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 * *
클리드가 그라니체 저택을 떠나고 얼마 있지 않아 대회의가 열렸다. 바이에드는 회의장에 모인 귀족들을 둘러보며 회의의 시작을 알렸고, 곧이어 외무대신인 에드가 백작이 한 손을 들어 올려 발언권을 요청했다.
“발언해도 좋소.”
바이에드의 허락이 떨어지자 에드가 백작은 차분하게 말문을 열었다.
“프노이트 사절단과의 논의가 끝났습니다.”
“무얼 요구하던가?”
“프노이트 왕국 측에서 제시한 조건은 자국민의 보호와 안전한 교역로의 확보뿐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전부 아제로스 제국의 뜻에 따르겠다고 하더군요.”
“꽤나 파격적인 제안이군.”
회의장의 상석에 앉은 테오도르는 상투적으로 대답하며 바이에드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동안 황제궁에서 두문불출하던 바이에드는 조급하게 사냥터를 떠났던 때와는 달리 상당히 편해 보였다.
‘저주를 어떻게 억제한 거지?’
테오도르는 다시금 에드가 백작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지젤과의 대화를 상기했다.
- 폐하의 오른팔에 있는 저주는 서서히 생명력을 앗아 가는 죽음의 저주입니다.
지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저주가 상당히 진행되어 일시적인 충격만으로도 위험한 상태이며 약물의 영향으로 당분간은 거동조차 힘들 거라고.
그런데 지금 이 모습은 뭔가. 바이에드의 안색이 다소 파리하기는 했으나 그때처럼 고통을 참는 듯 보이지는 않았다. 핏줄이 잔뜩 불거져 있던 오른손도 안정을 되찾은 지 오래였다.
‘벨롬 백작이 손을 쓴 건 아닐 텐데.’
사냥터에서 열사병으로 쓰러진 벨롬 백작은 아직까지도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에 시달리며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의사의 말에 의하면 숨을 몰아쉬며 몸을 뒤척거리는 게 고작이라고 한다. 그러니 벨롬 백작이 조치를 취한 것은 아닐 터였다.
‘한 번 더 시험해 봐야 하나.’
고심하던 테오도르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다시 한번 약물을 사용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바이에드는 기본적으로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또다시 저주가 발작을 일으킨다면 몸에 이상이 생길 때마다 함께 있었던 테오도르를 의심할 게 분명했다.
테오도르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상념을 떨쳐 냈다. 저주에 관한 것은 회의가 끝난 이후에 알아봐도 늦지 않았다. 일단은 그레고리 가문을 치는 게 먼저였다.
“…이상입니다.”
“고생했소. 그럼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폐하.”
바이에드의 말허리를 자른 테오도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급하게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뭐지?”
“그레고리 백작령인 글렌에 관한 것입니다.”
테오도르가 손짓하자 그의 보좌관인 카밀라가 귀족들에게 서류를 나눠 주었다.
“일단 이것부터 확인해 보시죠.”
회의장의 중앙으로 걸음을 옮긴 테오도르는 안주머니에서 영상석을 꺼냈다. 영상석에 마력을 주입하자 짙푸른 수정 위쪽으로 흐릿한 영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헉, 저게 대체 뭐죠?”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영상석에 녹화되어 있는 영상은 가히 충격 그 자체였다. 처참한 글렌의 전경과 영주성을 점거하고 있는 용병단의 존재, 그리고 사람의 몸을 가르고 나타난 마계의 마물까지.
귀족들은 저마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제로스 제국 내에서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건 이번에 파견을 나갔던 마법사단원이 가져온 영상입니다.”
테오도르는 듀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듀크는 자리에서 반쯤 일어난 채로 굳어 있었다. 누가 봐도 켕기는 것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테오도르는 여세를 몰아 조금 더 밀어붙이기로 했다.
“데려와.”
이내 회의장 문이 열리고, 기사단원들이 한 남자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게트릭 로한슨이었다.
게트릭은 테오도르와 사전에 협의한 대로 이 모든 것은 듀크 그레고리의 지시였으며 근위대에서 잘린 일을 빌미로 협박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말도 안 됩니다!”
듀크는 강하게 반발하며 바이에드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바이에드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초조하게 입술만 짓이기던 듀크는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나직하게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비장의 카드를 꺼내야 할 듯했다.
“사실 글렌은 제 막내아들인 렉튼이 관리하던 영지였습니다. 몇 해 전에 글렌에 대한 모든 권한을 위임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었을 줄은…….”
듀크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참담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마법사단이 제 아들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 않았다.”
“렉튼은 줄곧 영주성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마법사단이 영주성에서 제 아들을 보지 못했다면 분명 저 무뢰한 놈들에게 살해당한 것일 테지요!”
이번에는 게트릭이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무슨 소리! 분명 글렌의 영주성에는 아무도 없었다!”
“렉튼이 글렌으로 떠났다는 기록이 버젓이 있는데도 거짓을 고하려는 것이냐!”
“어차피 조작한 것이겠지!”
“난 그레고리 가문의 가주다! 조작 같은 건……!”
“그만.”
첨예한 대립이 한참이나 이어지자 결국 보다 못한 바이에드가 그들을 중재했다. 바이에드는 카밀라가 나누어 준 서류를 대충 훑으며 말했다.
“굳이 재판까지 갈 필요는 없겠군. 내가 직접 판결을 내리겠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폐하.”
