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 * *
“수습 좀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현장에서 벗어난 일리아는 서둘러 수도로 향했다.
벌써 프노이트 사절단의 실종으로부터 열흘이 훌쩍 지났다. 프노이트 왕국도 슬슬 이상한 낌새를 느꼈을 테니 괜한 오해가 생기기 전에 얼른 마족의 개입 사실을 알려야만 했다.
“하아, 죽겠네.”
일리아는 말에서 뛰어내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저 멀리 황성이 보였다. 그러나 이렇게 며칠간 제대로 씻지도 못한 행색으로는 황제를 알현할 수 없었기에 일리아는 그라니체 저택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가기로 했다.
“저, 저기요!”
일리아가 뻐근한 다리를 대충 풀고 다시금 말에 올라타려던 때였다. 어디선가 단정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나타나 돌연 일리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두려움에 온몸을 떨면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일리아는 고삐를 틀어쥔 채로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이거요!”
여자가 일리아에게 작은 쪽지를 건넸다.
“저는 그냥 부탁받은 게 다예요. 정말이에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곤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일리아는 그녀의 뒷모습을 일별하곤 쪽지를 펼쳤다.
[제발 도와줘요.]
급하게 휘갈긴 듯한 문구의 아래에는 랜더 가문의 문장이 흐릿하게 찍혀 있었다. 일리아는 문득 크리스틴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 아프다기보다는… 겁을 먹은 것 같았어요.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 도움을 요청해 올 것은 뭔가.
말 위에 앉은 채 고민하던 일리아는 ‘일단 집에 돌아가자.’ 하고 생각하면서도 랜더 저택 쪽으로 말 머리를 돌렸다. 랜더 가문의 상황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마침 궁금한 것도 있었으니 빠르게 다녀오는 게 낫겠다 싶었다.
한 시간 정도를 달리자 눈앞으로 아담한 랜더 저택이 보였다. 랜더 저택은 오랜 기간을 방치해 놓은 것처럼 을씨년스러웠다. 말에서 내린 일리아는 주위를 살피며 문을 두드렸다.
‘아무도 없나?’
한참을 기다려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일리아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밀었다. 곧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저택 문이 열렸다.
저택 내부는 외부만큼이나 싸늘했다. 불이 하나도 안 켜져 있어 어두컴컴한 데다가 사방에서는 오래된 피 냄새가 났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로비를 지난 일리아는 방을 하나하나 살피며 수색에 나섰다. 그러나 소피아의 흔적은커녕 하인들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일리아는 가물거리는 눈을 비비적거리며 지하실 앞에 섰다. 남은 곳은 이제 여기뿐이었다.
“꺄아아악!”
그때, 두꺼운 철제문 너머에서 어렴풋한 비명이 들려왔다. 일리아는 감각을 곤두세우며 지하실로 향했다. 먼지가 자욱한 계단을 지나 딱딱한 돌바닥을 밟자 비명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지하실은 꽤 넓었다. 일리아는 창고를 지나 지하 감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또다시 비명이 들렸다.
“소피아?”
“그, 그라니체 영애?”
이번에는 목소리가 명확하게 들렸다. 일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피아에게 다가갔다. 소피아는 작은 마물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지하실 한편에 주저앉아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구해 줄게요.”
일리아는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려 잠을 깨곤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 순간, 조심하라는 외침과 함께 뒷덜미에서 따끔한 충격이 느껴졌다.
‘방심했네…….’
곧 시야가 완전히 암전되었다.
* * *
“으윽…….”
일리아는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그 찰나의 순간에 독을 주입한 것인지 머리가 빙빙 돌고 속이 메스꺼웠다.
일리아는 눈을 깜박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렴풋한 촛불의 불빛 사이로 녹슨 철창이 보였다. 희미하게 피 냄새가 나는 것으로 보아 아직 지하 감옥에 있는 듯했다.
‘하필 이런 때에…….’
보름이 넘도록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피로로 사고력이 흐려진 탓에 주변에 무언가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일리아는 철창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왠지 시기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노이트 사절단이 살해당하고, 보고를 위해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소피아의 쪽지를 받고. 소피아의 주변으로 마물이 포진해 있었으니 이번 일도 테멜 왕국의 마족이 계획한 일일 터였다.
일리아는 독 기운 때문에 흐려지려는 정신을 일깨우며 몸을 바르작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움직이려고 해도 온몸에 무거운 돌덩이를 얹어 놓은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일리아는 고개를 돌려 전신을 살폈다. 아까 소피아를 위협하던 작은 마물들이 그녀의 몸을 빈틈없이 누르고 있었다. 적의도, 살의도 존재하지 않아 감지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거기에 더해, 양손에는 수갑도 채워져 있었다. 마력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마력 봉인용 구속구인 듯했다.
‘젠장. 제대로 당했네.’
일리아는 슬슬 식은땀이 났다.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적어도 일리아 자신은 아니었다.
“대어가 걸려들었군.”
그때, 어둠 속에서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철판을 손톱으로 긁어내는 듯한 목소리였다. 일리아는 이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전장에서……?”
“기억하나 보군.”
일리아는 지난 테멜전에서 가수면에 들기 직전에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작은 중얼거림에 가까웠지만 워낙 귀를 찌르는 소리라 어렴풋하게 기억이 났다.
“…대체 정체가 뭐야?”
“너도 아는 사람이지.”
“뭐라고?”
“이거 섭섭하군. 내가 그동안 너를 얼마나 따라다녔는데.”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가 천천히 후드를 젖혔다. 희미한 촛불의 불빛 너머로 적갈색 머리카락과 녹음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의 정체를 확인한 일리아는 눈을 부릅떴다.
“당신은……!”
“이제 알겠나?”
“피델리오 플레타…….”
