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생일이라고?”
카일루스는 그동안 생일을 잊은 채 살아왔다. 가문의 업무와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벅찼기 때문이다. 생일을 핑계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리아의 생일은 달랐다. 그녀는 명실상부 카일루스의 연인이 아니던가. 이 세상에 연인의 생일을 축하해 주지 않는 남자는 없을 터였다.
카일루스는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일리아가 좋아할 만한 선물은 떠오르지 않았다. 기껏해야 마정석 정도일까.
‘그게 아니면…….’
내 얼굴?
카일루스는 말없이 책상을 내리쳤다. 물론 일리아는 평소 카일루스의 얼굴이 취향이라는 말을 많이 해 왔고, 카일루스 역시 ‘그럼 많이 봐.’ 하고 능청스럽게 대꾸했었다. 그러나 남의 입을 통해 듣는 것과 자신이 직접 정의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일리아가 좋아할 만한 선물로 자신의 얼굴을 떠올리다니. 미친 게 틀림없었다.
“…덥군.”
자리에서 일어난 카일루스는 집무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살랑거리며 불어온 바람에 보고서가 이리저리 흩날렸지만 카일루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리는 엘리엇에게 시키면 될 테니까. 바쁜 와중에 이런 고민까지 안겨 주었으니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일단 더 바빠지기 전에 선물부터 사야 돼.’
겉옷을 챙겨 든 카일루스는 서둘러 저택을 나섰다.
카일루스의 첫 번째 목적지는 향수 가게였다. 최근에 젊은 영애들 사이에서 향수가 인기라는 소리를 주워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리아 역시 치장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니 향수도 좋아하리라 생각했다.
카일루스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향수를 구경하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이고 그를 힐끔거렸다. 그만큼 카일루스가 주는 위압감은 대단했다. 사실은 긴장한 탓에 얼굴이 굳어진 것뿐이었지만.
“어, 어서 오십시오, 각하!”
향수 가게 주인인 게일이 양손을 세차게 비비며 카일루스에게 다가왔다.
“찾으시는 향수가 있으십니까?”
“…젊은 영애가 쓸 법한 게 뭐가 있지?”
“무수히 많지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커다란 바구니를 챙긴 게일은 가게 안에 있는 여성용 향수를 모조리 쓸어 담아 왔다. 그러고는 향수를 하나씩 시향지에 뿌려 카일루스에게 건넸다. 그렇게 카일루스는 모두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즉석 시향회를 시작했다.
“이건 별로군. 향이 너무 진해.”
“이건 너무 인위적이야.”
“…지독하군.”
그러나 모두의 기대와 달리 카일루스는 게일이 가져온 모든 향을 꺼려 했다. 심지어는 손수건으로 코를 막으며 은근히 뒤로 물러나기도 했다. 나름대로 조향에 소질이 있다고 자부하던 게일로서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 마음에 안 드십니까?”
“썩 좋지는 않군.”
“헉!”
카일루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일리아에게서 느껴지는 향은 이런 인위적인 것들보다 훨씬 싱그럽고 온화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질 정도로.
‘향수는 안 되겠군.’
아무래도 다른 생일 선물을 찾아보는 게 나을 듯했다. 일리아의 체향조차 따라오지 못하는 향수를 굳이 선물할 필요가 있겠는가. 카일루스는 미련 없이 향수 가게를 나섰다.
그의 두 번째 목적지는 보석 가게였다. 로빈의 보석 가게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보석을 파는 곳이었지만 카일루스는 또다시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보석들이 하나같이 성에 안 찼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리아의 눈동자가 더 보석 같았다.
‘이것도 안 돼.’
생일 선물의 굴레에 빠져 정처 없이 아로스의 가게들을 전전하던 카일루스는 마지막으로 대장간에 들렀다. 마법사도 편하게 가지고 다닐 만한 호신용 무기를 주문하기 위해서였다.
일리아는 뛰어난 마법사였지만 무모한 구석이 있어 종종 위험에 빠지곤 했다. 그러니 호신용 무기 정도면 나름대로 유용하고 의미 있는 선물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죄송합니다, 각하. 지금 주문이 꽤 밀려 있어서요. 적어도 한 달 이상은 소요될 것 같습니다.”
대장장이는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슬슬 화가 날 지경이었지만 카일루스는 짐짓 태연한 척을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일이 많다는 사람에게 부담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선물이라는 게 이렇게 힘든 거였나.’
카일루스는 터덜터덜 대장간을 나왔다.
머릿속이 온통 선물에 관한 생각뿐이었기에 눈치채지 못했지만,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업무를 거의 반나절 동안이나 내팽개치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카일루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순간 노을빛에 비추인 커프링크스가 찬란하게 반짝거렸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일리아에게 해 준 게 하나도 없군.’
카일루스가 해 준 것이라고는 대외 활동을 핑계로 함께 밖을 돌아다닌 게 다였다. 지금까지 무언가를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왜…….’
