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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57)화 (57/101)

57화 

카일루스가 습관처럼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에 겉옷 소매가 살짝 올라가면서 황금색 토파즈로 만든 커프 링크스가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거렸다. 일리아가 빌른에서 선물한 바로 그 커프 링크스였다.

일리아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자꾸 같은 것만 하시면 다들 비웃을 거예요.”

“비웃으면 어때. 마음에 들어서 하는 건데.”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일리아는 고개를 숙이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하얀 승마복을 차려입은 피델리오가 다른 사절들을 이끌고 사냥터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시종들의 도움으로 짐을 풀더니 곧장 일리아에게 다가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라니체 영애.”

“네. 좋은 아침이에요.”

이번에는 피델리오의 시선이 카일루스에게 향했다.

“컨디션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괜찮은 성적을 거두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피델리오의 은근한 도발에 카일루스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백작도 괜찮아 보이는군.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대결이 되겠어.”

“기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각하.”

두 사람 사이에서 피지직 하고 불꽃이 튀었다. 왠지 기시감이 느껴졌다.

‘환영 파티 때도 이런 흐름이었던 것 같은데…….’

일리아를 사이에 두고 카일루스와 의미 없는 신경전을 벌이던 피델리오는 곧 부드럽게 웃으며 카일루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각하, 저와 내기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내기라고?”

“제가 각하보다 더 큰 사냥감을 잡으면 하루라도 좋으니 그라니체 영애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카일루스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각하께서 더 큰 사냥감을 잡으시면 적어도 화친 논의가 끝나는 시점까지는 그라니체 영애께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단호하게 거절할 줄 알았던 카일루스는 의외로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에 어이없는 것은 일리아였다. 당사자가 눈앞에서 이렇게 버젓이 지켜보고 있는데 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고 있는 것인지.

괜히 기분이 이상해진 일리아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저도 낄게요, 그 내기.”

“네? 영애께서요?”

“네. 대신 제가 이기면 두 분 모두 제 말에 따르셔야 해요. 뭐가 됐든요.”

“잠깐만, 일리아. 그건…….”

“저를 걸고 하는 내기이니 당연히 들어주시겠죠?”

카일루스와 피델리오는 잠시 동안 시선을 교환하더니 곧 군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좋아.”

“그럼 됐네요. 다들 힘내요!”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한 일리아는 세실라와 함께 자리로 돌아왔다. 이로써 사냥 대회에서 우승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오랜만에 호승심이 불타올랐다.

“그런데 아가씨, 저 남자는 누구예요?”

“아, 피델리오 플레타 백작님이셔. 프노이트 왕국에서 오셨고, 화친 논의가 끝나면 다시 돌아가실 거야. 그런데 그건 왜?”

“아니에요.”

일리아가 시선을 돌린 사이, 세실라의 푸른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났다.

“아제로스의 위대한 태양이신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의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족들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황족에 대한 예를 표했다.

“다들 편히 앉으시오. 즐기자고 만든 자리니 너무 격식 차릴 필요 없소.”

바이에드와 테오도르가 상석에 앉고, 한쪽에 서 있던 황실 의사들이 그들의 뒤로 일사불란하게 도열했다. 그중에는 바이에드의 주치의인 벨롬 백작과 테오도르의 주치의인 지젤도 있었다.

“이번 사냥 대회의 우승자에게는 황실의 보석 중 하나인 그란디아의 눈물을 하사하겠소.”

이종족이 초대 황제에게 선물했다고 전해지는 그란디아의 눈물은 커다란 블루 다이아몬드를 세공하여 만든 목걸이였다. 15년 전에 타계한 리안나 황후가 즐겨 착용했었기에 귀족들 역시 그게 얼마나 대단한 보석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우승 상품으로 내걸다니. 쟁쟁한 가문이 모두 참가한 이상 우승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구미가 당겼다.

“그럼 슬슬 사냥 대회를 시작하겠소.”

바이에드가 한 손을 들어 올리자 화려한 차림의 귀족들이 말을 이끌고 숲속으로 향했다.

이번 사냥 대회는 해가 지기 전까지 가장 큰 동물을 사냥하는 사람이 우승하는 형식이었다. 사냥한 동물은 깨끗하게 손질하여 근처 민가에 나누어 주고, 가죽은 황실에 헌납한다. 그야말로 재미와 실속을 모두 챙길 수 있는 최고의 행사였다.

그러나 테오도르의 얼굴은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하필이면 어머니의 목걸이를 걸다니.’

바이에드는 해마다 리안나 황후의 흔적을 은밀하게 지워 왔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리안나 황후가 착용했던 목걸이를 황실에서 치워 버림으로써 또다시 그녀의 흔적을 지워 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테오도르는 아직도 잊지 못했다. 번들거리는 황색 눈동자와 낭자한 선혈, 그리고 차갑게 식어 있던 여린 어깨를.

주먹을 그러쥔 테오도르는 뒤쪽에 서 있는 지젤을 힐끔 쳐다봤다. 이번 사냥 대회는 그에게도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아직 황실에서의 입지가 어중간한 지젤도 그의 주치의라는 명목으로 함께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회가 열리기 직전, 지젤은 테오도르에게 이렇게 말했다.

