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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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마법사 협회를 다시 찾은 일리아는 로웰에게 마정석에 관한 보고서를 올렸다. 보고서의 내용은 테오도르에게 주었던 것과 거의 동일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켈른산맥의 마정석이 레벤토 왕국의 오지에서만 채굴되는 마정석으로 바뀌었다는 것뿐이었다.
보고서를 면밀히 검토한 로웰은 당연히 진위 여부를 따지고 들었다. 그에 일리아는 가문의 기사가 귀환 선물로 마정석을 사다 주었고, 그것으로 이사벨라에게 선물할 아티팩트를 만들다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레이븐을 불러 사실 관계를 확인한 로웰은 곧장 바이에드에게 보고를 올렸다. 저주의 여파로 두문불출하던 바이에드는 마정석 수입에 관한 모든 권한을 테오도르에게 일임했다. 덕분에 테오도르는 계획했던 대로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마정석을 수입할 수 있었다.
마정석의 지급은 마법사단장인 오스카가 맡아서 하기로 했다. 가치 있는 물건이니만큼 각별한 관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리아는 잘되었다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당분간은 여유가 생기겠네.”
“아닐지도요.”
그때, 서재 안으로 들어온 에나가 일리아에게 하얀 편지 봉투를 내밀며 말했다. 노란 봉랍에서 은은한 향기가 올라오는 것으로 보아 또래의 귀족 영애가 보낸 것인 듯했다.
“이게 뭐야?”
“초대장이요.”
초대장의 발신인은 전에 산책로에서 만난 적이 있던 엘리자베스 가드너 백작 영애였다. 초대장에는 티 파티를 주최할 예정이니 사샤와 함께 참석해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저 예의상 꺼낸 말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초대를 하다니.
일리아는 옅게 웃으며 참석하겠다는 답신을 썼다. 최근에 사샤의 드레스도 맞춘 참이 아니던가. 귀여운 사샤를 모두에게 자랑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설렜다.
“사실 다른 것도 왔어요.”
“뭔데?”
에나는 머뭇거리며 편지 한 통을 더 내밀었다. 이번 편지는 피델리오가 보낸 것이었다. 환송식이 머지않았으니 그 전에 일리아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환송식이 보름 후던가.’
떠날 준비를 하는 데만 해도 수일이 소요될 테니 피델리오로서는 안달이 나는 게 당연했다.
일리아는 편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결국 사흘 후에 만나자는 답신을 썼다. 카일루스에게 이야기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카일루스는 피델리오를 싫어했다. 괜히 말없이 만났다가는 이상한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그러니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피델리오와 끝을 보는 게 나았다. 겸사겸사 카일루스에게도 소원을 말하고.
일리아는 배시시 웃으며 카일루스를 떠올렸다. 사실 카일루스에게 말할 소원은 이미 정해 놓은 상태였다. 바로 포옹이었다. 사심이 다분한 소원이었지만 솔직히 이럴 때가 아니면 또 언제 사심을 채워 보겠는가. 귀염둥이를 들먹이며 조르면 다정한 카일루스는 마지못해 들어주려고 할 터였다.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따뜻한 품에 안기는 상상을 하며 책상을 콩콩 내리쳤다.
“에나, 지금쯤이면 카일루스도 퇴근했겠지?”
“네.”
“응? 그걸 에나가 어떻게 알아?”
“시간이 몇 시인데요. 퇴근하셨겠죠. 지금 출발하실 건가요?”
“일단 저택에 계시는지 먼저 확인해 보고.”
일리아는 ‘오늘만 벌써 몇 장째인지.’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또다시 깃펜을 들었다.
그리고 한 시간 후. 그라니체 저택에 도착한 것은 카일루스의 답신이 아니라 카일루스 본인이었다.
“카일루스?”
카일루스는 디저트 상자를 일리아에게 내밀며 씩 웃었다.
“올린이 전해 달래서.”
“제가 찾아가도 되는데.”
“맨날 그대가 왔잖아. 나도 마침 한가하던 참이었어.”
“…고마워요.”
수줍게 웃은 일리아는 카일루스를 개인 응접실로 안내했다. 넓은 응접실에 단둘이 앉아 있으니 괜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일리아는 먼저 말문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뵙자고 했어요.”
“말해.”
“사실 사흘 후에 플레타 백작님과 만나기로 했는데…….”
“뭐?”
“오, 오해하지 말아요! 확실하게 선을 그으려고 만나는 거니까요! 사냥 대회 때 두 분 모두 제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셨잖아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일리아는 볼을 발그레 물들이며 횡설수설했다. 그 모습이 왠지 귀여워 카일루스는 괜히 장난기가 치밀었다.
“일리아.”
“네?”
자리에서 일어난 카일루스는 일리아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는 발그레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알겠으니까 그만 이야기해도 돼.”
“…네.”
“그리고 내게도 말할 소원이 있잖아.”
카일루스가 일리아의 손을 잡더니 하얀 반지 위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찬란한 황금빛 눈동자는 따뜻한 입술만큼이나 강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일리아는 무심코 어깨를 떨었다.
