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어느덧 황제의 방 앞에 다다른 제네리아는 문 앞을 막아서는 시종장에게 방긋 웃으며 말했다.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가십시오.”
제네리아는 문고리를 잡으며 넌지시 말했다.
“벨롬 백작님께 들었어요. 폐하께서 검진 때는 늘 주위를 물리셨다고.”
“…끝나면 불러 주십시오.”
이제 방해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제네리아는 문고리를 힘주어 밀었다. 텅 빈 개인 응접실이 보였다. 바이에드가 기거하는 침실은 응접실의 안쪽에 있었다.
제네리아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굳게 닫혀 있는 침실 문틈으로 옅은 신성이 느껴졌다. 급하게 저주를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
아제로스 황족의 신성은 마족의 피를 말려 없앤다. 그것은 핏줄에 새겨진 오래된 공포였다. 제네리아 역시 어렸을 때는 막연히 신성을 두려워했다. 비록 마족의 피는 반밖에 이어받지 못했지만 피에 새겨진 기억이 너무나도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이에드를 만나면서 모든 황족이 강력한 신성을 가진 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이렇게 신성과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음에도 아무런 영향이 없지 않은가. 정말이지 비루하기 짝이 없는 힘이었다.
제네리아는 침실 문을 두드렸다. 곧 안쪽에서 ‘들어와.’ 하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가자 바이에드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테오도르가 보냈다고.”
“네, 폐하. 지젤 아르투아입니다.”
바이에드는 침대에 삐뚜름하게 앉아 제네리아를 바라보았다. 황색 눈동자에 경계의 빛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테오도르가 손수 아르투아 영지까지 내려가서 데려온 여자가 아니던가.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를 일이었다.
그럼에도 명령서를 무시하지 않은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이대로 황위를 빼앗기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바이에드는 이번 검진이 테오도르가 띄운 승부수라고 생각했다. 검진을 무시하면 건강을 빌미로 양위를 유도할 테고, 검진을 받으면 자신이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을 밝혀서 황제로서의 자질을 문제 삼을 터였다. 어느 쪽이든 바이에드에게 좋을 것은 없었다. 물론, 완전히 잘못 짚었지만.
바이에드는 침대에서 일어나며 근엄하게 말했다.
“제안을 하나 하지.”
“제안이라고 하시면…….”
“이대로 이 방을 나가서 테오도르한테 보고해라. 내 건강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다고.”
“…그럼 제가 무얼 얻을 수 있습니까?”
바이에드는 코웃음을 쳤다.
“원하는 걸 말해라. 돈이든 뭐든 다 주지.”
“돈은 필요 없습니다. 그저… 이야기 하나만 들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야기라고?”
“네. 케케묵은 이야기지요. 제네리아라는 여자의 일생에 관한.”
수십 년 전. 제네리아는 식재료를 구하러 나왔다가 우연히 바이에드를 만나게 되었다. 다리를 다친 바이에드는 절벽 근처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고, 그 모습을 측은하게 여긴 제네리아는 마법을 사용해 그를 구해 주었다.
- 구해 줘서 고마워.
- 아니에요. 여긴 위험하니까 얼른 돌아가요.
- 당신은 마법사인가?
- …네.
바이에드는 애써 시선을 돌리는 제네리아와 눈을 맞추며 방긋 웃었다.
- 이렇게 알게 된 것도 인연인데 종종 놀러 올게. 난 바이에드야. 당신은?
- …제네리아예요.
- 얼굴만큼이나 예쁜 이름이네. 그럼 다음에 또 봐.
그렇게 말하고 아자카산맥을 떠난 바이에드는 거의 사흘에 한 번씩 제네리아를 찾아왔다. 매일 밤 수많은 대화가 오가고, 바이에드와 제네리아는 서로에 관해 더욱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제네리아는 바이에드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행복했다.
- 잠깐 산책이라도 할까?
- 네. 좋아요!
