌리를 내리면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완전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제네리아는 바이에드가 죽음의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 망가져 가길 바랐다.

그러나 바이에드의 체내에 있던 알량한 신성이 저주를 튕겨 냈다. 그 때문에 저주가 심장이 아니라 오른팔에 뿌리 내리고 만 것이다.

- 이게 무슨 짓이야!

- 하, 그래. 이게 더 괴로울 수도 있겠네, 당신한테는. 어디 잘 숨기고 살아 봐.

- 제네리아!

-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잘 살아 있어. 반드시 죽이러 올 테니까.

제네리아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그때 말했지? 반드시 죽이러 오겠다고.”

“아니. 넌 날 죽이지 못해. 난 아제로스 제국의 황제다. 여긴 내 영역이란 말이야!”

바이에드는 그렇게 말하며 냅다 신검을 휘둘렀다. 신성을 두른 검날이 위협적으로 제네리아의 머리카락을 스쳤지만 그뿐이었다. 검술에 재능이 없는 바이에드는 제네리아를 죽이기는커녕 작은 상처조차 입히지 못했다.

혼신의 공격이 계속해서 무위로 돌아가자 부아가 치민 바이에드가 우렁차게 소리를 내질렀다.

“근위대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인가!”

“오늘은 당신의 검진 날이잖아. 잊었어?”

바이에드는 건강 검진이 있는 날이면 언제나 벨롬 백작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궁 밖으로 물리곤 했다. 혹시라도 그들이 저주의 기운을 눈치챌까 두려워서였다. 그런데 그게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이야. 바이에드는 신검을 든 손을 덜덜 떨었다.

“우리를 방해할 건 없어, 바이에드.”

“대체, 대체 왜 이러는 거냐!”

“네가 날 배신했잖아. 다 네가 자초한 일이라고.”

“고작 그런 이유로!”

제네리아는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한달음에 바이에드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검게 죽은 오른팔을 강하게 움켜쥐며 마력을 흘려 넣었다. 마족의 마력을 머금은 저주는 맹렬하게 날뛰기 시작했고, 바이에드는 팔을 덜덜 떨며 무릎을 꿇었다.

“크윽…….”

신검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고작이라고? 고작? 난 네게 내 모든 걸 줬어. 내 모든 걸!”

분개한 제네리아는 바닥에 떨어진 신검을 집어 들었다. 새하얀 신성이 당장이라도 손을 태울 듯이 피어올랐지만 제네리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신검을 휘둘러 바이에드의 손가락을 잘라 냈다.

“크아아아악!”

제네리아는 떨어진 손가락을 지르밟으며 바이에드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붉은 선혈이 대리석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같이 가야 할 데가 있어.”

“젠장! 이거 놔!”

제네리아가 바이에드를 질질 끌고 응접실로 나오자 누군가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불과 얼마 전에 아제로스 제국을 떠났던 피델리오 플레타였다. 놀란 바이에드가 입을 뻐끔거렸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제네리아는 바이에드를 피델리오에게 넘기곤 방긋 웃었다.

“많이 기다렸니?”

“아닙니다. 대화는 잘 끝내셨습니까.”

“그래. 열쇠는?”

“여기 있습니다.”

피델리오는 제네리아에게 유리병을 보여 주었다. 유리병 안에서는 방금 막 뽑아낸 듯한 피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좋아. 가자.”

제네리아가 앞장서고, 피델리오가 뒤를 따랐다. 황제궁은 이미 피델리오가 정리를 마친 후였기에 그들을 막아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황제궁 밖으로 나온 제네리아는 피델리오가 준비해 놓은 마차를 타고 황성을 벗어났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바로 아자카산맥이었다.

아제로스군이 휩쓸고 간 아자카산맥은 폐허 그 자체였다. 수색을 이유로 나무를 베고 산의 이곳저곳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제네리아는 감상에 젖은 눈으로 아자카산맥을 두 눈에 담았다.

“여기가 좋겠어.”

아자카산맥 안쪽으로 들어온 제네리아는 높다란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오늘따라 햇살과 바람이 참 좋았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제네리아에게서 신검을 건네받은 피델리오는 그것을 바닥에 꽂고 유리병의 뚜껑을 열어 피를 쏟았다. 하얀 신검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바이에드가 피델리오를 눈으로 좇으며 물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답은 제네리아에게서 들려왔다.

“곧 알게 될 거야.”

“무슨……!”

피델리오는 바이에드를 신검 앞으로 질질 끌고 왔다. 그러고는 검은 비수를 만들어 내 그의 왼팔을 깊게 베어 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바이에드는 미처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예리하게 찢긴 상처에서 붉은 선혈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바이에드의 피를 머금은 신검이 태양처럼 밝게 타올랐다. 피부가 녹아내릴 정도로 강한 신성이었다. 얼른 바위에서 내려와 몸을 숨긴 제네리아는 피델리오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얼른 부숴!”

피델리오는 하얀 칼날을 붙잡고 마력을 일시에 터뜨렸다. 이내 푸른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신검을 집어삼켰고, 피가 묻은 신검은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제야 바이에드는 이들이 무슨 짓을 벌인 것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미쳤어!”

