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차원을 연다고?”
“그래. 그분께서는 차원을 열어서 먼 과거의 일을 되풀이하려고 하신다.”
“하지만 봉인은…….”
“아직 깨지지 않았지. 하지만 열쇠라면 알고 있다. 황족의 피와 드래곤의 피, 그리고 신검. 다른 열쇠는 이미 모두 구하신 것 같더군. 네 피가 마지막이야.”
일리아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여기서 피를 빼앗겼다가는 차원의 통로를 지탱하던 봉인이 완전히 해제되고 만다. 신의 사자인 엘리시오가 없는 지금, 마족을 상대할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카일루스와 그라니체 가문 정도이지 않던가. 절대 이길 리 없었다.
이대로 피델리오를 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일리아는 몸을 세차게 버둥거렸다. 그러나 출혈만 더욱 심해질 뿐,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피델리오!”
“하하, 그 얼굴은 볼만하군.”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절대!”
“가능하다면 말이지.”
마침내 유리병에 피가 가득 찼다. 피델리오는 서둘러 유리병의 뚜껑을 닫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다녀올게. 아제로스 제국이 끝장난 뒤에도 살아 있다면 그때는 내가 손수 죽여 주지.”
“피델리오!”
피델리오의 발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이제 고요한 지하 감옥에 남은 것은 일리아와 마물 몇 마리뿐이었다.
일리아는 차가운 돌벽에 기대며 숨을 골랐다. 피를 많이 흘린 데다가 독 기운까지 돌고 있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탈출해야 돼.’
일리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목걸이의 마법이라도 발동되면 좋으련만, 목걸이는 아무런 위협도 감지하지 못한 듯이 잠잠하기만 했다. 아무래도 마물에게 적의가 없기 때문인 듯했다.
글렌에서 마주쳤던 마물은 솜털이 쭈뼛거릴 정도로 강한 살기를 띠고 있었다. 목걸이는 분명 마물이 일리아에게 위협이 되리라 판단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마법을 발동시켰던 것일 터다.
착용자의 위험을 감지하는 아티팩트라니. 확실히 대단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하등 쓸모가 없다는 게 흠이었다.
일리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작은 돌멩이라도 손에 잡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마력 봉인용 구속구는 마력을 억제하는 수식을 수갑에 음각하여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즉, 음각되어 있는 수식을 훼손시키기만 한다면 마력 봉인용 구속구도 평범한 수갑과 다름없다는 것.
일리아는 최대한 손을 비틀어 바닥을 더듬거렸다. 비수에 찔린 오른팔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렀지만 지금은 상처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가만히 있다가 죽는 것보다는 탈출 시도라도 해 보는 게 나았으니까.
한참을 버둥거리던 일리아는 이내 몸을 축 늘어뜨렸다. 독 기운이 전신에 퍼지며 슬슬 체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눈앞이 가물거리는 것으로 보아 정말로 한계에 달한 듯했다.
‘조금 더 빨리 고백할걸.’
일리아는 실소를 터뜨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카일루스가 먼저 떠오르는 것을 보니 중증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당연한 후회였다. 이제 막 진짜 연인이 된 참이 아니던가. 아직 못 해 본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대로 죽기는 아쉬웠다.
후회와 체념을 반복하던 일리아는 이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봉인의 열쇠를 물려준 드래곤이 미워졌다. 일리아는 만약 죽어서 드래곤을 만나게 된다면 반드시 한 대 쥐어박아 주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며 눈만 깜박거리는데 돌연 철창 너머에서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는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구두 소리의 주인은 바로 소피아였다. 그녀는 사색이 된 얼굴로 연신 주위를 살피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철창 안으로 들어왔다.
“…랜더 영애?”
“몸은… 괜찮아요?”
“괜찮아 보여요?”
차가운 돌바닥에는 이미 말라붙은 피가 가득했다. 그만큼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의미리라.
소피아는 손을 덜덜 떨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정말, 정말 미안해요…….”
“이게 사과로 끝날 일인가요?”
“미안해요, 정말. 그라니체 영애를 데려오지 않으면 아버지처럼… 저도 죽이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일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랜더 자작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은 보고서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죽었을 줄은 몰랐다.
“랜더 자작님이 살해당했다고요?”
“…네. 환송식이 끝나고 사흘 뒤에요.”
“피델리오의 정체는 언제 알게 된 거예요?”
“환송식이 있기 한 달 전부터 알았어요. 일이 틀어질 것 같다면서 매일같이 화를 냈거든요.”
피델리오는 소피아에게 일리아를 랜더 저택으로 데려오라고 명했다. 만약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거나 들키면 모두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면서.
“정말 미안해요, 정말…….”
소피아는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검붉은 피 웅덩이로 투명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꽤나 처연한 모습이었지만 일리아는 그녀를 용서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당장 목숨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사과 몇 마디가 대수겠는가.
하지만 소피아의 입장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소피아는 아제로스 제국의 귀족으로 태어나 평생을 온실 속 화초처럼 살아왔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목숨을 위협받은 적은 처음이었을 테니 피델리오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소피아는 일리아처럼 힘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미안해요, 그라니체 영애…….”