- 어머니의 마력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아주 잠깐이라도 접촉이 필요합니다.

꽤 어려운 조건이었다. 바이에드의 몸에 이상이 생긴다고 한들 주치의인 벨롬 백작이 있는 상황에서 그녀가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벨롬 백작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모를까.’

다른 황실 의사들은 테오도르 혼자서도 충분히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니 벨롬 백작만 처리하면 저주에 관해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테오도르는 의자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사냥터를 주시했다.

한편, 기회를 엿보던 지젤은 땀을 뻘뻘 흘리는 벨롬 백작에게 음료수를 건넸다. 천막이 드리워져 있다고는 하나 지금은 한여름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벨롬 백작이 견디기에는 지나치게 더웠다.

“많이 더우시죠?”

“괘, 괜찮네.”

“전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거랍니다. 그러니 드셔도 괜찮아요.”

지젤의 말에 벨롬 백작은 황급히 컵을 받아 들며 바이에드를 힐끔거렸다.

“그럼 한 모금만 마시겠네. 고맙네.”

“별말씀을요.”

지젤은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웃었다.

* * *

일리아는 말을 타고 열심히 돌아다니는 귀족들 사이를 느긋하게 누볐다.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마법이지.’

극히 일부만 마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인간과 달리, 동물들은 모두 체내에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자연과 더불어 살며 자연계의 마력을 자연스럽게 흡수해 왔기 때문이었다. 즉, 탐지 마법을 펼쳐서 마력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동물을 찾기만 하면 된다. 큰 동물일수록 내재되어 있는 마력의 양 또한 많을 테니까.

그러나 이 방법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피델리오 플레타 역시 마법사이니 일리아와 같은 생각을 할 확률이 높다는 것.

‘두 분 코를 납작하게 해 주려면 내가 우승해야 하는데.’

주변을 대충 훑은 일리아는 즉시 탐지 마법을 펼쳤다. 강대한 마력이 숲 전체를 감싸자 동물들의 흐릿한 마력이 하나둘씩 감지되기 시작했다. 토끼, 원숭이, 늑대, 곰 등. 다양한 동물의 마력이 일리아의 감각을 스쳤다.

“으음, 더 큰 건 없나?”

그때, 숲 너머에서 늑대를 잡았다는 한 귀족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것을 필두로 여기저기서 사냥감을 잡았다는 외침이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일리아는 일단 곰이라도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웬만한 곰보다 세 배는 더 큰 곰 앞에서, 세 사람은 재회했다.

“어……. 또 보네요?”

“이렇게 만나니 더 반갑군요.”

“내가 제일 먼저 왔어.”

“크와아아앙!”

옹기종기 모인 인간들을 내려다보던 곰이 거대한 앞발을 휘두르며 울부짖었다. 세찬 바람 소리에 그들은 일시에 몸을 물렸다.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겠군.”

“그렇겠군요.”

카일루스가 검기를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피델리오의 손에서 거센 물보라가 휘몰아쳤다.

일리아는 여유롭게 웃고 있는 피델리오를 힐끔 쳐다봤다. 역시 저명한 마법사답게 마력 운용이 상당히 노련했다. 그의 손끝을 따라 움직이는 물보라는 마치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춤을 추는 무용수 같았다.

‘확실히 황실 마법사들과는 차원이 다르네.’

짧게 감탄한 일리아는 이내 고개를 돌려 곰을 바라봤다. 이 어마무시한 공격들을 직격으로 맞는다면 곰은 죽다 못해 곤죽이 될 터였다. 그렇게 되면 우승자가 누군지 정확히 가려내기가 힘들 테니, 일리아는 곰을 생포하기로 했다.

일리아는 곰이 다치지 않도록 흙으로 장벽을 세워 검기와 물보라를 막아 내고, 동시에 바람을 구 형태로 회전시켜 곰의 거대한 몸을 가두었다. 곰이 앞발을 휘두르며 바람 감옥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바람은 더욱 조여들며 곰을 압박했다.

“제 승리네요.”

일리아가 손을 탁탁 털며 말하자 카일루스가 뚱하게 대꾸했다.

“너무 진심인 거 아니야?”

“전 언제나 진심인 사람이거든요.”

“이것 참, 놀랐습니다.”

툴툴거리는 카일루스와 달리, 피델리오는 눈을 빛내며 연신 감탄사를 쏟아 냈다.

“두 가지 속성의 마법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역시 그라니체 가문은 대단하군요!”

“과찬이세요.”

일리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곰을 기절시킨 후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그럼 기다리고 계세요. 조만간 연락드릴 테니까요.”

“도대체 뭘 시키려고?”

“비밀이에요.”

일리아는 방글방글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였다. 갑자기 숲속이 소란스러워졌다. 세 사람은 서둘러 숲의 초입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거진 수풀 사이로 근위대원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피델리오를 힐끔 쳐다본 카일루스는 숲을 수색하고 있는 근위대원 하나를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이지?”

“사냥 대회가 끝나 귀빈 여러분을 밖으로 모시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각하께서도 얼른…….”

“사냥 대회가 끝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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