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식당 안은 평소와 달리 시끌벅적했다. 레이븐과 엘레나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하인들이 자리를 메워 준 덕분이었다. 그들은 일리아가 전장에서 귀환했을 때처럼 성대하게 일리아의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얼른 앉으렴, 일리아.”
“생일 축하한다, 내 딸.”
일리아는 울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이렇게 좋은 날에 눈물을 보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씩씩하게 식당 안으로 들어선 일리아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들 고마워요. 일단 식기 전에 식사부터 해요!”
즐거운 식사가 끝나고, 연이어 선물 증정식이 열렸다. 레이븐은 일리아에게 최고급 깃펜을, 엘레나는 자수 세트를 선물했으며 클리드는 일리아의 키만 한 곰 인형을 가지고 들어와 모두를 경악하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적인 곰 인형이 아니라 몸 전체가 보석으로 이루어진 호화로운 곰 인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병은 따로 있었다. 바로 세실라였다. 언제나 기상천외한 선물을 가져와 일리아를 놀라게 했던 세실라는 이번에도 범상치 않은 선물을 준비해 왔다.
“…이게 뭐야, 세실라?”
“뭐긴요. 아가씨를 본 따 만든 석상이죠.”
“나였구나…….”
일리아는 석상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지나치게 투박한 탓에 사람인지 동물인지도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자신을 생각하는 세실라의 마음만큼은 여실히 느껴지는 듯했다.
“고마워, 세실라. 최고의 선물이야. 하지만 여기 둘 수는 없겠는걸.”
모두와 상의한 끝에 클리드의 곰 인형은 금고에, 세실라의 석상은 후원에 놓기로 했다. 정원 한가운데에 석상을 놓기를 원했던 세실라가 불만을 표하기는 했지만 일리아는 ‘내 방에서는 후원이 더 잘 보여, 세실라.’ 하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녀를 달랬다.
“하아, 즐거웠다.”
후원 잔디에 털썩 주저앉은 일리아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술을 마신 탓에 정신이 몽롱했다. 그러나 반대로 기분은 날아갈 듯이 좋았다.
‘카일루스도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현재 카일루스는 지방 영지 조사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휴가를 받아 한가한 일리아와는 다르다는 말이었다. 고작 생일 파티 하나 때문에 바쁜 사람을 불러내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일리아는 카일루스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사냥 대회 때 급하게 헤어진 이후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슬슬 카일루스의 모든 것이 그리워졌다. 눈부신 외모와 따뜻한 품,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까지.
“일리아.”
“맞아. 이런 목소리였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어렴풋하게 들려온 목소리에 일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개를 스르르 돌리니 밝은 달빛 아래로 카일루스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눈가까지 늘어뜨린 그는 드물게도 예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리아는 카일루스를 그리워하는 자신의 간절한 마음이 허상이 된 것은 아닌가 싶어 눈을 세차게 비볐다. 그러나 카일루스는 마치 잘 만든 조각상처럼 그곳에 서 있을 뿐이었다.
“진짜 카일루스예요?”
“그럼 가짜도 있어?”
“어떻게 알고 왔어요?”
“전에 심어 놓은 첩자가 알려 줬어.”
일리아의 옆에 주저앉은 카일루스는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생일 축하해, 일리아.”
“…고마워요.”
일리아는 겉옷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간질거리는 분위기 때문인지 카일루스의 얼굴을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파티는 즐거웠어?”
“네. 최고의 파티였어요.”
“다행이네.”
잠깐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입술을 달싹이며 무슨 말을 꺼낼까 고민하던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얼굴을 보기 위해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카일루스가 그녀를 부드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부신 황금빛 눈동자는 평소보다 더욱 찬란하게 반짝거렸다. 마치 달빛 같기도, 태양 같기도 했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그 눈빛에 일리아는 무심코 마른침을 삼켰다.
“…카일루스.”
“왜?”
“그… 제 생일 선물은 가져오셨죠?”
말을 꺼내도 하필이면!
일리아는 말주변 없는 자신을 탓하며 한숨을 삼켰다.
“정말 예상할 수 없다니까, 그대는.”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선물은 당연히 가져왔지.”
“그럼 얼른 주세요.”
“그런데 그대가 좋아할지는 모르겠군. 손 내밀어 봐.”
일리아가 손을 내밀자 카일루스는 그녀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새하얀 반지였다.
“이건…….”
“그대와 어울릴 것 같아서.”
일리아는 조심스럽게 반지를 어루만졌다. 눈처럼 새하얀 반지는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화려했으며 마치 일리아만을 위해 만든 것처럼 손에 꼭 맞았다.
“너무 예뻐요!”
“마음에 들어?”
“네. 마음에 쏙 들어요!”
“다행이군. 그동안 너무 받기만 한 것 같아서 마음에 걸렸었는데.”
“아니요. 받기만 한 건 저죠. 카일루스가 해 준 게 얼마나 많은데요.”
카일루스와 함께한 경험들은 다시 태어나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값진 것들뿐이었다. 물질적인 것만이 다가 아니지 않은가. 그때그때 느꼈던 감정들 또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었다.
“고마워요, 카일루스.”
일리아는 카일루스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그에 심장이 덜컥한 건 카일루스였다. 그는 멍하니 일리아를 내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갑자기 미친 듯이 갈증이 났다.
“카일루스?”
“…사실 준비한 게 하나 더 있는데.”