“하아, 사과는 됐으니까 여기서 나가기나 해요.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래도요. 그래도…….”
“그놈한테 걸리면 랜더 영애도 위험해져요. 그러니까 얼른 도망쳐요.”
소피아는 자신을 걱정하는 일리아의 말에 더욱 목 놓아 울어 버렸다. 이런 사람에게 자신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한참을 오열하던 소피아는 이내 눈물을 닦아 내며 비장하게 고개를 들었다.
“아니요.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어차피 피델리오는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황성에 간다고 했거든요.”
열쇠가 다 모였으니 봉인을 해제하고 차원의 통로를 열 생각인 것이다. 일리아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더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어요. 얼른 여기서 도망쳐요.”
“아니요. 절대 혼자서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소피아는 눈가를 거칠게 문지르더니 주머니에서 낡은 열쇠를 꺼냈다.
“그건…….”
“그 수갑의 열쇠예요.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수갑 자체를 변형시킨 게 아니라면 분명 풀 수 있을 거예요.”
열쇠를 든 소피아가 투박한 수갑을 붙잡았다. 그리고 열쇠를 수갑에 꽂으려는 순간, 마물들이 크게 요동치며 소피아를 철창 밖으로 밀어냈다.
“꺅!”
“랜더 영애!”
차가운 돌벽에 부딪친 소피아는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떨어지면서 다리를 잘못 부딪쳤는지 왼쪽 다리가 찌릿거리며 아파 왔다. 그러나 소피아는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섰다.
“그냥 도망치라니까요!”
“아니…요. 할 수 있어요. 제가 해낼… 거예요.”
소피아는 다리를 절면서도 철창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물의 힘에 밀릴 것 같으면 손톱으로 돌바닥을 붙잡아서라도 버텼다. 그렇게 계속해서 힘겨루기를 하다 보니 소피아의 양손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그럼에도 소피아는 포기하지 않았다. 기어코 일리아의 앞까지 기어 온 그녀는 결국 수갑을 풀어내고야 말았다.
“됐다!”
수갑이 바닥에 철그렁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소피아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일리아의 마력을 느낀 마물들이 본격적으로 힘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일리아는 소피아의 전신에 방어 마법을 두르는 동시에 목걸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곧 핏빛 목걸이가 밝게 빛나며 엄청난 마력 폭발을 일으켰다. 푸른 마력이 칼날처럼 흩날리자 마물들은 단말마의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재가 되어 사라졌다.
남은 수갑도 마저 풀어낸 일리아는 서둘러 소피아의 몸 상태를 살폈다. 소피아의 상처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손만 피투성이인 것이 아니라 왼쪽 다리도 완전히 부러져 있었다. 만약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다면 평생 다리를 절게 될 수도 있었다.
일리아는 ‘내가 치유 마법을 쓸 줄 알아서 다행이네.’ 하고 중얼거리며 소피아를 치유했다. 그러고는 기절한 소피아를 들쳐 업고 지하 감옥을 벗어났다.
고요한 복도를 지나 저택 밖으로 나오자 숨을 고르기도 전에 엄청난 진동이 전해져 왔다. 일리아는 소피아를 더욱 단단히 붙잡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게 대체 뭐야……?”
칠흑 같은 어둠이 파란 하늘을 조금씩 집어삼키고 있었다.
일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결국 차원의 봉인이 풀리고 만 것이었다.
* * *
차원의 봉인이 풀리기 수 시간 전.
제네리아는 의국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곧장 황제궁으로 향했다. 정문 앞에 다다르자 근위대원들이 험악한 기세를 뿌리며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멈추십시오.”
“지젤 아르투아입니다. 검진 때문에 왔습니다.”
“아직 일정이 안 나온 것으로 압니다만.”
“오늘 정해졌거든요. 여기요.”
제네리아는 근위대원에게 명령서와 황태자의 배지를 건넸다. 명령서를 가볍게 살핀 근위대원은 그것을 시종에게 전달했고 얼마 후 안으로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이 짓도 오늘로 끝이군.’
마법에 일가견이 있는 제네리아가 이렇게 귀찮은 절차를 밟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황성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아이기스 때문이었다. 마족의 마력은 인간의 마력보다 월등했지만 드래곤의 마력에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고작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속이 아플 지경인데 이런 곳에서 살상 마법을 사용했다가는 치명적인 내상을 입을 게 분명했다.
‘전에 심어 놓은 마력만 안 들켰어도.’
제네리아는 이전에 테멜인에게 폭발 마법을 새겨 아이기스를 공격한 적이 있었다. 황성 내에서 자유롭게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사실을 눈치챈 누군가가 아이기스에 자리 잡아 가던 그녀의 마력을 소멸시켰고, 별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제네리아는 결국 이런 귀찮은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꽤 걸리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보람차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바이에드는 아무것도 모른 채 황제의 권력에 취해 있을 것이 아닌가. 경악에 물들 그의 얼굴을 상상하니 강한 쾌감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