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연락이 안 된다고?”
“네. 벌써 2주째입니다. 그동안 이러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으셨는데…….”
빌른은 아제로스 제국 내의 모든 정보를 다루는 곳이자 중요한 군사 거점이었다. 수도에 있어 내전이 벌어져도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데다가 황성으로 향하는 길목을 차단하기에도 용이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받으며 기반을 다졌던 것인데, 누구보다 빌른의 중요성을 잘 아는 테오도르가 연락을 일방적으로 끊었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카일루스는 답답해하는 그를 향해 말했다.
“내가 알아볼 테니까 대기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사이먼은 꾸벅 인사를 하면서 일리아를 빠르게 훑었다. 사실 카일루스가 여자와 함께, 그것도 다정해 보이는 모습으로 빌른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는 ‘졸리면 잠을 자, 이놈아!’ 하고 부하에게 면박을 줬었다. 사이먼은 카일루스가 일리아와 연애를 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일루스는 기본적으로 정이 많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고 남자 보기도 돌같이 하는 철벽남이었다. 그래서 ‘그래. 무슨 사연이라도 있으신 거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이렇게 보니 진짜 데이트라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사이먼이 일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카일루스가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사이먼에게 눈을 부라렸다.
“사이먼.”
“네?”
“죽고 싶지 않으면 그만 쳐다봐.”
“죄, 죄송합니다!”
사이먼이 고개를 휙 돌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 모습이 괜히 재미있어, 일리아는 무심코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재미는 무슨.”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카일루스는 사이먼을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확인하고 연락해 줄 테니까 돌아가 있어.”
“알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그들은 육식 동물에게 쫓기는 초식 동물처럼 부리나케 사라졌다.
일리아는 조용해진 골목을 둘러보다 카일루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정말 전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요?”
“글쎄. 딱히 달라진 건 없었는데.”
카일루스는 환송식에서 테오도르의 이상을 감지한 이후로 한동안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황태자궁으로 들어가는 모든 식재료를 점검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최근에 차를 즐기게 되었다는 것밖에는. 그렇기에 더 이상한 것이다. 카일루스는 눈을 빛냈다.
“아무래도 다시 확인해 봐야겠어.”
“그러는 게 좋겠어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요.”
“…미안하군. 내가 나오자고 했는데.”
“괜찮아요. 다음에 또 오면 되죠. 얼른 가요.”
일리아는 카일루스를 이끌고 빌른을 벗어났다.
* * *
카일루스는 점심 식사도 거르고 황태자궁을 찾았다. 원래는 기별을 넣고 허락을 받는 게 먼저였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오늘 아침에 테오도르가 벌인 기행 때문이었다.
보고에 따르면, 테오도르가 시종은 물론이고 황태자궁을 지키는 근위대원을 절반 이상 내보냈다고 한다. 궁 내부에 사람이 많아야 쥐새끼를 잡아내기도 쉽다는 평소 지론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행동이었다. 빌른에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못내 불안했는데 무슨 사달이 나긴 한 모양이었다.
‘오늘은 확실히 알아내야겠어.’
카일루스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테오도르의 집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테오도르는 응접용 소파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카일루스?”
카일루스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 테오도르의 앞에 섰다. 책상 위를 대충 훑어보니 정리되지 않은 서류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이것 역시 테오도르답지 않았다.
“대체 뭐 하는 거야,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황태자궁의 인원은 왜 줄인 건데?”
“조금 성가셔서.”
황태자궁의 일이었음에도 테오도르는 어쩐지 심드렁해 보였다. 확실히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결국 자리를 잡고 앉은 카일루스는 테오도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안색도 괜찮고, 마력 또한 안정되어 있었다. 눈빛이 다소 흐리멍덩하기는 했으나 요새 일이 많았으니 충분히 피곤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시종은 줄이더라도 근위대원은 냅둬. 혹시 모르니까.”
“황성에서 날 위협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테오도르.”
“여차하면 지젤과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여기서 지젤의 이름이 왜 나온단 말인가. 카일루스는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말했다.
“차라리 근위대원을 더 배치해. 그 여자 말고.”
“지젤은 반마족이야. 근위대원보다 강하다고.”
“반마족이니까 문제인 거잖아. 무슨 짓을 저지를 줄 알고 그런 여자를 가까이 둬?”
“카일루스. 말이 너무 심하잖아.”
미지근해진 차를 한 번에 들이켠 테오도르는 찻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카일루스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너라도 지젤을 함부로 말하는 건 용납할 수 없어.”
“…진짜 미치기라도 한 거야?”
“지젤은 우리 일을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황성까지 와 주었다고. 난 지젤을 믿어.”
테오도르는 소파에서 일어나 카일루스를 등지고 섰다.
“나가. 일해야 하니까.”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카일루스는 테오도르가 내려놓은 찻잔을 힐끔 내려다보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나만 더 묻지.”
“내가 나가라고…….”
“그동안 빌른에는 왜 연락하지 않은 거지?”
카일루스의 물음에 테오도르가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요새 바빠서 잊고 있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들 기다리고 있어.”
“앞으로는 잊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 간다.”
