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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67)화 (67/101)

67화 

* * *

며칠이 지나 엘리자베스 가드너의 티 파티 날이 다가왔다. 아침 일찍 일어나 치장을 마친 일리아는 사샤를 품에 안고 저택을 나섰다. 화려한 디저트와 털 달린 동물이라니. 확실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어서 와요, 그라니체 영애.”

“어머, 귀여운 고양이도 함께군요!”

“어떻게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있죠?”

일리아가 티 파티 장소에 도착하자 색색의 드레스를 입은 영애들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일리아에게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주목에 놀랄 만도 하건만, 사샤는 산책로에서처럼 애교를 부리며 뭇 영애들의 마음을 사르르 녹였다.

“다들, 앉을 시간은 줘야죠. 어서 앉아요, 그라니체 영애.”

“고마워요.”

“제가 더 고맙죠. 이렇게 참석해 줄 줄은 몰랐어요.”

“전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했잖아요. 당연히 와야죠.”

엘리자베스와 인사를 주고받은 일리아는 넓은 정원을 둘러보았다. 한쪽에는 오색의 찻잎이, 다른 한쪽에는 여러 종류의 디저트가 진열되어 있었다. 원하는 차와 디저트를 직접 골라 즐길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티 파티였다. 모두가 티 파티를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엘리자베스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듯했다.

일리아는 하녀에게 오페라케이크와 홍차를 부탁했다. 곧 하얀 장갑을 낀 하녀가 일리아의 앞에 케이크와 홍차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다른 트레이로 가 말린 생선 조각도 가져왔다. 유리그릇에 담겨 있는 생선 조각은 어린 사샤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잘려 있었다.

“사샤 것도 준비해 줘서 고마워요.”

“뭘요. 제 손님인데 당연히 준비해야죠.”

엘리자베스가 사샤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맛있니, 사샤?”

“야옹!”

사샤가 한창 맛있는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두 명의 영애가 연달아 정원 안으로 들어왔다. 크리스틴과 소피아였다. 그녀들은 정원에 함께 도착한 것이 그저 마뜩잖은 우연일 뿐이라고 주장하듯이 서로를 향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일리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반갑게 웃었다.

“크리스틴!”

“가드너 영애가 말한 엄청난 손님이 일리아였군요?”

“아니요. 아마 제가 아니라 여기 있는 사샤일 거예요. 그렇죠, 가드너 영애?”

“하하, 둘 다 맞아요. 일단 앉으세요.”

크리스틴은 일리아의 옆에 앉으며 사샤를 힐끔 쳐다보았다.

“일리아가 고양이를 키운다는 건 처음 알았어요.”

“얼마 안 됐어요. 최근에 파견 나갔던 곳에서 만났거든요.”

“최근이라면… 글렌이요?”

“맞아요. 그러고 보니 지금은 플로라 가문이 관리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대회의가 끝나고, 바이에드는 란돌프 플로라 후작을 글렌의 임시 영주로 임명했다. 란돌프는 인근 도시인 하베룬의 영주인 데다가 건축 사업도 하고 있어 글렌의 재건에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하에 정해진 일이었다. 일리아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플로라 가문은 글렌을 등쳐 먹거나 외면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요새 아버지께서 바쁘셔서 글렌에 관한 건 대체로 제가 처리하고 있어요.”

“잘 부탁해요. 힘든 일을 많이 겪은 곳이잖아요.”

“물론이죠. 아, 그리고 일리아, 로버트라고 알아요?”

“그럼요. 플로라 가문이 임시 영주직을 맡기 전까지는 저와 계속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는걸요. 그런데 로버트는 왜요? 그가 혹시 무슨 사고라도 쳤나요?”

크리스틴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오히려 반대예요. 최근에 로버트를 정식 보좌관으로 임명했는데 일을 아주 잘하더라고요.”

“후우, 난 또……. 잘됐네요. 로버트는 글렌에서 나고 자랐으니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안 그래도 재건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요. 그러니까…….”

짝짝.

글렌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지려고 하자 엘리자베스가 돌연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즐거운 파티에서 일 이야기라니요. 오늘은 놀기 위해 모인 거잖아요. 그렇죠, 랜더 영애?”

“네, 네?”

엘리자베스의 말에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소피아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어머, 랜더 영애, 안색이 좋지 않아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엘리자베스의 말대로였다. 소피아는 안색도 좋지 않은 데다가 많이 야위어 있었다. 마치 좋지 않은 일을 겪은 사람처럼 말이다.

‘랜더 가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일리아는 소피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불안해하는 모습이 자못 안쓰러웠다. 그래서였을까. 일리아는 평소였다면 신경도 안 썼을 그녀에게 무심코 말을 걸고 말았다.

“랜더 영애,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니요! 아무 일도 없어요!”

“…정말요?”

“그럼요. 아무 일도 없어요. 정말이에요…….”

소피아는 일리아의 눈을 피하며 몸을 움츠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해 보였지만 일리아는 굳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 이상 참견하는 것은 오지랖이었다.

그러나 사샤는 신경을 끌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말린 생선 조각을 우물거리며 소피아를 바라보던 사샤는 탁자 위를 쪼르르 가로지르더니 돌연 그녀의 품에 폴짝 뛰어들었다.

“사샤!”

당황한 일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사샤를 불렀지만 사샤는 요지부동이었다. 사샤는 오히려 소피아의 품에 더욱 파고들며 야옹야옹 애교를 부리기까지 했다. 그에 창백하게 굳어 있던 소피아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라니체 영애의 고양이예요?”