“이제 새로운 세상이 열릴 거야, 바이에드.”

곧 거대한 굉음과 함께 영원한 밤이 찾아왔다.

【 드래곤의 존재 】

봉인이 풀리자 사위가 급격히 추워지기 시작했다. 푸른 초목에 서리가 맺히고 가을바람은 싸늘한 칼날이 되어 휘몰아쳤다.

‘위험한데.’

주위에 바람 장막을 둘러 찬기를 차단한 일리아는 소피아를 안고 말에 올라탔다. 목적지는 황성이었다. 그라니체 저택보다는 아이기스가 있는 황성이 더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로스의 거리는 한산했다. 갑자기 불어닥친 한파에 모두가 문을 걸어 잠그고 집 안에 틀어박힌 모양이었다. 차라리 그러는 편이 나았다. 심연과도 같은 하늘은 어딘가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거리를 둘러보던 일리아는 발길을 재촉했다. 이윽고 황성이 보였다. 황성은 고요하던 아로스의 거리와는 달리 아비규환이었다. 성문 앞에는 부서진 마차가 뒤엉켜 있었고, 그 주위로 이리저리 짓밟힌 시신이 즐비했다. 갑작스러운 변고에 도망치다가 화를 입은 듯했다.

‘다들 무사하겠지.’

일리아는 마법사단 본부 앞에서 말을 멈춰 세웠다. 소피아를 들쳐 업고 본부 안으로 들어가자 주위를 경계하던 단원들이 그녀를 향해 부리나케 뛰어왔다.

“부단장님!”

“어디 갔다 오신 겁니까!”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단원들은 겁에 질려 있었지만 의외로 침착했다. 다들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발생한 현상이 마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일단 이 영애 좀 부탁할게.”

일리아는 젤러에게 소피아를 맡기곤 퍼렐에게 상황을 물었다.

“일단 단장님의 명령에 따라 주변을 경계 중이었습니다. 다른 궁에도 지원을 간 상태고요.”

“단장님은?”

“황녀궁에 가셨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부단장님도 찾으셨는데……. 지금이라도 가 보십시오.”

“고마워. 여긴 잘 부탁할게.”

일리아는 다시금 말고삐를 틀어쥐었다. 길 안내를 하는 시종들마저 자리를 비운 탓에 한참을 헤매기는 했지만 여차저차 도착할 수 있었다.

정문 앞에 말을 대충 풀어놓은 일리아는 서둘러 황녀궁 안으로 들어섰다. 인기척을 따라 넓은 복도를 걷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레이븐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

일리아의 목소리에 레이븐이 반갑게 달려오다 돌연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일리아… 악! 피, 피가 이렇게!”

“치료해서 괜찮아요. 아버지는요?”

“후우, 나도 괜찮단다.”

일리아는 애써 미소 지으며 레이븐을 안심시켰다.

“황태자 전하께서 찾으신다고 해서요.”

“그래. 같이 들어가자꾸나.”

레이븐과 함께 침실에 들어서자 이사벨라가 한달음에 달려와 일리아의 손을 꼭 붙잡았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전하께서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일리아는 이사벨라와 인사를 나누며 카일루스를 힐끔거렸다. 걱정 가득한 그의 눈빛을 보니 괜시리 힘이 났다.

“밖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게…….”

일리아는 프노이트 사절단의 습격부터 피델리오에게 붙잡히기까지의 경위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짧지 않은 이야기가 끝이 나자 오스카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프노이트 사절단이 전부 살해당했다고?”

“그래. 시신도 확인했어.”

“게다가 피델리오 플레타가 마족의 수하였다니…….”

“…봉인의 열쇠를 얻기 위해 나한테 접근한 거였더라고.”

“봉인이라니?”

오스카의 물음에 이사벨라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건 제가 설명할게요.”

이사벨라는 테오도르의 옆에 살며시 앉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먼 과거의 이야기예요. 엘리시오는 마족이 다시는 인간계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차원의 통로를 막고 싶어 했어요.”

엘리시오는 신에게 물었다.

- 어떻게 하면 모두를 지킬 수 있는 겁니까?

신은 대답했다.

- 나의 힘을 하나로 모아라.

엘리시오가 신에게서 하사받은 것은 신성과 신검, 그리고 친우인 드래곤이었다. 엘리시오와 드래곤은 자신들의 피와 신검을 이용하여 차원의 통로를 봉인했고 신검은 황성에 숨겨 영원히 보존될 수 있도록 했다.

“마족이 봉인의 열쇠를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해요. 차원의 통로는 빠르면 반년, 늦어도 일 년 안에는 열릴 거예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현재 인간계는 마계의 영향으로 인해 겨울을 맞이한 상태였다. 곧 수확할 예정이었던 농작물이 모두 얼어 죽어 식량 조달이 어려울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전쟁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저기, 그런데…….”

그때, 침묵을 깨고 오스카가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계시는 겁니까?”

모두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왠지 물어봐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른 척을 할 줄 알았던 이사벨라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 제가 그 엘리시오의 환생이거든요.”

“네?”

“제 본명이 ‘이사벨라 엘리시오 그란디아’잖아요. 다들 몰랐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