일리아는 이를 악물며 피델리오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왜? 아니, 어째서?”
“그걸 묻기 전에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잖아.”
철창 안으로 들어온 피델리오는 일리아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입가가 얼얼할 정도로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일을 망쳐서 죄송하다고 해야지.”
“…일을 망쳐?”
“그러게 잘해 줄 때 대충 넘어오지 그랬어?”
피델리오는 소름 끼치게 웃으며 일리아의 핏기 어린 입술을 쓸어내렸다.
“그랬으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았을 텐데.”
일리아는 이를 뿌득 갈았다. 프노이트 사절단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 잠시나마 그를 걱정했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무슨 꿍꿍이지? 왜 나한테 접근한 거야?”
“얻어 내야 할 게 있어서.”
“얻어 내야 할 것?”
“그래. 네 피.”
그렇게 말하며 피델리오는 검은 연기로 만들어 낸 비수를 일리아의 오른팔에 찔러 넣었다. 그러고는 신음을 삼키는 일리아의 얼굴을 찬찬히 훑으며 비수를 거칠게 뽑아냈다. 완전히 찢긴 살갗에서 붉은 선혈이 터져 나왔다.
“으윽!”
“많이 아픈가?”
큭큭거리며 품 안에서 유리병을 꺼낸 피델리오는 그것을 일리아의 오른팔 아래에 두며 나직하게 말했다.
“피가 모일 때까지 대화나 하지.”
“…시끄러워.”
일리아는 이를 악물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머지않아 체내에 잠들어 있던 마력이 기지개를 켜듯 마력로 곳곳을 내달렸다. 그러나 웅혼한 드래곤의 마력도 마력 구속구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구속구의 영향으로 마력의 흐름이 틀어지자 신나게 날뛰던 마력이 마력로 곳곳에서 뒤엉키며 속을 진탕 흔들어 놓기 시작했다.
“크윽…….”
일리아는 피를 울컥 토해 내며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수갑은 여전히 견고했다.
“글렌에서처럼은 안 될 거야. 그런 가짜와는 차원이 다른 물건이거든.”
“…당신이 글렌에서의 일을 어떻게 알지?”
“이거 섭섭한데? 그때 선물도 보냈었는데 말이야. 그렇게 쉽게 당할 줄은 몰랐지만.”
피델리오가 손을 내젓자 일리아의 몸을 누르고 있던 마물들이 한차례 크게 요동쳤다. 마치 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그럼 그 마법사가…….”
“맞아. 내 부하였어.”
“왜 폐하의 일을 도운 거지?”
“도왔다기보다는 그냥 지켜보고 있었어. 상황이 돌아가는 꼴을 확인해야 했으니까.”
“어째서?”
피델리오는 비수를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그분께서 원하셨으니까.”
“그분이라고?”
“그래. 내게 새 생명을 주신 분 말이야.”
피델리오가 속한 플레타 가문은 유구한 역사 속에서 수많은 마법사를 배출한 명문가였다. 플레타의 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이들은 모두 마법적인 재능이 뛰어났으며 외모 또한 수려해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피델리오만은 달랐다. 피델리오는 플레타의 성을 가지고 태어났음에도 마법에는 눈곱만큼도 재능이 없었고, 외모 또한 평범했다. 피델리오의 형제들은 그를 ‘플레타의 모난 돌’이라고 부르며 정말로 사람이 아닌 돌멩이를 보듯이 했다.
가족들이 계속해서 그런 태도를 고수하자 나중에는 하인들도 피델리오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열 살이 지날 무렵부터는 식사까지 빼돌리며 괴롭히는 바람에 피델리오는 썩은 음식물을 주워 먹으며 겨우 하루하루를 버텨 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피델리오는 열일곱 살이 되었다. 성인식을 맞이한 피델리오는 여느 때처럼 좁고 더러운 방 안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그의 앞에 나타난 게 바로 마족이었다.
“그분께서는 내게 새 생명을 주셨어.”
마족은 붉은 눈동자를 매혹적으로 빛내며 피델리오에게 말했다.
- 나를 따르겠다고 하면 네게 힘을 주마.
- 힘이요?
- 그래. 이 가문의 인간을 모두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힘.
터무니없는 제안이었다. 애초에 마력은 타고나는 것이었다. 얻고 싶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그럼에도 피델리오는 마족의 제안에 혹하고 말았다.
그동안 마법적인 재능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얼마나 모진 천대를 받아 왔던가. 그 모든 괴롭힘을 견딜 수 있게 해 준 것은 오직 그들을 죽이는 상상뿐이었다. 그런데 그 상상을 이룰 수 있는 힘을 주겠다고 한다.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고 해도 손을 잡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 따를게요. 따르겠습니다!
- 좋아. 네게 딱 맞는 힘을 주지.
피델리오는 결국 마족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새로운 힘을 얻어 플레타 가문에 있는 모든 이들을 죽이고 피로 물든 자리를 거머쥐었다.
“그렇다고 가족을 죽여?”
일리아의 말에 피델리오는 눈을 치켜뜨며 그녀의 목 줄기를 움켜쥐었다. 다부진 손가락이 일리아의 얇은 목을 부러뜨릴 듯이 옥죄었다.
“이래서 난 다 가진 것들이 싫어.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면서 거드럭거리기나 하고 말이야.”
“으윽…….”
“그것들은 죽어 마땅했어. 감히 나를 무시하다니.”
피델리오는 짙게 웃으며 손을 놓았다.
“허억, 헉…….”
“조금만 더 모으면 되겠군.”
“하아, 대체 내 피는… 왜 가져가려는…….”
“정확히는 네 피가 아니라 드래곤의 피가 필요한 거야. 네가 제일 만만했을 뿐이고.”
피델리오는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우린 차원을 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