하루는 함께 산책을 나왔다가 마수를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바이에드를 상처 입히고 절벽까지 내몰았던 바로 그 마수였다.
바이에드는 사색이 되어 주저앉아 버렸고, 그가 안쓰러웠던 제네리아는 마법을 써서 마수를 처리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제네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마계의 마력을 사용해 버리고 만 것이다. 바이에드는 소용돌이치는 검붉은 마력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 제네리아, 당신… 마족이었어?
제네리아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져 내리는 듯했다.
- …저를 죽이실 건가요?
그렇게 묻는 제네리아에게 바이에드는 말했다.
- 설마. 내가 어떻게 당신을 죽이겠어. 이렇게 사랑하게 되었는데.
바이에드는 제네리아에게 사랑을 속삭이며 그란디아 가문의 펜던트를 선물로 주었다.
- 사실 나도 비밀을 하나 가지고 있었거든.
- 이 문장은…….
- 그란디아 가문의 문장이지.
- 화, 황자 전하셨어요? 전 그런 줄도 모르고……!
바이에드는 두려워하는 제네리아의 손을 꼭 잡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 괜찮아, 제네리아. 난 널 해치지 않아. 우리의 신분이 어떻든 달라지는 것은 없어.
- 바이에드…….
- 내가 황제가 되면 당신을 황후로 맞이할게. 기대해도 좋아, 제네리아.
바이에드 덕분에 신성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낸 제네리아는 황후가 될 그날을 고대하며 목숨을 다해 그를 사랑하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제네리아를 찾아오던 바이에드의 소식이 끊어졌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불안해하던 제네리아는 결국 아자카산맥을 벗어나 수도로 향했고, 아로스의 작은 술집에서 그를 찾아낼 수 있었다.
- 바이에드!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 뭐야? 아, 제네리아였어? 여기까지는 웬일이야?
항상 태양처럼 빛나던 바이에드는 처참하게 망가져 있었다. 폐인처럼 기른 머리카락과 퀭한 눈가가 제네리아의 가슴에 아프도록 박혀 들었다.
- 대체 무슨 일이에요?
- 그게… 아무래도 제국에서 쫓겨날 것 같아.
- 왜요? 어째서요?
- 폐하께서는 능력 없는 자식을 싫어하시거든.
바이에드는 신성도 약하고 마법도 쓸 줄 모르는 데다가 검술에도 소질이 없었다. 그런 바이에드를 탐탁지 않아 했던 황제가 결국 그를 테멜 왕국으로 치워 버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 맙소사. 말도 안 돼요!
- 폐하를 설득하려면 그럴듯한 업적을 세워야 하는데…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잖아.
바이에드는 연거푸 술만 들이켰다.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제네리아는 깊이 고민했고, 결국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하고 말았다.
- 제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당신이 마수 왕을 토벌하면 어때요?
- 마수 왕이라고?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잡아?
- 제가 도와줄게요. 대신 필요한 게 있어요.
- 뭐가 필요한데?
- 마수 왕의 땅에는 결계가 쳐져 있어요. 그 결계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산 제물이 필요하고요.
바이에드는 산 제물을 구하기 위해 1황자에게 은밀하게 마수 왕의 정보를 흘렸다. 업적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1황자는 당연히 미끼를 물었다. 그는 함정인 줄도 모른 채 수천의 대군과 함께 마수 왕, 디노발리우드의 땅으로 출정했다.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1황자와 수천의 대군은 산 제물로서 마수 왕에게 바쳐졌고, 결계가 풀린 틈을 노린 제네리아가 이틀 밤낮을 싸운 끝에 마수 왕의 목을 베었다.
- 당신의 승리예요, 바이에드.
바이에드는 마수 왕을 토벌한 공을 인정받아 황태자가 되었다. 그리고 더는 제네리아를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이야기를 마친 지젤은 방긋 웃으며 바이에드를 바라보았다.
