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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60)화 (60/101)

60화 

사냥 대회 이후로 잠잠하던 바이에드는 최근 들어 레이븐을 마주칠 때마다 언짢은 티를 팍팍 냈다. 지나가던 귀족들마저 눈치를 볼 정도였으니 오죽했겠는가.

레이븐은 일리아가 바이에드와 마주칠 일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안 그랬으면 바이에드가 일리아의 얼굴을 뚫어질 때까지 노려봤을 테니 말이다.

“하아, 전하께서는 왜 네게 그런 일을 맡기셔서는…….”

레이븐의 짙은 한숨에 일리아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잘되었잖아요. 글렌도 구하고, 상도 받고.”

“겸사겸사 폐하의 눈초리도 받게 되었지.”

“…죄송해요. 앞으로는 아버지께 꼭 먼저 상의드릴게요.”

“그래. 믿으마.”

일리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레이븐은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겨 들었다.

“오늘 휴일 아니었어요?”

“방금 전에 서신이 왔단다. 조사에 진척이 없다 보니 폐하께서 노하신 모양이더구나.”

마법사 협회에서는 아직까지도 마물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마계의 마물이 가진 특성은 파악했지만 마력 간섭 자체를 차단하는 방법만큼은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저도 도울까요?”

“괜찮단다. 기왕 받은 휴가이니 알차게 쉬거라.”

“그래도요.”

“정 도움이 필요할 것 같으면 먼저 연락하마.”

레이븐이 저택을 나서고, 혼자 남은 일리아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탓에 슬슬 잠이 쏟아졌다.

“오늘은 잠이나 잘까.”

일리아는 느긋하게 침실로 향했으나 바로 잠들지는 못했다. 어느새 침실 안으로 들어온 에나가 그녀를 막아섰기 때문이다.

일리아는 눈썹을 삐뚜름하게 올리며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에나?”

“휴가 받으셨죠?”

“응. 그런데?”

“그럼 외출하셔야죠.”

“그게 무슨…….”

에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일리아를 드레스 룸까지 떠밀었다. 그러고는 바람처럼 드레스와 화장품을 꺼내어 그녀를 치장했다. 얼떨떨한 얼굴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에나를 바라보던 일리아는 치장이 끝난 후에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에나!”

“세실라 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얼른 다녀오세요.”

“아니, 대체…….”

“사샤도 기다리네요. 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요.”

일리아는 순식간에 저택 밖으로 쫓겨났다.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마차가 보였다. 마차 앞에는 사샤를 품에 안은 세실라가 반듯하게 서 있었다.

“세실라?”

“얼른 타세요.”

“다들 왜 이렇게 나를 저택 밖으로 쫓아내지 못해 안달인 거야?”

“쫓아내다니요. 산책은 건강에 좋은 거예요.”

“야옹!”

세실라의 품에서 벗어난 사샤가 일리아를 바라보며 마차 벽을 톡톡 두드렸다. 마치 빨리 타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일리아는 마지못해 마차에 올라탔다. 세실라와 사샤 역시 그녀의 양옆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일단 의상실로 가자.”

“드레스 맞추시게요?”

“가족이 된 기념으로 사샤한테 한 벌 선물하려고.”

루네르가 고양이 옷도 만들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리아가 마차 벽을 가볍게 두드렸다. 곧이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속력을 올린 마차는 넓은 대로를 달려 마침내 루네르의 의상실 앞에서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일리아는 사샤를 품에 안고 의상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일리아 님! 어머, 웬 고양이예요?”

“얼마 전부터 키우게 됐어. 어때? 귀엽지?”

“야옹!”

“너, 너무 귀여워요!”

루네르는 얼굴을 발그레 물들이며 눈을 빛냈다.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이었다.

“한번 안아 볼래?”

“그래도 돼요?”

“당연하지.”

일리아는 사샤를 루네르의 품에 안겨 주었다. 다행히 사샤도 루네르가 마음에 든 것인지 연신 야옹거리며 기분 좋은 듯한 소리를 냈다.

“루네르, 혹시 고양이 옷도 만들 수 있어?”

“이 아이한테 선물하시려고요?”

“응. 가족이 된 기념으로.”

“그럼 당연히 만들어 드려야죠! 그럼 치수부터 잴까요, 고양이님?”

사샤의 치수를 잰 루네르는 디자인까지 속전속결로 마쳤다. 완성까지는 약 일주일 정도가 걸린다고 했다. 대충 휴가가 끝날 즈음에는 받아 볼 수 있을 듯했다.

“그럼 잘 부탁할게, 루네르.”

“맡겨 주세요! 감사합니다, 일리아 님!”

의상실을 나온 일리아는 중앙 광장의 산책로로 향했다. 동물을 데리고 들어갈 수 있는 가게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바람이나 쐬다 들어가자.”

“네, 아가씨.”

일리아와 세실라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이따금씩 일리아를 아는 귀족들이 알은체를 해 왔지만 피곤했던 일리아는 사샤를 핑계로 슬쩍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사샤는 그런 일리아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사샤는 일리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를 피할 때마다 애교까지 떨어 가며 지나가려는 귀족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덕분에 일리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귀족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사샤에게 홀려 일리아의 곁으로 모인 귀족들은 붙임성 좋은 사샤를 귀여워하며 일리아에게도 일상적인 이야기를 건넸다. 일부 젊은 영애들은 부모님께 어떻게 허락받았는지, 훈련은 어떻게 시키고 있는지, 밥은 무얼 주는지 등을 물어보며 반려동물에 대한 흥미를 나타내기도 했다.

