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마계의 마력은 본질적으로 인간계의 마력보다 우위에 있었다. 이것은 환경에서부터 비롯된 절대적인 차이이며 마력의 특성이 바뀌지 않는 이상은 달라지지 않을 불변의 법칙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특성에 변화를 줘야죠.”
일리아는 주머니에서 마정석 조각을 꺼냈다. 세실라가 귀환 선물로 가져다주었던 켈른산맥의 마정석이었다.
“이건 마정석이 아닙니까?”
“맞아요.”
켈른산맥의 마정석은 드래곤의 마력과 유사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마정석을 아티팩트 대용으로 사용할 수만 있다면 마물의 마력 간섭을 어느 정도는 차단할 수 있을 터였다.
“테드. 이리 와 봐.”
다른 마법사들을 뒤로 물린 일리아는 테드를 철창 앞으로 떠밀었다.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잠깐 실험해 볼 게 있어서.”
일리아는 테드의 손에 마정석 조각을 쥐여 주며 말했다.
“아무 마법이나 써 볼래?”
“…이 위치에서요?”
테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일리아를 돌아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법을 시전하는 도중에 마력 간섭을 받으면 체내의 마력이 뒤틀려 내상을 입게 된다. 테드 역시 조사를 진행하면서 수도 없이 겪은 일이었기에 그게 얼마나 아픈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물이 이렇게 득시글거리는 곳에서 마법을 써 보라니. 자칫 잘못했다가는 며칠 동안 병상 신세를 져야 할 수도 있었다.
겁에 질린 테드는 손을 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테드를 대신해 주려고 하지 않았다. 마법사로서의 탐구심을 충족하고자 하는 욕구보다 당장 겪을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컸기 때문이다.
테드가 계속해서 망설이자 일리아는 그의 등을 콕콕 찌르며 재촉했다.
“얼른.”
“지, 진짜요?”
“그래. 내상은 걱정하지 마. 내 특기가 방어 마법이랑 치유 마법이잖아.”
“…그래도 아프긴 해야 하지 않습니까.”
“괜찮을 거야. 아마도.”
테드는 마른침을 삼키며 철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그럼 진짜 합니다!”
깊게 심호흡을 한 테드는 마정석의 마력을 이용해 허공에 작은 물회오리를 만들어 냈다. 푸른 물회오리는 곧 테드의 의지에 따라 서서히 하늘로 솟구쳤고, 이내 바람에 섞여 흩어졌다.
테드는 얼떨떨한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마력의 제어가 어렵기는 했지만 마정석의 마력 덕분인지 이전보다는 훨씬 수월했다.
“어때?”
“확실히 괜찮아졌습니다! 대체 이 마정석이 뭐길래 이런 효과를 낼 수 있는 겁니까?”
“나중에 말해 줄게. 일단 실험부터 계속하자.”
반작용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테드를 있는 힘껏 외면했던 마법사들이 너도나도 손을 들었다. 일리아는 막 잡은 활어처럼 팔딱거리는 마법사들을 겨우 진정시키며 실험을 이어 나갔다.
중간에 마정석의 마력이 소진되는 바람에 모든 마법사가 실험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효과는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다들 체력 관리 잘하고 있어요.”
“네! 감사합니다, 일리아 님!”
일리아는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보고서를 작성했다. 마법사 협회장인 로웰이 아닌 테오도르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켈른산맥의 마정석은 엄연히 테오도르의 소유였다. 일단은 테오도르에게 먼저 보고를 하고 마정석의 지급을 제안하는 게 옳은 순서였다.
“그러려면 카일루스와도 만나야 하는데…….”
일리아는 책상에 풀썩 엎어졌다. 바이에드 몰래 테오도르를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카일루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불과 하루 전에 카일루스와 그렇고 그런 일이 있지 않았던가.
일리아는 아직도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 어렴풋한 달빛과 싱그러운 풀 냄새, 그리고 뜨거웠던 그 숨결을. 카일루스는 어땠을지 몰라도 일리아는 정말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잠깐만. 완전히 한 건 아니었잖아.”
일리아는 가만히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완전히 입을 맞춘 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고민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호수에서 사고가 났을 때도 태연하게 넘어가지 않았던가.
“그래. 그냥 태연하게 행동하자. 어제 일은 다 꿈이었어, 꿈.”
볼을 탁탁 치며 마음을 다잡은 일리아는 카일루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답신은 금방 왔다. 하얀 편지지에는 내일 당장도 괜찮으니 편할 때 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일리아는 내일 오후에 황성 집무실로 찾아가겠다는 편지를 보내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이상하게도 심장이 콩닥거리며 기분 좋은 울림을 냈다.
* * *
아침 일찍 일어난 일리아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에스테반 저택으로 향했다. 올린에게 디저트 만드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원래는 라세느에서 달지 않은 디저트를 사 카일루스에게 선물할 생각이었지만 저택을 나서기 직전 에나가 ‘직접 만들어서 선물해 보시는 건 어때요?’ 하고 넌지시 말해 왔다. 마음을 담은 수제 디저트 선물이라니. 마치 로맨스 소설의 한 장면 같지 않던가. 그래서 일리아는 직접 디저트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라니체 가문의 파티시에가 아닌 올린의 힘을 빌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올린이 카일루스의 입맛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디저트 만드는 법을 배우면 카일루스도 분명 맛있게 먹어 줄 터였다.
“그럼 잘 부탁해, 올린!”
“맡겨 주십시오!”