“네. 사샤라고 해요.”

“귀엽네요.”

일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자리에 앉았다. 사샤가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먼저 뛰어들어서 애교를 부리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원래 동물은 감이 좋다고 하지 않던가. 사샤가 반마족인 지젤을 경계했던 것처럼 소피아의 복잡한 감정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것일 수도 있었다.

“미안해요. 사샤가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는 아닌데…….”

“아니에요. 저도 동물을 좋아하는 편이거든요.”

“야옹!”

동물을 좋아한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 소피아는 티 파티 내내 사샤만 내려다보았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그냥 두지, 뭐.’

일리아는 이따금씩 소피아를 살피며 엘리자베스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노을이 질 무렵이 되어서야 티 파티는 끝이 났다.

“오늘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봐요, 가드너 영애.”

“저도 즐거웠어요. 조심히 들어가요.”

“사샤도 가야지. 랜더 영애도 조심히 들어가요.”

“…네.”

사샤를 품에 안아 든 일리아는 크리스틴과 함께 마차로 향했다. 그런데 여러 가문의 마차 사이에 황실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 한 대가 떡하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분명 아까까지는 없었던 마차였다.

일리아가 눈썹을 삐뚜름하게 올리며 마차를 쳐다보자 막 정원을 빠져나오던 영애 하나가 넌지시 말했다.

“플레타 백작님께서 랜더 영애를 데리러 오셨다나 봐요.”

“플레타 백작님이요?”

괜히 호기심이 생긴 일리아는 마차 옆에 서서 소피아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엘리자베스와 인사를 나눈 소피아가 정원 밖으로 나왔다. 그와 동시에 마차의 문이 열리며 단정한 차림의 피델리오가 마차에서 내려섰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소피아는 어깨를 움찔 떨며 걸음을 멈춰 섰다. 사샤 덕분에 괜찮아졌던 안색도 다시금 창백해졌다. 그러나 피델리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피아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많이 피곤한 모양이네, 소피아.”

“…….”

“데려다줄게. 가자.”

“…네.”

소피아의 손을 붙잡은 피델리오는 창백하게 질린 그녀를 마차까지 에스코트했다. 주변에 있던 영애들이 피델리오를 바라보며 ‘어쩜 저렇게 다정하실까.’ 하고 부러움을 나타냈지만 일리아의 시선은 그가 아닌, 소피아에게 머물러 있었다. 소피아의 얼굴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거무죽죽하게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뭔가 있어.’

일리아는 가만히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마차에 올라탔다.

* * *

칠흑 같은 밤이었다. 업무를 마치고 침실로 돌아온 테오도르는 응접용 소파에 몸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도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며칠째 같은 증상이 계속되는 것을 보니 최근 들어 건강이 안 좋아지긴 한 모양이었다.

“괜찮으세요?”

그때, 찻잎을 정리하던 지젤이 넌지시 물어 왔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손을 까딱거렸다. 차를 가져오라는 의미였다.

최근에 테오도르는 아르투아 자작이 보내 준 차를 거의 들이붓다시피 마시고 있었다. 그것을 마셔야만 안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기 전에 차를 마시지 않으면 종일 손이 떨리고 집중이 되지 않아 이제는 차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테오도르는 자신이 이상해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차를 끊을 수는 없었다. 마치 지독한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요. 드시고 푹 주무세요, 전하.”

“고마워, 지젤.”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은 지젤은 테오도르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전하, 오늘 어머니의 꿈을 꿨어요.”

“…그대도 나처럼 어머니가 그리운가 보군.”

테오도르는 찻잔을 기울이며 리안나 황후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리안나가 타계하던 당시, 테오도르는 고작 열세 살이었다. 어머니의 생신을 맞이해 깜짝 선물을 하고 싶었던 테오도르는 이전에 봐 두었던 비밀 통로를 통해 황후궁에 숨어들었다. 그리고 목격했다. 리안나의 끔찍한 최후를.

- 전부, 전부 함구하겠습니다, 폐하! 제발 고정하세요!

- 아니. 이미 늦었소, 황후.

바이에드는 들고 있던 꽃병을 휘둘러 리안나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꽃병이 깨지는 것과 동시에 리안나의 신형이 허물어지며 붉은 피가 튀었다.

- 어째서…….

- 누구나 내보이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는 법이오.

꽃병 조각을 바닥에 내던진 바이에드는 검게 물든 오른팔을 움켜쥐었다. 그렇다. 리안나는 바이에드가 저주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살해당한 것이었다.

어렸던 열세 살의 테오도르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러니 반드시 복수를 해야만 했다. 불쌍하게 죽어 간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서.

“제가 과연 어머니의 한을 풀어 드릴 수 있을까요?”

지젤의 목소리에 테오도르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무심코 찻잔을 내려다보니 검붉은 빛 찻물은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다. 테오도르는 지젤에게 찻잔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감사합니다, 전하.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목숨을 다해 돕겠습니다.”

“그래. 어머니를 위해서…….”

차를 한 잔 더 비운 테오도르는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스르르 눈을 감자 지젤이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만져 왔다. 그 손길이 따뜻하기 때문이었을까. 금세 의식이 흐려졌다.

“전하, 전 당신의 사람이에요.”

“…알아.”

“절 믿어 주세요.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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