“그게…….”
“어떤 소원을 말하려고 했어?”
일리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한 번만 안아 주실 수 있나요?’ 하고 이야기하겠는가. 지금 카일루스의 품에 안겼다가는 그동안 열심히 억눌러 왔던 마음이 터져 나올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일리아의 마음도 모르고 카일루스는 계속해서 그녀를 재촉했다. 야스럽게 웃는 모습이 어쩐지 얄미우면서도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말해도 돼요?”
“말해 봐.”
“별다른 뜻은 없어요. 정말이에요. 그냥 생각나는 게 많이 없다 보니까…….”
일리아는 거의 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에 카일루스는 더욱 짙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으니까 말해 봐.”
“한 번만 안…아 주실 수 있나요?”
“…뭐?”
“그, 그냥 딱히 원하는 것도 없고 기껏 생긴 소원을 날리기도 조금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정한 거예요! 정말 사심 같은 건 눈곱만큼도 없어요!”
카일루스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게 그대의 소원인가?”
“…네. 내키지 않으시면 다른 걸로 할게요.”
“아니. 괜찮아.”
카일루스는 일리아의 허리를 끌어당겨 그녀를 품에 안았다. 한껏 경직된 어깨에서 싱그러운 봄 내음이 났다.
“카일루스…….”
“안아 달라며. 내 귀염둥이의 소원이라는데 안 들어줄 수 없지 않겠어.”
“…놀리지 말아요.”
일리아는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기 위해 카일루스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예민해진 귓가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그 때문일까.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긴장을 풀어 버리고 말았다.
“으음, 좋다.”
“…뭐라고?”
“제가 방금 뭐라고 했어요?”
“좋다고.”
깜짝 놀란 일리아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카일루스의 품에서 벗어났다. 사실 카일루스에게 대놓고 고백을 한 것은 아니었기에 얼버무리려면 얼마든지 얼버무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황한 일리아의 머리는 제대로 된 사고를 해내지 못했고, 결국 일리아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횡설수설할 수밖에 없었다.
“카, 카일루스가 툭하면 저를 막 안고 그랬으니까…….”
“그랬으니까?”
“그새 습관이 들었는지 그냥, 그냥… 아! 그런 거 있잖아요! 추운 겨울에 밖에 나갔다 들어와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면 ‘아, 좋다!’ 하고 말하게 되는 그런 거요!”
“대충 알겠어. 그대에게 나는 추운 겨울에나 존재감이 생기는 따뜻한 물 같은 존재인 거군.”
카일루스가 언짢아하는 얼굴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에 일리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어떻게 이런 오해를 하게 만든다는 말인가. 자신이 카일루스를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데!
“그, 그게 아니에요!”
“괜찮아, 일리아. 그대의 마음은 잘 알았어.”
카일루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장난기가 다분한 행동이었지만 일리아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새어 나온 진심으로 인해 사고력이 완전히 마비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라니까요! 저는… 저는…….”
“그만 말해도…….”
일리아는 울 듯한 얼굴로 크게 외쳤다.
“카일루스를 좋아하고 있단 말이에요!”
“…뭐?”
일리아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정말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사실 카일루스를 많이 좋아해요.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어느샌가 좋아하고 있었어요. 저도 모르게요.”
일리아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왜 눈물이 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꾹꾹 눌러 놓았던 감정이 한 번에 터져 나오며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났다.
“울지 마.”
카일루스는 일리아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미안해요. 우린 가짜일 뿐인데 제가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어서…….”
“아니. 사과할 필요 없어.”
카일루스는 일리아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
“나도 그대를 좋아하니까.”
“…네?”
“깨달은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어떻게…….”
“난 그대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줄 알았어. 그런 짓까지 하려고 했는데 아직도 모르고 있었을 줄이야.”
일리아는 화끈하게 달아오른 볼을 감싸 쥐며 웅얼거렸다.
“그, 그냥 분위기 때문에 그러신 줄 알았죠.”
“아무리 그래도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키스하려고 하지는 않아.”
일리아는 눈을 세차게 깜박거렸다. 서로 좋아하고 있고, 거리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럼 오늘부터 진짜 연인이 되는 거예요, 우리?”
“그래. 그대가 원한다면.”
“카일루스!”
일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카일루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지금까지 얼마나 애타고 힘들었던가. 이런 식으로 고백할 마음은 없었지만 결국 꿈을 이루었으니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좋아해요, 카일루스!”
“그래도 그대가 내 귀염둥이인 건 변함없어. 알지?”
“그럼요. 전 영원히 카일루스의 귀염둥이예요.”
일리아를 무릎에 앉힌 카일루스는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기며 말했다.
“밀어내도 돼, 일리아.”
“…싫어요.”
옅게 미소 지은 카일루스는 일리아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산들바람같이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그에 안달이 난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옷깃을 당기며 몸을 더욱 밀착시켰다. 적극적인 일리아의 태도에 카일루스는 웃음을 터뜨리며 오롯이 그녀를 받아들였고, 가볍던 분위기는 보다 격정적으로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