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
이리저리 뒤척이던 테오도르는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슬슬 약효가 돌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지젤은 잠든 테오도르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고개를 숙여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를 믿어요, 테오도르. 오직 나만이 당신 편이에요.”
마력이 담긴 말은 하나의 마법이 되어 테오도르의 정신을 파고들었다. 갑자기 스며든 이질적인 기운에 신성이 움찔거리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테오도르는 신성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한 이후로 끊임없이 신성을 억제하는 훈련을 해 왔다. 그 영향으로 신성은 테오도르의 의지 없이는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것은 테오도르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테오도르의 신체가 마음껏 날뛰는 신성을 제어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지젤만 편하게 되었다. 지젤은 테오도르의 약점을 파고들어 틈을 만들고, 그에게 약을 먹이며 끊임없이 세뇌를 했다.
물론, 처음에는 전혀 영향이 없었다. 테오도르는 정신력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다. 고작 약을 먹이고 잠결에 마법을 거는 것만으로는 그의 정신을 흔들어 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 테오도르와 처음 만났을 당시, 그는 지젤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작게 놀라기만 할 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극심한 감정의 변화를 보였다. 지젤은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그에게서 원하는 정보를 얻어 내기 위해서.
‘거의 다 왔어.’
살며시 몸을 일으킨 지젤은 창가에 서서 어둑한 황성을 내려다보았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기분 나쁜 드래곤의 마력이 폐부를 찔렀다.
“왔니?”
그렇게 한참을 창가에 서 있던 지젤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검은 로브를 두른 남자가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 그는 후드를 더욱 깊이 눌러쓰며 지젤 앞에 부복했다.
“일은 어떻게 됐어?”
“…죄송합니다.”
“쯧, 어린애 하나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고.”
“죄송합니다.”
지젤은 남자를 향해 옅게 웃었다.
“죽여도 상관없으니까 어떻게든 가져오기만 해.”
“알겠습니다.”
“대신 절대 들켜서는 안 돼. 난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고 싶거든. 그래야 공포심이 더욱 극대화될 테니까.”
지젤의 눈동자가 짙은 핏빛으로 반짝거렸다.
“조금만 기다려요, 바이에드.”
【 지젤 아르투아 】
오늘은 프노이트 사절단의 환송식이 있는 날이었다. 일리아는 환영식 때와 마찬가지로 메인 홀 외부의 경비를 통솔하게 되었다. 일리아는 혹시라도 전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을까 우려했지만 다행히도 패트릭 때처럼 덤벼드는 기사는 없었다. 글렌에서의 일이 공론화되면서 일리아의 무위 또한 화려하게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일리아의 열혈 추종자인 퍼렐이 그 자리에 있었던 탓이 컸다. 퍼렐은 소문의 진위 여부를 묻는 이들에게 오히려 소문이 축소된 편이라며 열변을 토했고, 그 이야기는 은밀하게 퍼져 금세 기사단까지 도달했다. 그래서 다들 잠잠한 것이었다. 괜히 덤볐다가는 뼈도 못 추릴 테니까.
그 사실을 모르는 일리아는 ‘이번에 선발된 기사들은 군기가 바짝 들어 있네.’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문 옆에 섰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직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외부 좀 살펴보고 올 테니까 대기하고 있어.”
“넵!”
기사들을 한차례 둘러본 일리아는 아제르궁을 나섰다. 곧 가을이 오려는 것인지 바람이 전보다 서늘했다.
“일리아.”
“카일루스?”
일리아는 가만히 눈을 깜박거렸다. 카일루스가 이렇게 빨리 도착한 것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매번 예식이 시작되기 직전에 도착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 벌써 왔어요?”
“왜일 것 같아?”
카일루스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일리아에게 한 발 다가왔다.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행동에 일리아의 볼이 금세 달아올랐다.
“모, 몰라요!”
“그대가 오지 않으니까 그렇잖아. 와도 괜찮다고 했는데.”
“…조금 바빴거든요.”
정말 바쁘긴 했다. 그동안 피델리오와의 관계도 정리하고 가드너 백작 가문의 파티에도 참석한 데다가 마법사단의 부단장으로서 단원들을 훈련시키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집에 도착하면 피곤해서 곯아떨어지기 일쑤다 보니 카일루스를 찾아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괜히 미안해진 일리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카일루스를 올려다보았다.
“미안해요. 많이 서운했어요?”
“괜찮아. 그대가 바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앞으로는 시간 날 때마다 찾아갈게요. 귀찮다고 내치시면 안 돼요.”
“물론이지.”
카일루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일리아에게 입을 맞췄다. 마치 꽃잎이 스쳐 지나간 듯한 가벼운 키스였다. 일리아는 손을 덜덜 떨며 입을 틀어막았다.
“카, 카, 카일루스! 이런 곳에서!”
“괜찮아. 아무도 없어.”
“아무도 없지는 않다만.”
일리아는 심장을 그대로 토해 낼 뻔했다. 방금 들린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 황태자 전하!”
“나밖에 못 봤으니까 안심해, 그라니체 경.”