일리아는 애써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귀족들의 물음에 성심껏 대답했다. 이런 만남 또한 사교 활동의 일환이 아니던가. 귀족에게 있어 평판은 중요한 것이었다. 게다가 일리아는 좋지 않은 소문에 여러 번 시달린 적이 있었기에 이런 식의 이미지 쇄신은 앞으로의 생활에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일리아는 뿌듯하다는 듯이 고개를 치켜드는 사샤를 내려다보며 픽 웃었다. 사샤를 키우기 시작한 이후로 어쩐지 인생이 잘 풀리는 듯했다.

“즐거웠어요, 그라니체 영애. 조만간 티 파티를 열 생각인데 사샤와 함께 참석해 주시면 정말 기쁠 것 같아요.”

“물론이죠.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귀족들과 인사를 나눈 일리아는 다시금 산책에 나섰다. 고작 대화만 나누었을 뿐인데도 진이 다 빠졌다.

“세실라, 나 잘한 거 맞지?”

“그럼요. 잘하셨어요.”

“하아, 정신이 하나도 없네. 호수만 얼른 둘러보고 가자. 통제도 끝난 것 같으니까.”

“네.”

일리아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산책을 즐겼다. 그러나 머지않아 또다시 걸음을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호수 앞에서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기 때문이다.

“지젤?”

“…아, 일리아.”

“산책 나왔어요?”

“네. 조금 답답해서요.”

일리아는 반가운 마음이 들어 지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런데 아까까지만 해도 붙임성 있게 행동하던 사샤가 털을 곤두세우며 이빨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당황한 일리아가 걸음을 멈춰 섰지만 잔뜩 흥분한 사샤는 짧은 앞발까지 버둥거리며 하악거리기 시작했다.

“미, 미안해요.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괜찮아요. 동물들은 감이 좋잖아요. 어렴풋하게 제 정체를 눈치챈 것이겠죠.”

“그래도요. 미안해요. 그럼 다음에 봐요, 지젤!”

“네. 들어가세요.”

서둘러 저택으로 돌아온 일리아는 사샤를 침대에 올려놓고 몇 번이나 타일렀다. 그러나 사샤는 고개를 휙 돌리며 기분 나쁜 티만 낼 뿐이었다.

“편견 없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는데.”

“다 이유가 있겠죠. 저도 그분이 썩 좋지는 않던걸요.”

“으음, 체질 때문인가? 사실 지젤은 반마족이거든.”

일리아의 말에 세실라가 돌연 눈썹을 치켜올렸다.

“반마족이요?”

“응. 인간과 마족의 혼혈.”

“그런 사람이랑 왜 알고 지내는 거예요?”

“우리 일을 도와주고 있거든. 설명하자면 조금 복잡해. 아무튼 위험한 사람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일리아는 세실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곤 침대에 냅다 엎어졌다. 외출도 마쳤으니 이제는 정말 꿀 같은 휴식을 즐길 때였다.

“그리고 에나한테 나 깨우지 말라고 전해 줘. 조금만 잘게.”

일리아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이 흐려졌다.

* * *

똑똑.

책상에 반쯤 엎어져 있던 카일루스는 갑작스럽게 들려온 노크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맡은 업무가 많아 상습적으로 밤을 지새운 게 화근이 된 듯했다. 자꾸만 잠이 쏟아졌다.

“들어와.”

카일루스가 뻑뻑해진 눈가를 문지르는 동안 엘리엇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보고서 한 다발과 하얀 커피 잔이 들려 있었다. 카일루스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벌써 질려 하시면 안 되죠. 곧 사찰을 끝낸 감사들이 보고서를 올릴 텐데요.”

“하아, 왜 내가 일을 떠맡아서는.”

아무래도 바이에드는 방계 황족이자 공작인 카일루스가 직접 조사에 참여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든 모두가 납득하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카일루스만 죽어났다. 카일루스는 현재 에스테반 공작령을 돌보고, 테멜 왕국군의 동향을 살피고 있는 데다가, 테오도르와 역모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하루가 부족할 지경인데 지방 영지에 대한 조사까지 맡게 된 탓에 잘 시간은커녕 식사할 시간도 모자랐다.

공작이 된 이후로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고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냈던 카일루스지만 몇 년째 이런 생활을 계속하니 이제는 슬슬 힘에 부쳤다. 그 역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쉬시죠, 각하.”

“쉴 시간이 어디 있어.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카일루스는 엘리엇에게서 커피 잔을 건네받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잠이 쏟아졌지만 그윽한 커피 향을 맡은 덕분인지 머리가 조금은 맑아졌다.

“일단 이게 다야?”

“네. 내일까지 이것들만 검토해 주시면 됩니다.”

엘리엇이 책상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한쪽에 켜켜이 쌓여 있는 서류는 언뜻 보아도 백여 장은 훌쩍 넘어 보였다. 카일루스는 다시금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이따 부를 테니 나가 봐.”

“네. 그럼……. 아, 각하.”

“왜?”

집무실 문을 반쯤 연 채로 멈춰 선 엘리엇은 ‘오늘 저녁 메뉴는 이겁니다.’ 하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말을 흘렸다.

“그라니체 님의 생일이 이맘때라고 하더군요.”

“…뭐?”

“아마 일주일 후였던 것 같습니다.”

카일루스에게 새로운 고민을 안겨 준 엘리엇은 미련 없이 집무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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