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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71)화 (71/101)

71화 

사색이 된 레널드는 발을 동동 구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고, 겁이 난 레널드는 은근슬쩍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리고 그때 딱 마주치고 말았다. 정원 어귀에 서서 사악하게 웃던 카일루스와.

카일루스는 레널드에게 갈색 봉투를 건네며 ‘방금 본 것은 숨겨 줄 테니 아무한테도 들키지 말고 일리아에게 전해.’ 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싱그럽게 피어 있는 장미꽃을 툭툭 건드리며 ‘들키면 죄가 더 커질 수도.’ 하고 여상하게 덧붙였다.

덜컥 겁을 집어먹은 레널드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갈색 봉투를 받아 왔다. 그리고 현재.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결과 식사를 하기 위해 흩어진 단원들을 피해 이제야 일리아에게 봉투를 전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일리아는 픽 웃으며 서류 봉투를 열었다. 아무래도 레널드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카일루스가 그새를 못 참고 놀려 먹은 듯했다. 카일루스는 은근히 장난기가 넘치는 사람이었으니까.

“각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까 나가 봐.”

“꼭입니다! 약속하셨습니다!”

“그래. 약속해.”

레널드가 집무실에서 나가고, 일리아는 봉투 안에 들어 있던 보고서를 세심하게 살폈다. 보고서에는 소피아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랜더 가문에 관해서도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덕분에 일리아는 새로운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크리스틴이 말했던 대로, 소피아에 관해서는 이렇다 할 만한 게 없었다. 특이 사항은 소피아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다.

‘랜더 자작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로베르트 백작과 항상 붙어 다니던 랜더 자작이 며칠 전부터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랜더 자작에게 무슨 변고가 생겼다고 생각하기에는 소피아의 태도가 너무 태연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일리아는 이내 보고서를 집어넣으며 상념을 털어 냈다. 무언가 석연치 않기는 했지만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소피아와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가문의 일까지 신경 써서 무엇 하겠는가. 이 이상은 오지랖이었다.

“일단은 내 할 일이나 하자.”

가볍게 몸을 푼 일리아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쉬는 시간을 이용해 자율 훈련을 하는 단원들을 지도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이렇게 열심히 훈련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며칠 전에 테멜 왕국의 움직임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테멜 왕국군은 프노이트 사절단이 아직 아제로스 제국 내에 있음에도 북부 국경 지대에 병력을 집중하며 전쟁이 머지않았음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그에 바이에드는 테멜 왕국 측에 종전 협상안과 함께 서신 한 통을 보냈다. 이번이 마지막 제안이며 또다시 거부할 시에는 무력으로 제압하겠다는 내용을 담아서. 테멜 왕국은 이미 아제로스 제국에 패배한 전적이 있으니 강경하게 나가면 마지못해 굴복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바이에드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테멜의 왕은 재차 거부 의사를 밝혔다. 심지어는 바이에드의 서신을 가지고 간 전령의 목을 베어 버리기까지 했다.

명백한 도발에 크게 분노한 바이에드는 결국 테멜 왕국을 향해 선전 포고를 했다. 명분은 충분했다. 테멜 왕국이 마족과 손을 잡았다는 증거는 차고도 넘쳤으니까.

- 인도를 상실한 테멜인에게는 신의 철퇴가 내려질 것이다!

신에게 선택받은 영웅의 후손이 마족에게 굴복한 테멜 왕국을 벌한다. 이 얼마나 정의로운 그림인가. 덕분에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사기가 높다는 건 좋은 거지만…….’

전쟁이 벌어지는 건 그리 내키지 않았다.

바이에드는 봄의 초입에 테멜 왕국을 벌하겠다고 선포했다. 그 말은 곧 아제로스군은 추운 겨울에도 쉬지 못하고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추위는 사람을 병들게 한다. 과연 전쟁 경험이 별로 없는 아제로스군이 그 상황을 잘 버텨 낼 수 있을지 일리아는 걱정이 되었다.

“괜찮겠지.”

고개를 휘휘 내저은 일리아는 연무장을 느긋하게 거닐며 도움이 필요한 단원들을 지도했다. 그러길 몇 분 후, 식사를 하러 나간 줄 알았던 오스카가 일리아에게 부리나케 달려왔다.

“일리아!”

“왜 그러십니까, 단장님?”

오스카는 일리아에게만 들리게끔 조용히 말했다.

“방금 보고가 들어왔어. 프노이트 사절단이 사라졌다는군. 아무래도 습격을 받은 것 같아.”

“프노이트 사절단이 습격이요? 플레타 백작님이 있었는데도요?”

피델리오 플레타는 프노이트 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마법사였다. 그의 신변을 위협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정황이 조금 의심스러웠다.

“나도 그 점이 의문스럽기는 한데 정찰병들의 보고에 따르면 그래.”

“…일단 수색을 해 보긴 해야겠군요.”

“그래서 부단장을 부른 거야. 병사들의 사기에 영향이 가지 않도록 비밀리에 수색하라는 황명이 떨어졌어. 많은 인력을 투입할 수가 없는 상황이니 미안하지만 부단장이 나서 줘야 할 것 같아.”

“어쩔 수 없죠. 제가 가겠습니다.”

오스카는 일리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몇 명 더 데려가도 좋으니까 다치지만 마. 넌 아제로스 제국에 없어서는 안 될 인재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스카에게서 대략적인 상황을 전달받은 일리아는 서둘러 떠날 채비를 했다. 프노이트 사절단이 사라진 장소는 말을 타고 부지런히 달려도 꼬박 열흘이 걸렸다. 서두르지 않으면 증거가 손상될 수도 있었다.