“아니. 죄가 이렇게 명명백백한데 지체할 필요가 있겠느냐.”
바이에드는 게트릭에게는 사형 선고를, 듀크에게는 무기한 금족령과 백만 골드에 달하는 벌금을 내리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설마 듀크가 가족까지 들먹이며 빠져나갈 줄은 몰랐던 터라, 테오도르는 마지못해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판결까지 나온 마당에 굳이 바이에드의 눈초리를 받으면서까지 듀크의 죄를 물고 늘어질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테오도르가 판결을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바이에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길었던 회의의 끝을 알렸다.
“그럼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지.”
듀크를 차갑게 노려본 바이에드는 미련 없이 회의장을 나섰다. 테오도르 역시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글렌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하기 위해서였다.
‘또 뭐가 날아오려나.’
테오도르는 심호흡을 하며 바이에드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미리 보고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했으니 바이에드가 노발대발할 게 분명했다.
“들어와!”
역시나 집무실 안에서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오도르는 조심스럽게 집무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작은 꽃병이 날아왔다.
몸을 살짝 돌려 피하기는 했으나 문에 부딪친 꽃병이 산산이 부서지며 테오도르의 손등을 깊게 베었다. 테오도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등을 옷에 대충 문지르곤 바이에드의 앞에 섰다.
“폐하.”
테오도르의 목소리에 바이에드는 붉게 충혈된 눈을 희번덕이며 말했다.
“대체 누가 마법사단을 글렌에 보낸 것이냐!”
“하베룬에 가던 도중에 길을 잘못 들었다고 합니다.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검토에 시간이 걸려 미처 보고드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이가 없군. 그런 멍청한 짓거리를 한 게 대체 누구지?”
“마법사단의 부단장인 일리아 그라니체입니다.”
바이에드는 이를 뿌득 갈며 책상을 내리쳤다.
“그라니체, 그라니체, 그라니체! 또 그놈의 그라니체인 것이냐!”
바이에드가 광분해 날뛰기 시작하자 말끔하던 그의 오른손에 다시금 핏줄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손을 덜덜 떠는 것을 보니 또다시 저주가 발작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테오도르는 바이에드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그를 더욱 도발했다. 저주가 활개를 치기 시작하면 이전에 저주를 억제했던 수단을 다시 꺼내어 보일 거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현재 글렌은 영주의 부재로 그라니체 가문이 직접 관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라니체 가문이?”
“네. 아직 보고받은 것은 없습니다만… 글렌은 상당히 외진 곳이니 사병을 키우기 적당한 장소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건방진 놈들!”
분노로 이지를 상실한 바이에드는 테오도르가 고의로 그라니체 가문을 험담하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한 채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기를 수 분 후, 패악을 멈춘 바이에드는 이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허리춤을 더듬거렸다. 펄럭이는 옷자락 너머로 눈처럼 새하얀 단검이 보였다.
‘웬 단검이지?’
바이에드가 단검의 검 자루를 움켜쥐자 맞닿은 곳에서 하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성스러운 이 힘은 테오도르 역시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신성?’
단검에서 피어오른 신성은 마치 바이에드의 오른팔에 있는 저주를 억누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계속해서 정화의 기운을 순환시켰다.
“폐하, 그건…….”
“알 것 없다. 너는 그라니체 가문한테서 글렌이나 회수해 와. 글렌은 하베룬의 영주인 플로라 후작이 관리하는 것으로 하지.”
“…알겠습니다.”
집무실을 나온 테오도르는 다시금 핏물이 배어나기 시작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새하얀 검이라…….’
문득 건국 신화의 한 구절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 새하얀 신검을 들고 나타난 엘리시오는 드래곤과 함께 마족 토벌에 앞장섰고, 수많은 전투 끝에 마족을 마계로 몰아낼 수 있었다.
모든 단서가 하나의 답으로 귀결되었다. 바이에드가 마족의 저주를 받고도 멀쩡히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건 전부 신검이 있기 때문이었다. 신검은 먼 과거에 마족을 멸한 무기이다. 신성이 약한 바이에드를 대신하여 저주를 억누르는 것쯤은 간단할 터였다.
‘저것만 내 손에 들어오면.’
바이에드는 살기 위해서라도 신검을 가진 테오도르에게 굴복하리라.
테오도르는 황태자궁으로 걸음을 옮기며 계획을 세웠다. 바이에드의 경계를 사지 않고 신검을 훔치기 위해서는 황제궁의 시종을 포섭하는 게 가장 좋았다.
그러나 황제궁의 시종은 바이에드가 직접 엄선하여 선발한 이들이었다. 테오도르가 억만금을 내밀며 회유한다고 한들 넘어올 리 없었다.
‘방법을 강구해야겠군.’
테오도르의 금빛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 * *
대회의에서 제기된 글렌의 문제는 순식간에 아제로스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는 지방 영지에 대한 조사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바이에드는 술렁이는 민심을 달래기 위해 카일루스에게 직접 조사를 명했다.
또한 글렌을 구하고 범인을 확보한 일리아와 마법사단원들에게는 일주일간의 휴가와 소정의 포상금이 내려졌으며 그라니체 가문 역시 따로 공치사를 받았다.
그러나 누구나 부러워할 공을 세웠음에도 레이븐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또다시 바이에드의 견제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