그래서 그는 충동적으로 말을 꺼내고 말았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뭔데요?”
“밀어내도 돼, 일리아.”
“그게 무슨…….”
카일루스가 고개를 천천히 숙이며 경고했다.
“마지막 기회야. 날 밀어내.”
이윽고 따뜻한 숨결이 입술에 내려앉았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일리아는 드레스를 꾹 움켜쥐었다. 어쩐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대는 정말…….”
카일루스가 일리아에게 막 입을 맞추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돌멩이가 뚝 떨어져 두 사람의 앞에 쿵 박혀 들었다. 마력의 흔적으로 보아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의 짓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 내 동생한테 무슨 수작질이야, 이 망할 공작이?”
클리드 그라니체. 방해꾼이 나타났다. 카일루스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수작질이라니. 생일을 축하해 준 것뿐인데.”
“너는 생일 축하를 그런 식으로 하나?”
“그래. 뭣하면 너도 해 줄까?”
“웩! 됐어! 저리 꺼져!”
클리드가 사색이 되어 도망치고, 카일루스가 느긋하게 그의 뒤를 쫓았다. 혼자 남겨진 일리아는 유치한 말다툼을 벌이는 그들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술기운이 오르려는 것인지 머리가 빙빙 돌았다.
일리아는 고개를 휘휘 내젓곤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찰나의 온기가 아직까지도 입술 끝에 남아 있는 듯했다.
‘분위기 때문이었겠지…….’
일리아는 기분 좋은 꿈을 꾸었다 생각하기로 했다.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일 테니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자고.
“카일루스! 오라버니!”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일어난 일리아는 설전을 벌이는 두 사람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우리 같이 춤춰요!”
“춤?”
“일리아! 춤은 이 오라버니하고만 추기로 했잖아!”
“오늘은 제 생일이잖아요. 그러니까 다 같이 춰요.”
일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 진짜 연인이 되었습니다 】
“으으, 죽겠어…….”
잠에서 깨어난 일리아는 뭉그적거리며 침대에서 기어 내려왔다. 전날 술을 진탕 마시고 뛰어다닌 탓에 속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다행히 카일루스와 클리드가 보는 앞에서 구토를 하지는 않았지만 흥에 겨워 끔찍한 춤사위를 보여 주었다는 것이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왜 그랬어, 일리아 그라니체!”
카펫 위에 엎어져 한참을 발버둥 치던 일리아는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어제부로 일주일간의 휴가가 끝이 났다. 오늘은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꼼짝도 하기 싫었다. 원래 한번 쉬기 시작하면 출근하기 싫은 것이 직장인의 마음이 아니던가.
게다가 오늘은 실전 훈련이 있는 날이었다. 숙취로 몸 상태가 엉망인 이런 상황에서 대련을 했다가는 두들겨 맞기만 할 게 분명했다. 그동안 대련을 하면서 단원들도 쌓인 게 많았을 테니까.
일리아는 ‘가기 싫다.’를 중얼거리며 카펫 위를 굴러다녔다. 그러길 몇 분 후, 슬슬 일어날까 고민하던 차에 에나가 반가운 소식을 들고 왔다.
“마법사 협회에서 협력 요청이 왔어요.”
“왜 나한테? 오라버니는 어쩌고?”
“클리드 님께서는 새벽에 나가셨어요. 아직 조사가 덜 끝나셨다나 봐요.”
“오라버니도 참…….”
일리아는 클리드가 저택에 돌아오면 꼭 껴안아 주리라 다짐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자! 마법사 협회로!”
일리아는 오스카에게 양해를 구한 후에 마법사 협회로 향했다. 마법사 협회는 이전보다 더욱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대체 며칠 밤을 지새운 것인지 마법사들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죽어 있었다. 항상 활기차던 테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오셨어요…….”
“괜찮아, 테드?”
일리아의 물음에 테드는 퀭한 얼굴로 마른 웃음을 토해 냈다.
“하하, 네, 뭐. 괜찮습니다.”
“마력 간섭 때문에 그래?”
“네. 이게 참… 골치 아픕니다.”
일리아는 전장에서 처음 마물을 조우했던 때를 떠올렸다. 당시 수천의 마물 떼는 자연계의 마력을 흐트러뜨리며 마법사들의 지원을 방해했고, 그 결과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었다. 일리아는 드래곤의 마력이 지닌 특수성 덕분에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상당히 힘든 전투였던 것만큼은 분명하게 기억했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한 실험을 하기 위해 작은 준비물을 챙겨 왔다.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일단 가자.”
“네. 이쪽입니다.”
일리아는 테드와 함께 조사실로 향했다. 조사실에는 이미 수많은 마법사들이 들어차 있었다.
“오셨습니까, 일리아 님!”
“…다들 많이 힘들었나 보네요.”
마법사들은 죽을상을 억지로 펴며 일리아에게 다가왔다. 마치 자아를 가진 관절 인형들이 삐거덕거리며 달려드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소름이 끼친 일리아는 마법사들을 슬쩍 밀어내며 철창 앞에 섰다. 거대한 철창 안에는 각양각색의 마물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개중에는 일리아와 온실에서 싸웠던 꽃 형태의 마물도 있었다. 전과 달리 뿌리가 제대로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클리드의 조언을 머릿속에 잘 새겨 둔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철창 밖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는 마물의 뿌리를 안으로 밀어 넣으며 생각에 잠겼다. 최근에 클리드의 말을 듣고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마력의 상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