“레널드, 카야, 체이드. 너희는 날 따라와.”

“알겠습니다!”

마법사단 본부 밖으로 나온 일리아는 말안장을 점검하며 세 사람에게 빠르게 상황을 전달했다. 프노이트 사절단이 국경을 넘기 전에 사라졌고, 비밀리에 수색을 해야만 한다고.

“그, 그게 사실입니까?”

“그래. 그러니까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이대로 사절단을 찾지 못하면 더 큰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피델리오 플레타는 프노이트 왕의 총애를 받는 이였다. 그런 그가 아제로스 제국 내에서 습격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말 위에 올라탄 일리아가 고삐를 틀어쥐며 외쳤다.

“출발한다!”

네 마리의 말은 빠르게 대로를 나아갔다. 일리아는 수면 시간까지 줄여 가며 발길을 재촉했다. 말이 지치면 인근 마을에 들러 말을 바꿔 탔으며 노숙도 불사했다. 덕분에 그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사흘 빨리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리아가 말에서 내리자 현장을 보존하고 있던 정찰병이 정확한 상황을 전달해 왔다. 프노이트 사절단의 뒤를 몰래 따라붙고 있었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고, 눈 깜짝할 새에 습격이 끝나 있었다고.

“폭우가 쏟아졌다고요?”

일리아는 의구심 가득한 얼굴로 현장을 둘러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에는 꽤나 많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산산이 부서진 마차와 찢어진 옷가지, 그리고 낭자한 핏자국까지. 비가 왔으면 없어지거나 훼손되었을 증거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저도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전부 사실입니다.”

정찰병은 품 안에서 눅눅해진 육포를 꺼냈다. 물이 묻은 상태로 오래 방치한 탓에 불쾌한 냄새가 올라왔다.

‘정찰병은 비를 맞았는데 이곳은 멀쩡하다라…….’

정찰병이 거짓을 고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남은 가능성은 단 한 가지였다. 마법을 이용해 정찰병이 있던 곳에만 비를 내렸을 경우였다. 정찰병은 프노이트 사절단에게 들키지 않도록 거리를 벌린 상태로 따라붙고 있었을 테니 폭우로써 그의 이목을 흐리는 것쯤은 간단했을 터였다.

“일단 조사부터 해 보죠. 저쪽을 살펴 줘요.”

“알겠습니다.”

일리아는 조심스럽게 바닥을 살폈다. 검게 말라붙은 핏자국 주변으로 발버둥을 친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아 있었다. 그 말은 곧 습격자들이 프노이트 사절단을 일격에 암살한 게 아니라 피가 흥건하게 터져 나올 때까지 공격하며 시간을 끌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황 증거는 정찰병의 진술과 크게 어긋나는 부분이 있었다. 정찰병이 폭우로 프노이트 사절단의 움직임을 놓친 건 고작 수 분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사이에 이 정도의 출혈과 저항의 흔적을 만들어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고 정말 살해한 게 맞는다면 시신은 왜 숨긴 것일까. 어쩐지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리아는 정찰병의 말이 거짓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으며 세심하게 현장을 살폈다. 그런데 그때 하늘 위로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레널드의 표식이었다.

일리아는 정찰병에게 현장을 맡기고 불꽃이 피어오른 곳으로 향했다. 현장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부단장님! 이쪽입니다!”

대로를 한참 벗어난 수풀 속에서 레널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는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수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 찾은 거라도 있어?”

“…아무래도 큰일 난 것 같습니다.”

레널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절벽 어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프노이트 사절단의 시신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마치 거대한 칼로 난도질을 당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일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지난 전쟁에서의 악몽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상처투성이였던 테멜 왕국군의 시신과 밀려드는 마물 떼, 그리고 처참하게 살육당한 별동대원들까지. 사절단의 시신에 난 상처는 테멜 왕국군의 시신에 나 있던 상처와 완전히 똑같았다.

‘그럼 근처에 마물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잖아!’

일리아는 서둘러 탐색 마법을 시전했다. 절벽 어귀에서 현장을 전부 뒤덮고도 남을 정도로 마력장을 넓게 펼쳤지만 그 어디에서도 마물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젠장…….”

마력을 거둔 일리아는 몸을 돌려 절벽 어귀를 벗어났다.

* * *

바이에드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황제궁에서 두문불출하자 일부 귀족들 사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이에드의 건강을 걱정하며 양위를 입에 올렸고, 그 소식은 곧 테오도르의 귀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한 테오도르는 귀족들의 근심을 부추기기 위해 은밀하게 소문을 흘렸다. 황제의 건강에 이상이 생겨 황태자가 모든 국무를 대행하고 있다고.

당연히 황성은 발칵 뒤집어졌다. 귀족들은 연일 황제궁으로 상소를 올렸고, 이런 식으로 황위에서 물러나고 싶지 않았던 바이에드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급하게 건강 검진 일정을 잡았다.

“거의 다 왔어.”

바이에드는 검진을 받을 때도 신검을 곁에 둘 확률이 높았다. 벨롬 백작도 없는 마당에 저주가 발작이라도 일으켰다가는 소문에 날개를 달아 주는 꼴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주를 억누르기 위해 신검과 접촉하는 순간을 잘만 노린다면 무리 없이 신검을 훔쳐 낼 수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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