머리를 질끈 올려 묶은 일리아는 손을 깨끗하게 씻고 조리대 앞에 섰다. 어린 파티시에들이 불안해하는 얼굴로 일리아를 힐끔거렸지만 올린은 그녀가 잘 해내리라고 굳게 믿었다.
“일단 버터쿠키부터 만들어 볼까요?”
“좋아. 시작하자.”
올린은 밀가루와 버터, 그리고 베이킹파우더와 소금을 준비하고 마지막으로 달걀과 설탕을 꺼냈다. 그에 일리아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설탕병을 집어 들었다.
“올린, 설탕을 넣어?”
“네. 나흘 전에 각하께서 앞으로는 디저트에 설탕을 조금씩 섞어 달라는 지시를 내리셨거든요.”
“…카일루스가?”
“네! 덕분에 요새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올린은 방긋 웃으며 일리아에게 버터쿠키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워낙 세심하게 가르쳐 준 덕분에 일리아 역시 무리 없이 따라 할 수 있었다.
“와! 이것 봐, 올린!”
“모양은 완벽합니다. 이제 맛만 보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버터쿠키를 집어 든 일리아와 올린은 비장한 얼굴로 쿠키를 베어 물었다. 곧 향긋한 버터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물론 설탕이 조금밖에 안 들어간 탓에 일리아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았다.
“처음 만들어 보는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아. 내가 이런 걸 해 볼 일이 얼마나 있겠어.”
“처음인데 이 정도시라니… 재능이 대단하십니다!”
일리아는 괜히 어깨를 으쓱이며 밀대를 잡았다.
“아직 부족해. 다시 해 보자, 올린!”
“네, 아가씨!”
일리아는 오전 내내 쿠키 만드는 연습을 했고, 점심시간이 지날 즈음에는 올린도 인정할 만큼 맛있는 쿠키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전 이제 가르쳐 드릴 게 없습니다.”
“너무 추켜세우지 마, 올린. 버릇 나빠져.”
“추켜세우는 게 아니라 정말 맛있습니다. 각하께서도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고마워. 그럼 먼저 가 볼게.”
완성된 버터쿠키를 디저트 상자에 넣은 일리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차에 올라탔다.
에스테반 저택에서 황성까지는 금방이었다. 일리아가 마차에서 내려 별궁 안으로 들어서자 보좌관들이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라든가 ‘이제 살았다!’라며 알 수 없는 소리를 해 댔다. 아무래도 업무가 많아지면서 카일루스가 또다시 예민하게 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저께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보고서와 디저트 상자를 고쳐 안은 일리아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곧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잔뜩 곤두서 있을 줄 알았던 카일루스는 의외로 말끔한 모습이었다.
일리아는 시선을 내려 천천히 카일루스를 훑었다. 손등이 살짝 붉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급하게 나오다가 어딘가에 부딪친 모양이었다.
일리아가 카일루스의 손등을 조심스럽게 문지르자 그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부딪쳤어요? 괜찮아요?”
“…괜찮아. 들어와.”
카일루스를 따라 응접용 소파에 앉은 일리아는 무심코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검은 머리카락이 눈가를 거의 덮을 듯이 내려와 있었다.
“슬슬 자를 때가 된 것 같네요.”
“그러게. 그런데 그건 뭐야?”
“아, 이거요?”
일리아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디저트 상자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붉은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여니 동그란 모양의 버터쿠키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쿠키?”
“네. 제가 만들었어요!”
순간 카일루스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일리아는 간단한 청소조차 하지 못해 카일루스의 집무실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전적이 있지 않던가. 그때도 꼬박 일주일을 훈련한 후에야 겨우 제대로 된 청소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일리아가 이번에는 쿠키를 만들어 왔다. 청소도 안 해 본 그녀가 디저트를 만들어 봤을 리는 만무하니 이 버터쿠키 역시 주먹구구식으로 부딪친 결과일 터였다. 굳이 먹어 보지 않아도 충분히 맛이 그려졌다.
“어때요? 맛있어 보이죠?”
“…그렇네.”
“얼른 먹어 봐요. 자, 아 하세요.”
일리아는 수줍게 웃으며 버터쿠키 하나를 카일루스에게 내밀었다. 자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카일루스가 맛있게 먹어 주기를 기대하는 듯했다.
버터쿠키를 눈앞에 둔 카일루스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일리아가 실망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지만 맛없을 게 분명한 버터쿠키를 맛있게 먹는 것 역시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자, 얼른요.”
마른침을 꿀꺽 삼킨 카일루스는 일리아가 주는 쿠키를 얌전히 받아먹었다. 그러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어때요?”
“…맛있어.”
정말이었다. 카일루스의 입에는 조금 달았지만 그것만 빼면 올린이 만든 것만큼이나 맛있었다.
“왜 맛있……. 아니, 정말 그대가 만든 거야?”
“네. 올린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요.”
“정말 맛있어.”
“다음에 또 만들어 줄게요.”
카일루스는 쿠키를 하나 더 집어 들며 일침을 날렸다.
“한가하게 디저트나 만들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그러니까 다음에라고 했잖아요.”
카일루스는 입을 삐죽거리는 일리아를 향해 눈꼬리를 사르르 접으며 웃었다.
“상황이 전부 마무리되면 만들어 줘. 그대가 만들어 주는 거라면 뭐든 다 먹을 테니까.”
일리아는 무심코 가슴을 부여잡았다. 심장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카일루스의 미소는 그만큼 아름답고, 치명적이었다.
그런 일리아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방긋방긋 웃으며 남은 쿠키를 모조리 먹어 치운 카일루스는 손수건으로 손을 닦곤 몸을 일으켰다. 슬슬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