카일루스는 집무실을 나서기 전에 테오도르가 차를 마시던 찻잔을 챙겼다. 그러고는 황태자궁에서 나와 곧장 마법사 협회로 향했다. 차의 성분을 분석하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 테오도르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사한 결과, 그에게 일어난 변화라고는 이 차가 유일했다. 업무 중에는 물도 마시지 않던 테오도르가 이른 아침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차를 입에 달고 산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지젤을 향해 보인 태도도 그렇다. 테오도르는 자기 자신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믿지 않던 사람이었다. 가족인 카일루스마저 뜻을 함께하고 나서야 믿게 되었으니 오죽하겠는가. 그런데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반마족을 믿는다고? 그 테오도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차를 마시기 시작한 것과 지젤을 신뢰하기 시작한 것. 카일루스는 이 두 가지 변화 사이에 지젤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녀는 반마족이니 인간계에 존재하지 않는 식물이나 마법도 잘 알고 있을 것이 아닌가. 그것들을 이용해 무슨 수작을 부렸을지도 몰랐다.
마차를 타고 마법사 협회에 도착한 카일루스는 로웰이 아닌, 레이븐의 집무실을 찾았다.
“각하?”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군, 백작.”
“아닙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카일루스에게 자리를 권한 레이븐은 노란 라벤더차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카일루스는 라벤더차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하얀 찻잔을 꺼냈다.
“이게 뭡니까?”
“그냥 찻잔이야. 백작이 여기 남아 있는 찻물의 성분을 조사해 줬으면 해서.”
“이런 건 의궁에서…….”
“아니. 의궁은 믿을 수 없어.”
난처한 듯이 머리를 긁던 레이븐은 조심스럽게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탐지 마법을 시전했다. 어차피 찻물에서 마력이 느껴질 일은 없을 테지만 카일루스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게 웬걸. 찻물에서 미약하게나마 마력이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레이븐은 눈을 부릅뜨며 카일루스를 바라보았다.
“왜 차에서 마력이…….”
“마력이라고?”
“그것도 그냥 마력이 아닙니다. 마계의 마력입니다.”
찻물이 품고 있는 마력은 너무나도 미약하여 기감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지만 최근까지도 마물을 조사하고 있었던 레이븐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건 마계의 마력이 분명했다.
“마계의 마력을 마시고 있었다고?”
“어느 분이 드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소량이라 몸에 큰 이상은 없을 겁니다. 단지…….”
“뭐지?”
“중독을 일으킬 수는 있습니다. 마약과 같은 작용을 하는 것이지요.”
카일루스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테오도르가 왜 차를 입에 달고 살았는지를. 찻잎의 마력에 중독된 것이다.
황성 내에 마족이라고는 지젤 하나뿐이었으니 이번 일의 배후에는 분명 그녀가 있을 터였다. 카일루스는 눈을 빛냈다. 심증을 잡았으니 이제는 물증을 잡을 때였다.
“고맙군, 백작. 확실히 도움이 됐어.”
“…무슨 일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카일루스는 찻잔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누군가가 테오도르에게 이 차를 마시게 하고 있었어.”
“네? 대체 누가……. 아니, 어떻게 마계의 식물을…….”
“이제부터 확실히 밝혀내야지.”
자리에서 일어난 카일루스는 레이븐에게 단단히 일렀다.
“백작도 일단은 함구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마법사 협회를 나선 카일루스는 곧장 지젤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저택으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카일루스는 붉게 내려앉기 시작한 노을을 바라보며 눈가를 찌푸렸다. 지금 지젤의 저택에 찾아갔다가는 구설에 오르내릴 게 분명했다. 그것을 빌미로 그녀가 어떻게 행동해 올지도 모를 일이었고.
괜히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카일루스는 일단 테오도르에게 먼저 사실을 알리기로 했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뭐라고?”
그러나 카일루스는 테오도르를 만날 수 없었다. 어느새 황태자궁 정문 앞에 배치된 두 명의 근위대원이 그를 막아섰기 때문이다. 이유인즉, 당분간 카일루스의 방문을 금한다는 명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지젤에 대한 이야기로 테오도르를 자극했던 게 화근이 된 듯했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쯧, 하고 혀를 찬 카일루스는 황태자궁을 노려보다 몸을 휙 돌렸다. 어차피 중독을 일으키는 것뿐이라면 당분간은 괜찮을 터다. 카일루스는 지젤의 동향을 살피며 테오도르의 기분이 풀리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제정신으로 돌아오기만 해 봐.’
카일루스는 주먹을 꾹 쥐며 별궁으로 걸음을 돌렸다.
* * *
똑똑.
점심쯤이었다. 서류 정리를 마친 일리아가 찌뿌드드한 어깨를 풀고 있을 무렵, 누군가가 부단장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레널드 메이헴이었다. 레널드는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얼굴로 일리아에게 갈색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각하께서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각하를 만났어?”
“…네. 아주 우연히요!”
레널드는 입을 삐죽거리며 카일루스와 만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연무장 청소를 마치고 한껏 여유를 부리던 레널드는 오랜만에 황성 정원이 구경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정원을 거닐며 한량이 된 기분을 마음껏 만끽했다.
그런데 그때 사달이 났다. 제복 장식에 꽃이 쓸리면서 장미꽃 두어 개가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황실 정원에 있는 모든 식물은 황족의 소유다. 의도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꽃을 꺾었다는 사실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처벌을 면하지 못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