전하가 본 게 가장 문제인 것 같은데요!
일리아가 입을 뻐끔거리며 카일루스를 올려다보았다. 당장이라도 울 듯한 얼굴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카일루스는 결국 치밀어 오르는 장난기를 참지 못하고 일리아의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카일루스!”
“뭐 어때. 다 봤다는데.”
두 사람이 다투기 시작하자 테오도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끔찍한 커플이군.”
카일루스가 일리아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테오도르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업무가 일찍 끝나서.”
“잠은 잘 자고 있는 모양이네.”
“요새 심신 안정에 좋은 차를 마시기 시작했거든. 꽤 효과적이야.”
카일루스는 테오도르와 일상적인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평소에는 용건이 없으면 말도 섞지 않는 사람이 별일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상하네. 왜 저런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하면서…….’
카일루스를 힐끔 쳐다본 일리아는 이내 테오도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안색은 나쁘지 않았으나 카일루스와 닮은 황금빛 눈동자가 어쩐지 조금은 탁해 보였다.
“그럼 이따 환송식 때 봐.”
테오도르가 아제르궁 안으로 들어가고,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일리아는 걱정스러워하는 눈빛으로 카일루스를 올려다보았다.
“카일루스.”
“뭔가 이상해.”
“저도 동감이에요. 혹시 황태자 전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요?”
“글쎄.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카일루스는 그렇게 대답하며 습관적으로 일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그에 깜짝 놀란 건 일리아였다. 방금도 테오도르에게 들켰는데 또 들키지 않으리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일리아는 얼른 손을 잡아 빼며 카일루스의 등을 떠밀었다.
“들어가요, 이제.”
“아직 시간 많이 남았는데?”
“그래도요. 정 한가하시면 전하랑 노시든가요.”
카일루스는 짐짓 상처받은 눈빛으로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내 귀염둥이가 언제 이렇게 차가워진 거지?”
“지금은 일 중이잖아요.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
“알겠어. 오늘은 끝나고 시간 돼?”
“왜요?”
“잠을 많이 못 자서. 그대가 재워 줬으면 좋겠는데.”
카일루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일리아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명백한 유혹이었다. 부끄러워진 일리아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눈치 없는 고개가 먼저 움직였다. 위아래로.
“기다릴게.”
카일루스는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를 지우고 메인 홀 안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예복을 차려입은 귀족들이 하나둘씩 메인 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프노이트 사절단 역시 다른 귀족들과 함께 입장했다. 환송식은 먼 길을 떠나는 사절들을 배려하여 약식으로 치르는 게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일리아는 랜더 자작과 함께 나타난 피델리오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 역시 일리아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서 잠시나마 눈이 마주쳤지만 두 사람 모두 태연하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네.’
메인 홀의 문이 닫히고, 커다란 종소리가 아제르궁 전체를 울렸다. 환송식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 * *
환송식은 한 시간 만에 끝이 났다. 모두의 배웅을 받으며 아제르궁을 나선 프노이트 사절단은 기나긴 행렬과 함께 황성을 떠났다. 무려 두 달 만의 귀환이었다.
“모두 고생했어.”
일리아는 마지막까지 경비에 힘써 준 기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마차에 올라탔다.
“솔로, 에스테반 저택으로 가자.”
“오늘도 저 혼자 돌아가야 합니까?”
“…아마도?”
“괜찮습니다. 이젠 익숙한걸요.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그라니체 가문의 마차는 매끄러운 대로를 달려 이윽고 에스테반 저택 앞에서 멈춰 섰다. 거대한 정문을 지나 저택 안으로 들어선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집무실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카일루스는 환송식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또다시 업무에 매진하고 있었다.
“카일루스, 저 왔어요!”
“일찍 왔네.”
깃펜을 내려놓은 카일루스는 일리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진하게 입을 맞췄다. 순수할 정도로 진득한 움직임에 일리아는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전생에 키스 못 해서 죽은 귀신이 붙었는지 아주 입술이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잠시만요!”
결국 일리아는 숨을 몰아쉬며 카일루스를 밀어냈다.
“왜?”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요!”
“내가? 그랬던가?”
일리아는 가만히 지난날을 돌이켜 보았다. 그러고 보니 카일루스는 처음 연인 행세를 시작했을 때부터 밥 먹듯이 스킨십을 했었다. 손을 잡는 것은 물론이고, 자연스럽게 어깨를 안거나 때로는 손등에 키스를 하기도 했다. 정식으로 연인이 되기 전이었는데도 말이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그때는 마냥 설레서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렇게 돌이켜 보니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만약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 연인 행세를 했어도 똑같이 했을 것 아닌가!
“이런 바람둥이!”
“…내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일리아는 눈꼬리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매단 채로 카일루스의 가슴을 때렸다. 당연히 영문을 모르는 카일루스는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왜 그러는 건데?”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일리아의 주먹에 점차 마력이 실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생명의 위기를 느끼기 시작한 카일루스는 일리아의 팔을 붙잡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진정하고 말해 봐.”
카일루스가 부드럽게 손등을 두드리자 일리아는 결국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