마차에 올라타던 카일루스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일리아를 향한 자신의 마음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이제야 눈치챘기 때문이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자신이 고작 생일 선물 하나 사겠다고 반나절을 돌아다닐 위인이던가. 그것도 젊은 영애들이나 갈 법한 향수 가게나 보석 가게까지 직접 방문해 가면서.
일리아가 귀엽다거나 예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 마음이 깊어졌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카일루스는 무심코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치 독한 감기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미치겠군.”
카일루스는 애써 숨을 고르며 들뜬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차피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연인이었다. 지금은 가짜에 불과했지만 약속으로 단단히 묶여 있기에 당장 급하게 생각할 것은 없었다.
단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일리아가 연이은 실연으로 인해 연애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전부터 누누이 말하지 않았던가. 당분간은 자신의 인생을 살겠다고. 그런 일리아의 생각을 바꾸어 놓지 않는 이상, 카일루스에게 ‘진짜’가 될 기회는 오지 않을 터였다.
‘벌써 이런 생각까지 하다니. 대체 일리아를 얼마나 좋아하고 있었던 거야?’
카일루스는 자신의 감정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일리아를 유혹할 계획을 세웠다. 일리아가 이미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줄도 모르고.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일리아는 휴가가 끝나기 직전까지 침실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에나와 세실라가 툭하면 외출을 권하는 바람에 성가셨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일리아가 침실에서 두문불출하기 시작하자 그들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해졌다는 것이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슬슬 좀이 쑤시네.’
멍하니 누워만 있던 일리아는 몸을 일으켜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곧 후원 쪽에서 시끌벅적한 소음이 들려왔다. 평소에는 조용하기 그지없는 곳이었기에 일리아는 불쑥 호기심이 일었다.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일리아는 숄을 두르고 침실을 나섰다. 그러나 채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바람처럼 달려온 에나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에나는 숨을 몰아쉬며 일리아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에나?”
“의상실에서 드레스를 보내왔어요.”
“벌써 완성되었나 보네!”
일리아는 방긋 웃으며 상자를 받아 들었다. 앙증맞은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자 손바닥만 한 드레스가 보였다.
“얼른 입어 보자, 사샤.”
다시 침실로 들어온 일리아는 사샤에게 드레스를 입혔다. 옅은 연분홍색의 드레스는 사샤의 하얀 털과 아주 잘 어울렸다.
“너무 예뻐!”
“야옹!”
사샤 역시 루네르의 드레스가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 기분 좋게 울며 일리아에게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그 모습을 한참이나 감상하던 일리아는 다시금 들려오는 소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에나, 집에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요?”
“응. 밖이 소란스럽길래.”
“아무 일도 없…….”
“일리아!”
그때, 클리드가 일리아의 침실 안으로 벌처럼 날아들었다. 짐 가방을 바리바리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행장도 풀지 않고 바로 달려온 듯했다.
“오라버니?”
“생일 축하해, 일리아!”
그에 에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클리드 님, 벌써 이야기하시면 어떡해요?”
“…내가 조금 빨랐나?”
“많이요. 저녁 만찬이 준비될 때까지는 기다리셨어야죠.”
“크흠, 난 그저 빨리 축하해 주고 싶어서…….”
일리아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멍하니 눈만 깜박거렸다. 최근에 일이 많았던 탓에 완전히 잊고 있었다.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는 것을.
“내 생일이 오늘이었어?”
“네. 그래서 보름 전부터 아가씨 몰래 생일 만찬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클리드 님께서 다 망쳐 버리셨네요.”
“…어쩐지 자꾸 나가라고 하더니만.”
일리아는 그제서야 에나와 세실라가 수상하게 굴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깜짝 파티의 당사자가 저택에 남아 있는데 어떻게 몰래 준비를 하겠는가. 파티를 준비하기는커녕 생일 선물을 사 오는 것조차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죠. 일단 나가 주셔야겠어요, 클리드 님.”
“아직 일리아에게 할 말이……. 자, 잠깐! 밀지 마!”
클리드를 우악스럽게 내보낸 에나는 서둘러 일리아의 치장을 도왔다. 어쩐지 화장을 하는 에나의 손놀림이 평소보다 더 섬세한 듯했다.
“이렇게 공들일 필요가 있어?”
“있어요.”
에나는 일리아의 머리를 빗겨 주며 작게 중얼거렸다.
“앞으로 축하드리지 못할 줄 알았어요.”
그에 일리아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녀 역시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꽤 힘든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가. 가족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일리아는 애써 눈물을 삼켜 내며 말했다.
“고마워, 에나.”
“…….”
“일이 전부 마무리되면 집에만 붙어 있을 테니 안심해. 내 생일도 매년 질리도록 축하해 줘야 할걸?”
“차라리 그게 낫네요.”
치장을 마무리한 일리아는 에나와 함께 방을 나섰다.
“너무 예쁘다, 내 동생.”
복도로 나오자 어느새 말끔하게 차려입은 클리드가 기다렸다는 듯이 일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리아는 살포시 클리드의 손을 잡았다. 오랜만에 잡아 보는 클리드의 손은 크고, 따뜻했다.
“그럼 갈까?”
“응.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