“어때요?”
“…너, 너 대체 정체가 뭐야!”
바이에드는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을 쳤다. 하얀 장갑을 낀 오른손이 무심코 신검을 붙잡았다. 그 모습을 보며 지젤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모르겠어?”
지젤의 검은 눈동자가 붉게 물드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이목구비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얼굴이 순해 보였다면 바뀐 얼굴은 날카롭고 매혹적이었다.
지젤의 진짜 얼굴을 확인한 바이에드는 이를 악물며 신검을 뽑았다. 그러자 하얀 단검이 휘황찬란한 빛을 내며 장검으로 화했다. 바이에드는 지젤에게 신검을 겨누며 그녀의 이름을 씹어뱉었다.
“제네리아…….”
지젤, 아니, 제네리아는 오랜만에 듣는 자신의 이름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제 기억난 거야?”
“내가 그동안 널 얼마나 찾아다녔는데!”
바이에드는 거칠게 옷소매를 들췄다. 오른팔의 반 이상이 저주의 영향으로 거무죽죽하게 죽어 있었다.
“감히 내게 이딴 짓을 해?”
“그러게 날 황후로 맞이하겠다는 약속을 지켰어야지.”
“하, 웃기지도 않는군. 황후는 너같이 미천한 반마족이 가질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자리가 아니다!”
“그런 미천한 반마족의 힘을 빌려서 황제가 된 너는 어떻고?”
“크윽, 입 닥쳐!”
지젤은 바이에드의 주변을 여유롭게 거닐며 물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대화나 하자, 바이에드. 왜 나를 배신했어?”
“…배신이라니. 넌 처음부터 쓰기 좋은 말일 뿐이었다. 위대한 아제로스 제국의 황족이 미천한 반마족을 진심으로 사랑할 리 없잖아?”
“그때와 달라진 게 없네, 당신은.”
바이에드에게 버려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제네리아는 어둠을 틈타 몇 번이나 황성의 성벽을 넘었다. 그러나 바이에드를 만나지는 못했다. 황성 전체에 퍼져 있는 황제의 신성이 제네리아를 태워 죽일 것처럼 공격해 왔기 때문이다. 결국 제네리아는 바이에드와 만나지도 못하고 도망치듯 수도를 벗어나야만 했다.
그렇게 수년이 흘렀다. 지하 굴에서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던 제네리아는 뭉그적거리며 굴을 나섰다. 인간을 섭취하기 위해서였다. 마족으로서 인간계에서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인간을 섭취하여 그들의 체취를 흡수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제네리아는 인간의 기운을 따라 근처 민가로 향했다.
작은 마을은 드물게도 떠들썩했다. 간혹 기사로 보이는 이들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로브를 더욱 단단하게 여민 제네리아는 거리에서 꽃을 파는 아이를 붙잡고 물었다.
-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니?
- 네! 새로운 황제 폐하께서 즉위하셨거든요!
황태자였던 바이에드가 수순에 따라 황위를 이어받은 것이었다. 제네리아는 한달음에 황성으로 달려갔다. 이제 바이에드가 아제로스 제국의 태양이 되었으니 더는 눈치 보지 않고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바이에드의 옆에는 이미 다른 여자가 서 있었다. 자신처럼 칙칙한 반마족이 아닌, 찬란한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고귀한 귀족 영애였다. 그녀를 품에 안은 바이에드는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그에 깊은 배신감을 느낀 제네리아는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바이에드를 찾아갔다.
- 바이에드!
- 제네리아? 당신이 여긴 어떻게?
- 나를 황후로 맞이하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당신이 날 배신할 수 있어!
바이에드는 손을 부들부들 떠는 제네리아에게 픽 웃으며 말했다.
- 배신이라니. 넌 처음부터 쓰기 좋은 말일 뿐이었어. 위대한 아제로스 제국의 황족이 미천한 반마족을 진심으로 사랑할 리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